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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anuary 25, 2016

"오죽하면 국민들이...", 박근혜 참 나쁘다 [게릴라칼럼] '경쟁' 강조하는 정부와 기업이 부패하는 이유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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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 담화 지켜보는 시민들 지난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TV 모니터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 발표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의 핵실험과 경제혁신, 노동개혁, 경제활성화 법안 국회 처리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 유성호

한국인이 평생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경쟁'도 분명 지겹게 듣는 말 중 하나일 것이다. '경쟁해야 발전한다'라든가, '경쟁체제를 도입해야 경쟁력이 높아진다'라는 말은 한국에서 의심할 바 없는 진리로 통용되어 왔다.

하지만 '경쟁은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신념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 많은 한국인들 귀에 이 단어는 아름다운 노랫말처럼 들릴지 모른다. 단어가 주는 느낌, '어감'은 한 사회가 그 어휘를 다루는 방식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만일 '개똥'이라는 말을 '공짜 돈'이라는 의미로 쓰기 시작하면, 머잖아 사람들은 이 말에서 꽃향기를 맡기 시작할 것이다.

'경쟁'은 '이기기 위해 싸운다'라는 뜻이다. 남을 누르는 일, 그리고 남을 밟고 서기 위해 싸우는 일이 좋은 것일 수 있을까? 사람은 군집 동물이다. 우리가 무리를 짓고 살아가는 까닭은 혼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로 돕도록 만들어진 무리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 이것이 바로 경쟁이다. 

적진에 포위되는 게 즐거운 일일 수 없듯, 경쟁은 본질적으로 불안하고, 불편하고, 불행한 것이다. 경쟁을 찬미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심히 보라. 그 사람은 이제까지 경쟁해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경쟁할 필요가 없는 사람일 것이다. 재벌가 자식,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정치인들, 혹은 어떤 이유로든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적과 친구가 한 몸일 수 없듯, 싸우는 동시에 협력할 수는 없다. '경쟁'의 목적이 생존일 때, 이 싸움은 필연적으로 부도덕하고, 부패하고, 추악한 것이 된다. 내가 죽을 판인데, 도덕은 무슨 망할 놈의 도덕.

'부패 시대'로 회귀한 한국

1997~1998년 외환위기는 민영화, 대량해고, 노동유연화로 대표되는 시기로, 한국사회가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 속으로 뛰어든 때였다. 이 기간은 한국이 민주화 이후 가장 부패한 시기이기도 했다. 1996년에는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PI)가 10점 만점 가운데 5.02였으나, 1997년에는 4.29, 1998년에는 4.2, 1999년에는 3.8로 곤두박질쳤다.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면서 부패인식지수도 꾸준히 높아져 2005년에는 5.0으로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고, 2008년에는 5.6으로 최고점을 기록했다. 흥미롭게도 OECD 국가순위는 2008년 이후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이 수치를 넘어서지 못한 채 답보와 후퇴를 반복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부패지수 OECD 국가 순위는 2008년 22위에서 2014년 27위로 떨어졌다. 

부패인식지수를 변화추이를 보면, 한국사회는 외환위기 이후 투명하고 윤리적인 사회를 향해 나아가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이래로 과거로 회귀한 셈이다. 삶 자체가 불안한 곳에서는 남에 대한 배려도, 미래에 대한 이상도 존재할 수 없다. 90년대 말 생존이 한국인들의 가장 절박한 문제였듯, 이명박 대통령 이래로 생존은 다시 국민들의 최대 고민거리가 되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국민들의 생활고가 '세계 경제 불황'때문이라고 변명한다. 자신들이 경제운용을 잘 못해서가 아니라, 때를 잘못 만난 탓이라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이 이민가고 싶어하는 북유럽 국가들을 보라.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같은 나라들이 지금 '잘 나가는' 이유는 2차세계대전 이후 황폐화된 경제로부터 국민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대대적인 복지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결코 돈이 남아돌던 시절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세계경제 시스템이 붕괴되어 북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지금의 한국보다 훨씬 궁핍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명박과 박근혜 대통령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조차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며 저임금과 손쉬운 해고 정책을 밀어붙임으로써 불행한 국민들의 삶을 더욱 불행하고 만든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선진화'라고 부른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한 일은 공기업을 대거 민영화하고 공공부문에서 수만 명을 대량 해고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공기업 선진화'라는 간판을 걸고 진행되었다. 박근혜는 실질임금 성장률이 '0퍼센트' 대에 머물러 있는 노동자 임금을 깎고, 내일이 불안한 직장인들을 더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노동시장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 눈에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정글사회가 '선진화'로 보이는 것이다. 

경쟁이 부패로 귀결되는 현상은 비단 한국 사회의 문제만이 아니다. 맨체스터 대학의 인드라닐 두타 교수 팀은 논문을 통해 경쟁과 부패 사이의 상관관계를 입증했다. 부의 불평등이 심한 나라일수록 경쟁 강화가 부패를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불평등 사회에서는 공정한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며, 불평등한 조건을 두고 '경쟁'을 주장하는 것은 사회를 더욱 불평등하게 만들자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민영화, 규제철폐, 무한경쟁... 지옥을 만드는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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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렬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판교역 광장에서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천만서명운동본부가 추진하는 경제활성화법 처리를 촉구하는 서명을 하고 있다. 2016.1.18
ⓒ 연합뉴스

경쟁과 부패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는 널려 있다. 미국의 '엔론(Enron) 사태'를 기억할 것이다. 이 회사는 직원 2만 명을 거느린 대규모 에너지·통신업체였으며, 파산하기 직전인 2000년 매출은 무려 150조 원에 달했다. 같은 해, 한국 최대기업이라는 삼성전자 매출액이 34조 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엔론이 얼마나 거대한 회사였는지 알 수 있다.  

엔론은 단지 몸집만 큰 기업이 아니었다. 이 회사는 '창조적 사업모델'을 선두에 내세운 매우 창의적인 기업이기도 했다. 경제지 <포춘>은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이 회사를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꼽았다. 우습게도,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꼽힌 마지막 해에 엔론은 파산했다. 

엔론이 저지른 일은 부정·부패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하다. 횡령, 뇌물수수, 주가조작, 매출조작, 분식회계 등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은 다 저질렀으니 말이다. 이 사건은 재계뿐 아니라 미국사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기업이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를 자임해 온 미국 땅에서 말이다.

엔론 사태 이후 수많은 논쟁과 분석이 잇달았다. 무엇이 기업을 그토록 부도덕하게 만들었는가. 많은 전문가들이 '민영화', '탈규제', '경쟁주의'를 꼽았다. 

엔론이 에너지, 특히 전기사업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을 수 있던 이유는 전기 공급을 공공기관에서 민간 기업으로 넘긴 민영화 때문이었다. 전기가 국민들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인 만큼, 기업들에겐 짭짤한 이익을 보장해 준다. 여기에 시장주의자였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온갖 법적 규제를 철폐하는 데에도 앞장서, 기업들이 이윤을 위해 시장까지 조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민간기업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지, 국민이나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게 아니다. 그러기에 법과 규제는 기업의 탐욕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안전장치다. 탐욕에서 책임을 뺄 때 우리 사회는 '정글'로 변한다. 여기에 경쟁을 보태면 서로 물어뜯는 '지옥'이 완성된다. 

한국 사회, 엔론의 확장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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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엔론, 세상에서 제일 잘난 놈들>의 한 장면.
ⓒ 영화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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