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Sunday, August 28, 2016

헬조선 모르쇠, ‘노오력’만 하라는 정치인ㆍ지식인 거짓말을 읽어드립니다

도전ㆍ진취ㆍ긍정적 ‘노오력’ 논리

가혹한 자기계발 강요에 불과해

틀 정해두고 “경로이탈” 경고만

절망ㆍ자조 빠진 청년들 ‘탈조선’

‘열정’ 주장한 교수엔 비난 물밀듯

위로ㆍ분노 다 놓친 지식인의 현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사에서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시대의 개념어처럼 되어 버린 ‘헬조선’이나 ‘흙수저ㆍ금수저’ 등을 빗대어 언급한 것이다. 이어서 “자기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결과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으며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도전과 진취, 긍정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대통령은 그간 전 세대에 걸쳐 강요된 국민(자기)계발의 서사를 그대로 다시 끌어올렸다. 어떤 문제가 있든 그것은 개인의 문제, 혹은 일탈이며 모두가 열정을 가지고 ‘노오력’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헬조선’ 이전에 유행한 단어들을 살펴보면 ‘노오력’ ‘열정페이’ 등, 개인에게 가혹한 자기계발을 요구하는 현 사회에 대한 조소를 담은 것들이 많다.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그러한 현상이 겹겹이 쌓이며 만들어졌다. 더 이상 그 어떤 수사로도 규정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단어 자체에만 집착했고 다시 모두에게 도전, 진취, 긍정과 같은 익숙한 단어를 제시했다. 이것은 하나의 비극이며, 역설적으로 이 시대가 왜 ‘헬조선의 시대’일 수밖에 없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헬조선’이라는 단어 이전에 그 현상이 있었다. 우리 사회는 인간을 주조하는 계발의 틀을 만들어 두고, 모두에게 거기에 들어갈 것을 강요했다.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대개 잉여, 패배자와 같은 낙인이 붙었다. 특히 청년 세대에게 은밀하게 장착된 내비게이션은 명확한 목표를 계속해서 제시했다. 그들은 정해진 도로에서 벗어나는 순간 “경로를 이탈했습니다”하는 경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기회가 주어진 세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결국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함께 만나 자신들이 달려온 도로를 ‘헬조선’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가장 먼저 진단하고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주체들이 있다. 특히 정치인과 지식인은 어깨에 진 사회적 책임의 무게만큼 존중 받는다. 하지만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헬조선의 시대가 개막될 것임을 경고하지 않았다.
이 현상을 가장 먼저 대중에게 알린 것은 한 명의 소설가였다. 그는 자신의 등단작인 ‘표백’(2011)에서 젊은 세대를 ‘표백세대’로 명명했다.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이 사회는 어떤 것을 보탤 수 없는 흰 그림이며 ‘완전한 사회’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에 물들어 표백되어가는 것뿐이다. 결국 저항의 방식으로 자살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소설가 장강명은 누구보다도 먼저 표백되는 젊음을 포착했고, 그것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2015)는 ‘헬조선의 시대’가 활짝 열린 이후에 나온 소설이다. 이미 ‘탈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할 시점이었다. 표백세대들은 자살 대신 한국을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물론 절망과 자조에서 나온 저항의 한 방식이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청년들은 많지 않다. 그래도 캐나다와 호주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면 얼마를 벌 수 있다더라, 트럭 운전도 괜찮다더라 하는 내용의 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 계나는 한국 사회를 “가까이에서 보면 정글이고 멀리서 보면 축사”라고 규정한다. 거기에서 개인은 톰슨가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행복을 위한 호주행을 결심한다. 장강명은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게 되는가에 대해 글을 썼고, 지난 한 해 가장 뜨거운 호응을 얻은 소설가가 되었다.
한 명의 소설가가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동안, 정작 그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은 침묵하거나 외면했다. 특히 대학교수인 김난도는 ‘아프니까 청춘이다’(2010)로 청년들의 아픔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것이 자기계발의 논리에 지친 그 시기의 청년들에게 큰 위로를 주기는 했으나, 그 이후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수사 자체는 청년들의 아픔을 정당화하고 열정을 강요하는 데 활용되었다. 하지만 김난도는 그것을 외면하고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2012), ‘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2015) 등의 연작을 내 놓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에 대한 비난이 밀려들었다.
영화감독 변영주는 2012년 한 인터뷰에서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 자기계발서를 공개 비난했고, 이후 "모욕감에 잠을 잘 수 없다"는 김 교수에게 SNS를 통해 사과했다. 트위터 캡처
김난도는 자신에게 쏟아진 여러 비난들에 대해 “제가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나요?”하고 항변한 바 있다. 모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향한 격한 표현이 나오자 그렇게 반응하며 “모욕감에 한숨도 잘 수 없네요”라고 덧붙였다.
그가 받았을 모욕감과는 별개로, “내가 이런 사회를 만들지 않았다”고 하는 발언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는 청년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싶다고 했으나, 그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다. 물론 공감하는 것이야 누구에게나 열려 있겠으나 멘토의 역할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그들을 위한 대안을 제시했어야 한다. 김난도가 어떻게 항변하든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수사는 ‘헬조선’의 시대를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제쳐두고 하지 않아도 될 일에 열을 올렸다. 말하자면 ‘직무유기’인 셈이다.
2015년에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2015)가 등장했다. 김난도가 ‘공감’을 이야기했다면 장하성은 ‘분노’라는 키워드를 내세웠다. 그러나 ‘왜 분노해야 하는가’는 시대의 수사가 될 수 없었다. 그 포착이 너무 늦었고, 그보다는 애초에 분노의 구도를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장강명은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주체를 ‘사자’로, 그것을 강요 받는 피주체를 ‘톰슨가젤’로 그려냈다. 이것은 말하자면 자본과 노동, 기성 세대와 청년 세대의 대립구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하성의 분노는 애꿎은 곳에 가서 닿았다. 고소득 노동자와 저소득 노동자를 구분하며, 그 임금 격차에서 우리 시대의 문제를 찾았다. 그러니까, 노동자라는 피주체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생태계를 교란시킨 사자, 육식동물에게는 죄가 없고 기린이나 톰슨가젤 같은 초식동물에게 문제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은 위로에도 분노에도 실패했다. 혹은 위로만 하거나 분노만 하고는 침묵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 부여된 사회적 역할이 있다.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을, 대학 교수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기업인도, 종교인도, 우리 사회의 그 누구도 마찬가지다. ‘표백’에서 ‘한국이 싫어서’로 이어지는 장강명의 작업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고 그에게는 박수를 보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발 앞서 문제를 포착해야 할 이들은 모두 침묵했다. 혹은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자신의 역할을 도외시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거짓의 서사 중 하나다.
김난도는 아픈 청춘을 위로하기 이전에 그들을 아프게 한 사회 현상을 진단하고 대안을 내놓았어야 했다. 장하성은 아픈 청춘에게 분노를 종용하기 이전에 그 표적을 제대로 겨냥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여러 지식인들은 그러지 못했다. 대통령은 ‘헬조선’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구축한 자기계발의 서사, 그 거짓이 지금의 시대를 불러왔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절망적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은 한 사람의 소설가와 평범한 ‘우리들’뿐이다. 그래서 우린 “한국이 싫어서”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민섭 문화평론가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