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통찰과 통통 튀는 생동감으로 가득차 있는 2030 칼럼 '해시태그 #청년'이 매주 화요일 <오마이뉴스> 독자를 찾아갑니다. 박정훈님은 배달노동자로 배달하는 사람들의 노동조합 '라이더 유니온'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편집자말] |
지난 20일, 서울 합정역 사거리에 위풍당당하게 솟아오른 하나의 성, 메세나폴리스(주상복합아파트) 한복판에서 벌어진 실랑이다. 명예는 모르겠지만, 가격은 알 수 있다. 한 채에 약 15억~17억 정도다.
건물에도 명예가 있을까? 소름끼치게도 다음날 드라마 'SKY 캐슬' 9화를 보는데 메세나폴리스에서 들었던 말과 똑같은 대사가 나왔다. 선택된 부자들만 사는 동네 '캐슬'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려는 주민 수임(이태란 분)에게 이웃들은 "명예를 훼손하지 마라", "집값 떨어진다"라는 비난을 퍼붓는다. 드라마 같은 현실일까? 현실같은 드라마일까?
이 비싼 건물 한가운데에 헬멧과 마스크를 쓴 라이더들이 플래카드를 펼쳤다.
"우리는 화물이 아니고, 손님은 귀족이 아닙니다."
곧바로 경비원들이 뛰쳐나와 라이더들에게 욕설과 손찌검을 하고, 촬영을 위해 나온 방송국 기자들에겐 찍지 말라며 고함을 질렀다. 너무 화가 난 보안팀장은 발을 동동 구르며 펄쩍 펄쩍 뛰기도 했다. 8명의 라이더들이 손에든 건 흉기가 아니라 피켓과 플래카드, 마이크였다.
그들의 대타협
▲ 2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 주상복합아파트에서 배달업체 종사자 모임인 '라이더유니온' 회원들이 배달노동자들의 주민용 엘리베이터 사용 금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며 '우리는 화물이 아니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2018.12.20 ⓒ 연합
건물의 명예가 훼손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라이더들의 명예는 확실히 손상됐다. 이곳 주민들이 배달원들을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태웠기 때문이다. 그 내막이 재밌다.
라이더유니온이 메세나폴리스 주민자치회와 주고받은 공문에 따르면, 주민들은 냄새가 나고 건물이 지저분해진다는 이유로 배달을 아예 막아버리자는 다수파와, 그래도 배달을 이용하고 싶다는 소수파로 나뉘었다.
'폴리스'라는 아파트의 명칭에 걸맞게 주민들은 매우 민주적이었다. 소수의견을 존중하여 대타협에 성공한다. 주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평소 쓰지 않던 화물용 승강기에 배달원들을 올려 보내자는 합의안이었다. 페리클레스도 울고 갈, 참여 민주주의의 결과다.
이 폴리스의 민주주의를 떠받치기 위해 누군가는 화물이 됐다. 화물칸에 타라고 하면 군말 없이 타고 올라갈 배달원들이다. 하필 내가 배달하는 아파트였다.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4개의 일반용 엘리베이터를 지나쳐서 비상문을 열고 들어가야 탈 수 있다. 비상문을 열면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손짐작으로 누른다. 환풍기는 가동되지 않아 악취가 나고, 비닐은 뜯겨 있으며 청소도 되어 있지 않다. 타고 있으면 내가 짐짝이 된 기분이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이 승강기가 "직원용·이사용으로 쓰는 비상용 승강기"라며 "승강기를 청소해 배달원들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게 하겠다"고 했다.
고분고분 배달을 할 줄 알았던 라이더들이 갑자기 성에 침입해 입을 열고 말을 하니 성을 호위하는 무사들이 화가 날 만하다. 그들의 분노에도 라이더들은 품위를 잃지 않고 교양 있게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우리는 화물이 아니다", "인간으로 대해달라"고 말했다. 폴리스의 광장에 어울리는 민주적이고 아름다운 연설들이다.
그래서였을까? 마이크에서 음성이 나올 때마다 그들은 외쳤다. "그만해." 그리고 보안요원을 동원해 플래카드를 가렸다. 건물의 명예가 훼손돼 집값이 떨어질까 두려워했다. 그들은 따뜻하게 음식을 배달하는 사람의 노고에 대해 모르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을 모른다. 고대 폴리스의 시민들이 노예노동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처럼 말이다.
한편, 충남 태안의 원복면 방갈리에서는 24시간 도시를 밝히기 위해 석탄가루가 된 사람이 있다. 화력발전소의 먼지를 제거하라고 하면, 군말 없이 제 몸을 컨베이어 벨트에 밀어넣는 발전소 하청 노동자들이다. 고분고분 위험한 일을 할 줄만 알았던 24세의 한 청년은 무려 대통령을 만나자고 손 피켓을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 그 밑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나 김용균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그가 죽기 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전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노고에 대해 모르고 부끄러움을 모른다. 수도권의 시민들은 방길리의 청년들이 하고 있는 노동을 당연하게 여긴다.
당신이 누리는 모든 것엔 타인의 노고가 묻어있다
전기에는 석탄이 묻지 않는다. 전기를 만들다 사망한 노동자의 피도 묻지 않는다. 따뜻한 배달음식에는 바깥의 추위도, 라이더의 노고도 묻어있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위험하고 지저분한 발전소를 눈에 띄지 않는 시골에 세워놓고 노동자들을 집어넣는다. 고급 아파트의 주민들도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배달원들을 화물칸에 집어넣는다.
세상이 가리고, 우리들이 모른다고 해서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전기를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은 밝은 빛으로, 음식을 배달하는 라이더들은 따뜻하고 편안한 음식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뽑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들의 존재.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지금 "나는 김용균이다"라고 거리에서 외치고 있으며, "라이더는 화물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다. 빛과 소금 같은 존재 예수가 이 세상에 온 날이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했다. 신이 아닌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두려움과 불안, 고독 속에서 그는 십자가를 지는 선택을 한다. 이 인간적 용기야말로 '기적'이 아닐까.
이 기적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거리 곳곳에 있다. 우리가 기리고 축복해야 할 예수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만 있지 않다. 인류가 마구간의 예수를 찾아낸 것처럼, 우리주변의 소중한 존재들을 찾는 것이야말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빛을 만들던 김용균씨는 세상에 비정규직 문제를 밝히는 빛이 됐다. 굴뚝위에 올라간 파인텍 노동자들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곡기를 끊고 소금만을 먹고 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자신을 갈아 넣는 사람도, 21C의 산타 택배노동자들도 있다. 여기에 예수가 있다.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도 거기에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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