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말과 행동에 꽤 신중한 편입니다. 예민한 당내 현안에 대한 질문에 가급적 말을 아낍니다. 당 대표 후보 시절과 대표 선출 직후, '5.18 폄훼' 발언 의원 3인에 대한 처리를 묻는 질문에 황 대표의 답변은 한결같이 "절차대로 하겠다" 였습니다. 기자들이 요리조리 질문을 바꿔 물어도,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윤리위에서 검토 중입니다"라는 똑같은 답변이 나왔습니다. 이 같은 '고구마 답변' 탓에 황 대표가 자신의 말 때문에 곤혹스러워진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중에 신중을 기한 황 대표에게 위기가 왔습니다. 한국당 전, 현직 의원들의 '세월호 막말' 논란이 지지율 상승세를 이어가던 황 대표의 발목을 잡게 됐습니다. 황 대표 체제 전에 터진 '5.18 폄훼' 발언 논란도 묵은 숙제입니다. 남의 입 때문에 시험대에 오르게 된 겁니다.
■ "황 대표 대노했다…주변에서 자꾸 일 내니까"
세월호 참사 5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황교안 대표는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세월호 관련 언행 유의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황 대표의 당부가 무색하게 그날 밤 차명진 전 의원은 입에 담기 힘든 망언 일색의 세월호 비하 글을 SNS에 올렸습니다. 차 전 의원은 그날 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의 개인 유튜브 채널인 '김문수 TV'에 출연해 "세월호는 교통사고나 다름없는데, 보상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등의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논란이 되자 차 전 의원은 두 시간 만에 해당 글을 삭제했고, 다음 날 유튜브 '김문수 TV'에서는 문제의 영상이 사라졌습니다.) 세월호 망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참사 5주기 당일에는 4선의 한국당 정진석 의원이 '세월호가 징글징글하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받았다며 SNS에 올려 논란을 키웠습니다.
한국당 핵심 당직자는 황 대표가 16일 오전, 차명진 전 의원의 막말 논란 등을 듣고 몹시 화를 냈다는 반응을 전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추모해야 하는 날 왜 그런 발언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 특히 황 대표 본인은 무슨 말이든 신중하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주변에서 자꾸 일을 내 무척 속상해했다는 분위기도 전했습니다. 황 대표의 불편한 심기가 전해진 건지, 차 전 의원은 16일 오전 사과글을 SNS에 올렸습니다. '황교안 대표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사고 책임자로 고발당했다는 뉴스를 보고 흥분한 나머지 감정적인 언어로 세월호 유가족을 비난했다'는 겁니다. 차 전 의원은 전날 올린 세월호 비하 글에서도 "세월호 사건과 아무 연관 없는 박근혜, 황교안에게 자식들 죽음에 대한 자기들 책임과 죄의식을 전가하려 하고 있다"며 황 대표를 언급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황 대표에 대한 그릇된 충성심에서 쓴 글이 오히려 황 대표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마지못해 사과글을 올린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차 전 의원은 사과글을 올리기 불과 한 시간 전, '김문수 TV'에 출연해서는 전날 자신이 올린 '세월호 비하' 글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점은 사과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대목입니다. (이 영상 역시 현재 '김문수 TV'에서 사라졌습니다.)
■ 황교안의 사과, 또 사과…서둘러 윤리위 소집
세월호 막말 논란에 대한 황 대표의 대응은 어느 때보다 빨랐습니다. 황 대표는 16일 인천가족공원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일반인 희생자 5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직후 정진석 의원과 차명진 전 의원에 대해 "부적절하고 국민 정서와 어긋나는 표현을 했다"며 유감을 표시하고,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들께 당 대표로서 진심 어린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습니다. 곧바로 19일 윤리위 소집도 공식화했습니다. 그리고 17일 오전 당 회의에서 다시 한 번 공식으로 사과했습니다. 특히 "당 일각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부적절한 발언들이 나왔다"며, "유가족에게 상처를 준 것은 물론이고 표현 자체도 국민감정과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당 윤리위에서 응분의 조치를 취해달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당 내부를 향해서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국민 입장에서 생각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 '5.18·세월호 망언' 징계 결과, '황교안 호' 방향 좌우?
황 대표에게 오는 19일 소집되는 당 윤리위에서 '5.18 폄훼' 발언 3인과, '세월호 막말' 2인을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물으면, 아니 묻지 않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됩니다. "절차대로 잘 처리할 겁니다." 이걸 겁니다. 그럼에도 기자들이 또 따라붙어 물으면 "윤리위가 알아서 처리할 테고 저는 그 결정에 따를 겁니다" 정도가 아닐까 예상해 봅니다. 다만, 황 대표가 "국민감정에 맞지 않는 표현이었고, 응분의 조치를 취해달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만큼, 당 윤리위도 징계 수위를 놓고 고민할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건 이번 징계 결과가 앞으로 '황교안 호'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한국당의 '막말'은 극우 지지층에는 호응을 받는데, 중도보수층의 마음은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막말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더 오른쪽에 있는 지지층을 끌어들일지, 중도보수층으로 지지세를 확장할지의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점을 의식한 듯 당내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재경 의원은 "5.18과 세월호 대응에서 상처를 덧나게 하고 신뢰를 잃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며, "우리는 우리와 생각과 입장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데 인색했던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민 가슴 속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또 원내 대변인을 맡고 있는 김현아 의원은 페이스북에 "정치가, 정치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가족들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를 소망한다"고 썼습니다. 신보라 청년 최고위원은 "발언들이 원칙과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음을 당 일원이라면 누구나 깊이 헤아렸으면 좋겠다"며, 다만 "해당 발언을 놓고 한국당을 호도하지는 말아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홍문종 의원은 "여당과 어용 시민단체가 한국당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며, 당 대표와 당에 결단을 촉구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면서 "당 대표가 단호히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 식구들을 보호해주셔야 하고, 이럴 때일수록 우리 식구들 더 힘내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 한다"고 했습니다.
홍문종 의원의 지적대로 '우리 식구' 이른바 '집토끼'를 지킬 것이냐, 김재경 의원의 지적대로 '신뢰를 잃는 악순환을 끊을 것이냐'의 선택은 황 대표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나비 효과처럼 내년 총선, 내후년 대선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4.3 보궐선거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1차 관문을 통과한 황 대표의 정치력은 '막말' 논란의 처리를 놓고 2차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안다영 기자 (browneye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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