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코리아타임즈=오주르디] 무엇이 야당을 약골로 만든 걸까. 그 원인 중 하나로 제 살 갉아먹기 식 사분오열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강펀치를 날려야 할 때 갖고 있는 힘마저 갈기갈기 나눠 잔 펀치로 만드는 것이 야당의 습성이다.
재보선 풀린 옷깃 통해 비쳐진 추한 속살
모두 앞으로 가야 하는데 따르는 대오는 얼마 되지 않는다. 어떤 열은 좌나 우로, 목소리 큰 이들은 아예 뒤로 가기도 한다. 이게 새정치연합이다. 평상시에는 각자의 입장 차이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중요한 정치 어젠더 앞에서는 가치관이 다르다는 명분을 내세워 소그룹으로 나뉘어 티격태격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내부 갈등과 대립이 없는 정치집단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선거를 앞둘수록 이런 분열 양상이 심각해진다는 것이다.
이번 재보선을 통해 추한 속살을 드러냈다. 대선후보였던 정동영 전 의원은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해 야당 지지자의 자존감에 침을 뱉었다. 천정배 의원은 광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스스로 ‘뉴DJ당’ 후보임을 자처했다. 지역주의라는 달콤한 꿀 몇 모금 얻기 위해 ‘호남당’ 재건을 외치며 뒷걸음질 친 천 의원의 행보는 그저 한심할 뿐이다. 이게 제1 야당의 민낯이다.
제2야당이었던 통합진보당은 공안정권에 의해 해산 당했다. 정부가 의석정당을 ‘반국가적인 단체’로 규정하고 헌법재판소에 해산심판을 청구한 것은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없었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새정치연합은 정부의 이 같은 만행을 지켜만 봤다. 정부여당이 쳐 놓은 ‘종북의 덫’에 걸려 옴짝도 못할 만큼 허약하고 미욱했다.
새정치연합과 톨스토이의 우화는 판박이
새정치연합을 들여다보면 떠오르는 게 있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가 불교의 ‘열반경’을 인용해 자신의 저서에 등장시킨 우화가 그것이다. 이런 얘기다.
길 가던 나그네가 사자의 습격을 받아 우물 속으로 몸을 피한다. 칡넝쿨을 잡고 버티는데 쥐들이 넝쿨을 갉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설상가상 우물 아래에는 용이 큰 입을 벌리고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 그 순간 목마른 나그네의 입에 뭔가 떨어졌다. 우물 옆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흘러내리는 꿀이었다. 나그네는 그 꿀맛에 취해 ‘맛있다’를 연발하며 잠시 안락감에 빠져든다. 톨스토이는 이 우화를 ‘인생’에 비유했다.
그런데 새정치연합의 현재 모습에 빗대도 앞뒤가 딱 맞는다. 새누리당과 박 정권을 사자로, 국민의 심판을 용으로, 야당 내부 분열을 쥐들로, 꿀을 정치적 기득권으로 대체해보자. 야당의 현재 모습과 판박이다. 정부여당의 공세와 모략에 쫓기는데 국민의 심판은 입 벌린 용처럼 무섭다. 설상가상 내부 분열이라는 쥐들이 생명줄을 갉아 먹는다.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그런데도 꿀맛에 취한 나그네처럼 의원배지라는 기득권에 안주하려 한다. 이게 바로 제1야당의 꼬락서니다.
친노와 비노, 호남과 비호남, 친문과 반문으로 나뉘어 벌이는 자중지란이 가관이다. ‘호남 출신 의원 수십 명을 데리고 나와 당을 만들겠다’, ‘이번 기회에 친노를 숙청해야 한다’며 호남 민심을 자극해 지역주의로 회귀하려 한다. 또 ‘문재인 대표 체제로는 더 이상 안 된다’, ‘분열의 책임은 대표에게 있다’며 문 대표를 흔들어 댄다. 그래, 지역주의로 회귀해서, 야권의 대선 선두주자를 흠집 내서 어쩔 텐가. 당 전체가 자숙하는 모습으로 위기 돌파에 진력해야 할 상황인데도 망조가 들 얘기만 한다.
이러다 또 여당 계략에 당한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호남당 창당’ 같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그만하고, ‘대표 책임론’ 뒤에 숨겨놓은 ‘친노 척결’이라는 비수를 거둬라. 지지율 25%가 넘는 대권주자가 그나마 당내에 있다는 것을 축복으로 알아야 한다. 재보선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유력주자를 밀쳐내는 건 야권 전체의 손해다. 문 대표가 타격을 입으면 가장 좋아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여당이다.
야당은 전략적 미흡함에 대한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하지만 문 대표까지 방향과 목표를 잃어서는 안 된다. 야권 제1 대선주자가 아닌가. 정권교체를 통한 경제개혁과 정치쇄신, 이것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문 대표는 ‘2012대선’이라는 우물을 빼앗겼고, 4.29재보선 이라는 우물도 잃었다. 그렇다고 주춤할 필요는 없다. 또 파면된다. 빼앗기면 또 파고, 잃어버리면 또 팔 기회라고 생각해라. 목적이 이뤄질 때까지 그래야 한다. 우물을 가장 잘 판 사람이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삭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다.
이삭처럼 파고 또 파면된다
물이 부족한 중동지역에서 우물을 확보하는 건 개인 뿐 아니라 집단 전체에게 대단한 성공이 아닐 수 없다. 이삭은 일곱 번 도전해 끝내 자신과 종족이 맘껏 누릴 수 있는 ‘완성된 우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우물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파 놓았던 것이었으니 ‘유산’이나 다름없었다. 이삭은 이 두 우물을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에게 빼앗겼다. 그리곤 새 우물을 찾아 떠난다. ‘자수성가’의 길로 나선 셈이다. 세 번째 우물과 네 번째 우물을 얻는데 성공했지만, 그 지역 사람들의 텃세 때문에 또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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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렘브란트,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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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우물부터는 빼앗기지 않았다. 빼앗으려 덤비거나 시비를 거는 이들이 없어 마침내 ‘이삭과 그 종족의 우물’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우물을 팠다. 목표의 완성이 확고해질 때까지 새 우물을 판 것이다.
국민의 ‘이삭’, 기대할 수 있을까?
문 대표도 그래야 한다. 이삭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우물을 빼앗겼을 때 자신의 우물을 찾아 나선 것처럼, 문 대표도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친노 유산’을 벗어 던지고 자신만의 정치로 국민 앞에 서야 한다. 빼앗기면 또 팠던 이삭처럼 항상 새 우물을 팔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이삭은 쓸 만한 우물을 확보한 뒤에도 ‘우물의 완성’을 위해 또 새 우물을 팠다. 안주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치자. 권력에 안주해 정권교체의 당위성과 목적을 등한시한다면 정권교체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삭의 일곱 번째 우물 같은 ‘완성된 우물’을 국민에게 선사하는 그런 야당, 그런 야당 대표면 얼마나 좋을까.
빼앗기 싸움이 치열한 곳이 정치판이다. 우물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우물을 파는 것에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시대의 위인을 차기 대선에서 볼 수 있을까? 문 대표가 이삭처럼 그렇게 우물을 파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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