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 선조와 후손 대화 나누고 다른 문화 만나는 공간"
4년간 뉴욕한인회장 맡아 건립 추진..6월 14일 맨해튼에 개관(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미국은 우리나라 공식 이민의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뉴욕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죠. 박물관은 선조와 후손이 대화를 나누고 다른 문화를 만나는 공간입니다. 뉴욕의 한인이민사박물관을 찾는 재미동포 후손들이 자긍심과 정체성을 깨닫고, 각국 관람객들이 미국 발전에 기여한 한인들의 헌신을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지난 6월 14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뉴욕한인회관 6층에서는 한인이민사박물관 개관식과 관장 취임식이 열렸다. 초대 관장은 2015년 5월부터 4년간 34·35대 뉴욕한인회장을 지내며 박물관 건립을 추진해온 김민선(59) 씨다.
박물관 운영 협력 협의차 내한한 김 관장을 2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옥에서 만났다.
개관 소감을 묻자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고 내년이 한인 미국 시민권자 탄생 130주년이어서 매우 뜻깊다"면서 "동포들의 오랜 염원을 이룬 만큼 소통과 교육의 요람으로 가꿔나가겠다"고 각오를 내비쳤다.
102명의 한인이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미국 하와이에 도착한 것이 본격적인 미국 이민의 시작이다.
2005년 미 연방의회가 제정한 '미주 한인의 날'도 이날을 기념한 것이다. 그러나 한인이민사박물관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일본을 거쳐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이 한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얻은 1890년을 한인 이민사의 기점으로 본다.
"초기 이민자들은 사탕수수농장과 새우잡이배에서 노예처럼 일하면서도 한푼 두푼 모아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습니다. 1950년대에는 전쟁고아들이 건너갔고 1965년 이민법 개정과 함께 대량 이주가 이뤄집니다. 2000년대 초 미 정부가 취업비자를 내주면서 유학생 정착이 늘어나 이민 사회가 질적으로도 성장하죠. 이 모든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6층에 들어선 한인이민사박물관의 넓이는 560㎡(약 170평)이며 3층에 수장고가 따로 있다. 1880∼1940년대, 1940∼1960년대, 1970∼1990년대, 2000년대 이후로 나뉘어 미국 사절단 보빙사의 방문 모습과 갤릭호 사진을 비롯해 3·1운동 때 사용한 태극기 복판, 당시 기록을 담은 신문, 최초의 여권, 김소월 영문 시집 원본 등을 전시하고 있다.
입구에는 '평화의 소녀상'을 세워놓았고, 조선 시대 전통 사랑방을 재현한 민속관에서는 도자기와 고가구 등 고미술품을 선보이고 있다. 맨해튼 한인타운과 코리아센터 예상 조감도 등을 보여주는 미래관도 꾸몄다. 개관 기념으로 정미호 한지작품 기획전을 열었으며 링컨 대통령 부인 메리 토드 여사의 대형 초상화를 전시할 계획도 검토 중이다.
뉴욕에는 중국·인도·일본 등의 이민사박물관이 있는데도 한국 이민사박물관은 없었다. 이주의 역사는 하와이가 앞서고 동포 수는 LA가 많지만 뉴욕이 앞장서기로 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낡은 한인회관을 리모델링하는 김에 전시관을 꾸미면 일거양득이라고 설득해 200만 달러(약 23억9천만원)를 모금했다. 모금보다 더 어려운 것이 소장품 수집이었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유품이 사라질 수도 있고 유물 가격도 더 올라가니까요. 미국에는 저작권 규정도 까다로워 사진도 함부로 전시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도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다가 무산된 일이 있었기에 동포들이 선뜻 소장품을 내놓지 않으려 하더군요. 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큰절하는 광경을 스케치로 보도한 프랭크 레즐리스 일러스트레이트지(1883년 9월 29일 자) 원본을 전언식 선생님이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졸랐죠.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제 열정에 감복했는지 수락하셨습니다. 이제는 기증하겠다는 분은 많은데 전시 공간이 비좁아 고민이에요."
이제 또 다른 큰 고민은 운영비 마련이다. 관람료를 받지 않고 이사들의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는데, 현재 30명인 이사진을 50명으로 늘리고 지방정부 보조금도 유치할 예정이다.
김 관장은 청주여고와 이화여대 기악과(바이올린 전공)를 졸업하고 갓 결혼한 남편과 함께 198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프라하 컨서버토리와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수학하고 뉴욕 파슨스 스쿨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현재 뉴욕 롱아일랜드 컨서버토리를 운영하면서 나소카운티 인권국장으로 8년째 봉사하고 있다.
"학교를 운영하고 가족을 돌보느라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그러나 학부모회에 참여해보니 거의 유일한 아시아인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군요. 어쩌다 한 번 참석하는 나도 인종차별을 느끼는데 학교에 다니는 아들딸은 어떨까 싶어 사회활동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제도를 바꾸는 것은 정치인이므로 친한파 정치인을 만들기 위해 지역 정치인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공공기관에 아시아인이 참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인권국장 제의를 받아들였죠. 이제는 나소카운티에도 아시아인 담당 부서가 생겼고 한인 2세들도 일하고 있습니다."
그가 활발히 활동하자 뉴욕한인회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왔다. 6년 전 한인회 이사장으로 한인단체에 첫발을 디뎠다가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뉴욕한인회 회장에도 출마했다. 당시 회장과 소송전을 벌인 끝에 승소해 1년 만에 회장 자격을 인정받았고, 세금 체납과 부당 임대계약으로 한인회관이 남의 손으로 넘어갈 위기에서 건물을 지켜냈다.
"지금까지 뉴욕한인회장을 연임한 인물은 두 명뿐이죠. 한 분은 1984년 6층짜리 한인회관을 사들인 17·18대 강익조 회장이고, 또 한 명은 건물을 지켜낸 저입니다."
김 관장은 뉴욕한인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2017년 10월 뉴욕한인회관에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해 이듬해 6월 워싱턴 연방의회에 전시하는가 하면 10월 맨해튼의 '코리안 퍼레이드'에서도 선보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올해 3월 1일에는 맨해튼 유엔본부 앞 다그 함마르셸드 광장에서 100년 전 3·1 만세운동을 재현했다. 나소카운티가 류관순의 날을 제정하는 데도 앞장섰으며, 동포 고교생 2명을 류관순상 수상자로 뽑아 모국 역사체험 기회를 제공했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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