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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November 14, 2017

'박근혜 5촌 살인 사건' 핵심 증인 단독 인터뷰

마성태씨는 '박근혜 5촌 살인 사건'의 핵심 증인이다. 사건을 재수사 중인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의 조사를 받기 직전 <시사IN> 취재진과 만나 진실을 털어놓았다.
마성태씨(53·사진)는 2009년 박지만 EG 회장의 비서실장 정용희씨에게 “박용철을 혼내주라”는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이를 ‘살인 청부’로 받아들이고 거절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5촌 살인 사건의 전사를 겪은 셈이다.
현재 5촌 살인 사건을 재수사 중인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 10월31일 마씨를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그 직전 <시사IN> 취재진과 만났다. 경찰에 할 말을 언론에 전해, 수사가 제대로 될 수 있게 하겠다며 처음으로 이름과 얼굴을 걸고 공개 인터뷰했다.
그는 5촌 살인 사건의 뿌리로 지목되는 육영재단 폭력 사태와 관련된 내부자였다. 2009년 1월 육영재단 폭력 사태 당시 친박지만 인사로 채워진 재단 쪽 용역업체 책임자였다. 당시 마씨는 박근령 쪽 인사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육영재단 교육부장을 맡았지만 3개월 만에 ‘털고’ 나왔다. 마씨는 박용철씨 피살에는 육영재단 분쟁이 자리 잡고 있다고 여겼다.
ⓒ시사IN 신선영
육영재단 폭력 사태에는 어떻게 개입했나?
처음에 ‘정의 대 불의의 싸움’이라 여겼다. 깡패가 장악한 육영재단을 구해내야 한다고. 우리는 재단이 정식 고용해서 배치 신고된 경호업체였다. 그래서 당시 <시사IN>에서 ‘형제의 난’이라고 보도(<시사IN> 제70호 ‘슬기를 키우는 어린이 나라, 용역의 전쟁터가 되다’ 기사 참조)한 걸 보고 기자에게 전화까지 해서 항의했다. “남매간의 싸움 아닙니다”라고(웃음). 그런데 재단에 들어와서 보니 내가 생각하던 판이 아니었다. 당시 1억원 정도를 덜 받아서, 정산하고 3개월 만에 손 털고 나왔다.
육영재단은 2007년에도 폭력 사태가 있었다.
그때 정용희가 진두지휘했다. 한센인을 동원해 박근령을 끌어냈다. 동원된 한센인을 지휘한 임두성은 200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박근령이 이사장 직위 취소를 당했는데도 계속 근무한다는 점 등을 문제 삼았다. 이후에도 몇 번 싸움이 있었다. 그러다 나를 불렀고 박근령 쪽을 내쫓았다. 마음에 들었는지 정용희가 이왕 해준 거 또 한 가지 부탁 좀 하자더라.
무슨 부탁이었나?
2009년 봄 정도로 기억하는데,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미팅을 끝내고 육영재단으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정용희가 운전을 했고, 전○○(현 국회의원 비서관)이 같이 탔다. 같이 일하는 후배까지 모두 넷이었다. 정용희가 내게 “회장님 같은 실력자를 못 봤습니다. 그래서 좀 부탁드릴 게 있는데 들어주시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뭐냐고 물으니 머뭇대다 아주 고상하게 웃으면서 “박용철 좀 혼내주시면 안 돼요?”라고 했다. 그래서 “다리를 부러뜨려줘요?”라고 되물으니 좀 있다가 “그 정도라면 이야기 안 하죠”라고 했다. 그러면 사람을 죽여달라는 이야기 아닌가. 나는 사람 죽이는 일은 안 한다고 딱 잘랐다.
명시적으로 죽여달란 말을 한 건 아닌데.
당시 정용희와 육영재단 고문 이○○이 만나면 “박용철이 그 ××는 신동욱 그 ××를 못 죽여서 화근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냐”라고 말하곤 했다. 신동욱이 주장하는 2007년 칭다오 납치 사건 같은 일이 있었더라. 그러면서 이○○이 “너 같음 그냥 깨끗하게 보냈을 거 아냐”라고 했으니, 내가 혼내주라는 말을 뭐라고 들었겠나.
2년 후 ‘5촌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정용희가 나한테 한 말을 실현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당시 육영재단 고문 이○○ 등에게 전화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그 ×× 까불다 죽은 거지”라고 하더라. 그래서 정용희한테 전화했다. “시원하시겠소”라고 하니 버벅대더라. 그래서 “그다음은 나요?”라고 물었다. 자기들의 과거를 아는 사람을 정리한다면 나 또한 피해갈 수 없으니까. 그때부터 차 안에 도끼를 갖고 다녔다. 그래서 2012년 취재차 나를 찾아온 주진우 기자에게도 “그러다 죽는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후 이슬람에 귀의해 문산에서 이슬람 성원(사원)을 운영하고 있다.
김은지ㆍ주진우 기자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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