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골프 선구자이자 '영원한 현역' 최경주
2002년 한국인 첫 PGA 투어 우승, 그 후 20년"그땐 오로지 나 혼자 외로웠지만..
지금은 '대부' 소리 들으며 자랑스러운 후배들과"
한국인 최다 PGA 8승, 韓 첫 시니어 투어 우승
후배들과 '한국인 21승 합작' 이끌어
"완도에서 미국까지, 말도 안되는 일..
내 재능을 꿈나무들에게 남김없이 주고파"
[헤럴드경제=조범자 기자]“아따, 미국 잔디 죽이네! 한국서 온 촌놈들이 잔디 다 망쳐놨다고 쫓아내면 안되니께 조심해서 칩시다.” 1997년 난생 처음 밟은 미국 땅, 미국 골프장. 눈이 시리도록 파란 잔디가 깔린 드라이빙레인지(연습장)를 앞에 두고 입이 떡 벌어졌다. 행여 모진 소리 들을까 아이언을 들고도 “잔디 대가리만 쓸어치던 한국 촌놈”은 꼭 5년 뒤 골프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한국인 첫 챔피언 등극.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고개 저었지만 그는 자신의 별명대로 우직하게 밀고 나갔고, 결국 한국을 넘어 아시아 골프를 대표하는 전설이 됐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52). 그가 한국인 최초로 PGA 투어 첫 우승을 차지한지 꼭 20년이 됐다. 그 사이 최경주는 PGA 투어 아시아 선수 최다승(8승)을 쓸어담았고 작년엔 PGA 챔피언스 투어(시니어 투어)에서도 한국인 첫 정상에 올랐다. 자신이 맨손으로 개척한 길을 뒤따르는 후배들과는 ‘한국인 21승’의 금자탑을 함께 쌓아 올렸다. 최근 헤럴드경제와 만난 최경주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났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미국으로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이 못버티고 금방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벌써 23년이나 버티고 있다”며 껄껄 웃었다.
▶“완도에서 미국까지, 사실 말도 안되는 일이죠”=최경주는 투어 3년차인 2002년 5월 컴팩 클래식서 고대하던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당시 그의 캐디백과 골프화 뒤꿈치엔 태극기가 선명했다. “대한민국에서 온 골프선수”라는 걸 온몸으로 외치고 싶었던 그가 우승하기 몇달전 태극기를 꿰매 붙일 생각을 낸 것이다. 전쟁터 한복판에 홀로 나선 독립투사의 심정이었다. 20년 전과 지금은 하늘과 땅 차이다. “미국 와서 처음 5년은 한국 선수가 저밖에 없었으니 정말 외로웠죠. 그런데 지금은 교포까지 합치면 14~15명은 되거든요. 경기가 지연될 때 클럽하우스 큰 테이블에 한국 선수 열 명이 같이 앉죠. 그러면 미국 선수들이 지나가면서 저한테 말해요. ‘오, 갓파더~’ 말도 못하게 뿌듯하죠. 후배들도 너무 잘하고 있잖아요.”
첫 우승부터 2011년 ‘제5의 메이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까지 8승의 모든 순간이 또렷하게 떠오른다는 그는 PGA 투어 진출을 가능케 한 두번째 퀄리파잉(Q)스쿨과, “골프 인생의 피크”로 기억하는 2007년을 가장 짜릿했던 순간으로 꼽았다.
2007년 6월 잭 니클라우스가 주최한 메모리얼 토너먼트서 통산 5승째를 획득한 최경주는 내친김에 다음달 타이거 우즈가 호스트로 나선 AT&T 내셔널에서 6승째를 따냈다. 이를 발판으로 이듬해 한국인 역대 최고인 세계랭킹 5위로 뛰어올랐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는 최경주의 성공스토리를 대서특필했다. 한국 완도 출신의 소년이 니클라우스의 책으로 골프를 독학해 니클라우스와 우즈의 트로피를 한꺼번에 품었다는 스토리다. 어떤 영화보다도 드라마틱했다. 호주 출신의 골퍼이자 해설가 이안 베이커 핀치가 “K.J.는 한번 기회를 물면 절대로 놓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간다”며 붙여준 별명 ‘탱크’가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됐다.
“완도에서 미국까지. 생각해보면 참 말도 안되는 일이죠. 20년을 가만히 되돌아 보면 정말 골프가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18홀 치는 내내 다 좋거나 다 나쁠 수 없잖아요. 잘못 쳐도 리커버리가 되고, 또 엉뚱한 데서 스코어가 좋게 나올 수도 있고.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OB(아웃 오브 바운즈) 한번에 인생 끝나지 않아요. 힘들고 굴곡진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지만 마냥 슬퍼할 일도 아니에요. 그걸 잘 감내하고 극복하면 생각지 못한 좋은 결과가 오거든요. 골프도, 인생도 그런 매력이 있어요.”
▶“골프로 개인사업 절대 안해…꿈나무 육성은 나의 소명”=지난해 PGA 챔피언스 투어에서 처음 들어올린 우승컵은 1부 투어에서만큼이나 값졌다. 오는 9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페블비치 골프 링크스에서 열리는 퓨어 인슈어런스 챔피언십에서 타이틀 방어에 나선다. 최경주는 “사실 PGA 투어 우승보다 더 기뻤다. 만 50세 이상이 나오는 시니어 투어에선 데뷔 첫 해나 2년차에 꼭 우승을 해야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걸 작년에 이루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며 웃었다.
“챔피언스 투어 분위기가 굉장히 편안하고 친근해요. 살벌한 경쟁이 있는 1부 투어와는 확연히 다르죠. PGA 투어 같은 화려한 플레이는 없지만, 큰 실수 없이 노련하게 경기를 운영해서 진행도 빨라요. 다들 속에 구렁이 열마리씩 안고 다녀요.(웃음) 챔피언스 투어는 1라운드 좀 잘 쳐놓으면 마지막날 상위권에 남을 확률이 높아요. 첫날 스코어 많이 줄이고 체력안배 잘해서 또 기회를 보려고 합니다. 우승 더 해야죠. 언제든 찬스가 온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우승 열정이 여전히 뜨거운 그가 우승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꿈나무 육성이다. 지난 2007년 투어 상금과 후원인을 모아 100억원 규모의 기금을 마련해 최경주재단을 설립했다. 매년 장학금을 지원하고 6주간 동계훈련을 함께 하며 미래 골프스타들을 직접 키워내고 있다. 골프계선 “PGA 8승 선수가 해마다 어린 선수들과 훈련하며 노하우를 전수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고 혀를 내두른다. 이제 골프 간판스타가 된 박민지와 이재경, 김민규, 이가영 등이 ‘최경주 장학생’ 출신이다.
2020년 1월 중국 광저우 훈련 중 재단 선수들을 모두 데리고 미국으로 날아간 일화는 유명하다. 아내 김현정 씨가 코로나19 팬데믹 직전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선수단을 철수시킨 것이다. 김 씨는 2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을 모두 댈러스 집으로 데려가 잠자리를 제공하고 직접 식사와 간식을 챙기며 훈련을 뒷바라지 했다.
“와이프가 탁월한 선택을 한 거죠. 몇년째 중국서 하던 훈련을 그때부터 댈러스로 옮겨와 하는데 아이들이 너무 행복해 해요. 와이프가 영어까지 가르치니 선수 부모님들이 더 좋아하시죠. 저도 이참에 옛날부터 꿈꿨던 훈련장을 주변에 하나씩 만들고 있고요. 사실 제가 5년 전에 결심한 게 있어요. 골프로 용품이나 기술을 파는 개인사업은 하지 않겠다는 거에요. 제가 가진 좋은 재능을 재단 꿈나무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그게 제 비전이고 소명이에요. 지금은 그 길로 가기 위한 시작 단계입니다.”
▶“대한민국 시니어들에게 하고픈 말은…”=최경주는 골프 인생을 18홀에 비유한다면 “백나인(후반) 절반쯤 온 것같다”고 했다.
“저는 이제 많이 왔죠. 14번홀을 마치고 나머지 홀들을 어떻게 잘 마무리할지 고민하는 시점인 것같아요. 자서전(‘코리안 탱크, 최경주’)을 쓴지 10년 됐는데, 이번엔 골프의 기본을 총망라하는 교과서 같은 책을 써보고 싶어요. 그립 등 골프 기술부터 경기 전 준비과정, 훈련 방법, 선수로서 가져야할 자세 등 실질적으로 필요한 내용을 담고 싶어요. 또 선수 때 너무 훈련에 몰입하다 보니 아이들과의 시간도 많이 놓쳤는데, 이제 가족과 주변도 잘 살피며 살고 싶네요.”
최경주는 영원한 현역이다. PGA 챔피언스 투어 영구시드 보유자다. 그 자신도 “체력이 있는한 언제나 현역으로 뛸 것”이라고 했다. ‘영원한 현역’은 어쩌면 모든 이들의 꿈일지 모른다. 특히 세월에 비례해 점점 ‘나’를 잃어가는 시니어들에겐 더욱 그렇다.
“긍정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미래를 가보지 않은 우리들이 내일의 슬픔을 앞당겨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에요. 오늘 기쁜 마음으로 힘 닿는대로 최선을 다하면 내일이 보장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좋은 결과가 올 것으로 믿습니다. 또 어느 분야든 자신의 경험을 잘 쌓아놓는 게 중요해요.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놨던 걸 필요한 때 하나씩 꺼내면, 그게 앞으로 밀고 나가는 힘이 되거든요.” 미국 정복 20년, 아직도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한국산 탱크가 대한민국 시니어들에게 건네는 말이다.
anju1015@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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