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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May 17, 2019

총알 박힌 채 버려진, 5월 광주 '4세 아이'

5.18민주화운동 후 39년.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남은 자는 남은 자대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편집자말]
  
 1980년 6월 7일 조선대병원에서 작성된 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검시조서(광주지검)의 주인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본적 : 불상, 주소 : 불상, 성명 : 불상, 연령 : 4세 가량. '91번'이라고 적힌 이 검시조서는 '알 수 없는(불상)' 내용으로 가득하다.
▲  1980년 6월 7일 조선대병원에서 작성된 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검시조서(광주지검)의 주인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본적 : 불상, 주소 : 불상, 성명 : 불상, 연령 : 4세 가량. "91번"이라고 적힌 이 검시조서는 "알 수 없는(불상)" 내용으로 가득하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본적 : 불상, 주소 : 불상, 성명 : 불상, 연령 : 4세 가량. '91번'이라고 적힌 위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검시조서는 '알 수 없는(불상)' 내용으로 가득하다.

1980년 6월 7일 조선대병원에서 작성된 이 검시조서(광주지검)의 주인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사인이 "좌후경부(목) 맹관총상(체내에 박힌 총상)"이라는 것, 그마저도 "심한 부패로 추정 곤란"이라는 것, 그리고 복사본 만으로도 처참한 흑백사진이 이 희생자를 말해주는 전부다.

'4세 가량'의 이 아이는 어쩌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제 막 뛰노는 재미를 알아갔을 아이가 죽어야 했을까. 이 어린 생명의 사연은 이제 알기 어려워졌지만, <오마이뉴스>는 5.18 당시 숨진 미성년 사망자를 전수조사해 그들이 겪었을 고통과 잔혹했던 학살자들의 면모를 되새기고자 한다.
 
 5.18 민주화 운동 미성년 사망자 어느 정도?
▲  5.18 민주화 운동 미성년 사망자 어느 정도?
ⓒ 고정미
 
<오마이뉴스>는 ▲ <5.18 관련 사망자 검시내용>(광주지검) ▲ <광주민중항쟁비망록> 5.18광주민중항쟁 유족회 편 ▲ <피해자신고서> 사망자 편(평민당) ▲ 2001년 유전자 감식 결과를 토대로 사망자 203명을 조사했다. (위 자료에 기록되지 않은 사망자, 무명열사, 행방불명자 등 고려하면 사망자는 더 많다)

사망자 203명 중 1960년 5월 18일 이후 출생자는 약 30%인 60명이었다. 사망자 10명 중 3명이 미성년 사망자였던 것이다.

이 중 학생이었던 이들은 30명이었다(초등학생 1명, 중학생 6명, 고등학생 18명, 대학생 5명), 나머지 중 29명은 학교 밖 청소년, 1명은 성명불상의 유아(4세 가량)였다. 종업원, 자개공, 나무판화기능공, 회사원, 공장노동자, 페인트공, 행상, 전기공, 미싱사, 새시공, 구두닦이, 시외버스 조수, 요리사, 검정고시생, 재수생 등 직군도 다양했다. 그 동안 광주광역시교육청 차원에서 일부 학생 사망자 명단을 관리해왔지만 전체 미성년 사망자를 분류해 분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5.18 민주화 운동 미성년 사망한 장소?
▲  5.18 민주화 운동 미성년 사망한 장소?
ⓒ 고정미
 
미성년 사망자들은 5.18 현장 곳곳에 있었다. 5월 21일 전남도청 인근 집단발포, 23일 주남마을 버스 집중사격, 24일 송암동 학살, 27일 전남도청 및 시외곽 최후항전 현장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이외에도 시위에 나섰다가, 헌혈을 하고 오다가, 일을 마치고 퇴근하다가, 부모·친구를 만나러 가다가, 책을 사러 가다가 곳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상당수가 총상 사망자였다. 한 고등학생 희생자의 사망진단서엔 총상만 9군데가 기재돼 있다. 타박상, 자상(찔린 상처), 차량사, 차량추락사 등으로 숨을 거둔 이도 많았다. 여성의 경우 총상과 함께 유방 자상이 확인되기도 했다.

[21일 전남도청 집단발포] "전두환 온 몸 쫙쫙 찢기는 걸 봐야..."

21일은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첫 집단발포가 있었던 날이다. 오후 1시 즈음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이후 시민들을 향해 총알이 쏟아졌다. 이전에도 곳곳에서 총상 환자가 발생했으나 집단적으로 사격이 이뤄진 건 이날이 처음이다. 최근 당시 주한미군 군사정보관으로 있었던 김용장씨가 한국을 찾아 그날 전두환씨가 광주에 내려와 사격명령을 내린 정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이날 목숨을 잃은 미성년자는 10명이다. 김완봉(남, 1966년생), 박창권(남, 1966년생), 이성자(여, 1965년생), 김함옥(남, 1964년생), 김기운(남, 1963년생), 박인배(남, 1962년생), 전영진(남, 1962년생), 민청진(남, 1961년생), 최승희(남, 1960년생), 이경호(남, 1960년생)가 그들이다. 모두 두부, 흉부, 경부(목), 상박 등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총상과 함께 파열, 혈흉(가슴에 피가 고인 상태), 좌상(타박에 의한 손상), 다발성타박상이 확인된 이들도 있었다. 총질과 매질이 가리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다.
 
 518 당시의 상황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  518 당시의 상황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 기획시대㈜
 
'좌경부 총상'으로 숨진 박인배는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를 그만두고 1979년 여름부터 지인의 농공장에서 자개농 무늬 깎는 일을 하고 있었다. 진흥중학교에 다닐 적에 학급 반장도 맡을 만큼 공부를 썩 잘했던 아들이라 엄마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공장에서 숙식하며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오던 아들은 죽기 직전에도 집에 와 동생들에게 "이십며칠이 월급날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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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1일 부처님오신날이라 절에 갈 준비를 하는데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18일부터 시내가 소란이라고 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동생이 동사무소 직원이 준 쪽지를 받아왔다. 아들이 총에 맞았다는 내용이 담긴 쪽지였다. 그때부터 엄마는 광주 곳곳을 뒤지며 아들을 찾아다녔다.

"(인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3일이 지나서야 도청에서 시신을 찾았제. 설마설마 했는디 시체를 눈으로 직접 본께 암 것도 안 들리고 안 들리드마. 넋을 잃고 울부짖다가 흘러내리는 피를 씻어줌서 본께 오른쪽 귀 밑에서 왼쪽 귀 밑으로 구멍이 크게 뚫렸어야.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얼굴이 핼쑥해. 글고 총 맞고 손으로 얼마나 얼굴을 문질렀는지 얼굴이고 어디고 온몸에 피가, 피가..."
 

엄마는 전두환, 노태우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떤다.

"유족회 활동을 하다본께 행방불명된 사람도 많드만. 나는 '내 새끼 뼈다귀라도 찾아서 다행이다' 싶기도 한디, 광주고속 앞이 집이라 명절 때마다 오가는 사람들 보믄 우리 인배가 문 열고 들어올 것 같아서 일이 손에 안 잡혀. 우리 인배를 죽여 놓고도 뻔뻔하게 살아 있는 전두환, 노태우가 광주시민의 손에 도청 앞에서 온 몸이 쫙쫙 찢겨나가는 꼴을 봐야 내 속이 시원하겄어."
 
5.18구묘역 입구에 묻힌 '전두환 표지석' 광주광역시 망월동 구 5.18묘역 입구 바닥에는 참배객들이 밟고 갈 수 있도록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마을'이 새겨진 표지석이 묻혀 있다. 1982년 전남 담양군 방문을 기념해 세워졌던 비석으로, 광주전남 민주동지회가 비석의 일부를 가져와 묻었다.
▲ 5.18구묘역 입구에 묻힌 "전두환 표지석" 광주광역시 망월동 구 5.18묘역 입구 바닥에는 참배객들이 밟고 갈 수 있도록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마을"이 새겨진 표지석이 묻혀 있다. 1982년 전남 담양군 방문을 기념해 세워졌던 비석으로, 광주전남 민주동지회가 비석의 일부를 가져와 묻었다.
ⓒ 권우성
 
[23일 주남마을 버스 집중사격] 끔찍한 현장, 여성 가슴엔 칼 자국이

전남도청 집단발포 이틀 후인 23일, 광주 외곽의 주남마을에선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광주 시내에 시신이 넘쳐나 관이 부족하자, 시민 일부가 미니버스를 타고 화순에 관을 구하러 나섰다. 광주를 오가는 버스는 이미 끊긴 터라, 중간에 화순 큰집에 제사를 지내러 간다는 일산방직 여성 노동자들도 태웠다.

11공수여단은 오후 1시께 지원동 주남마을을 지나던 이 버스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18명 중 15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3명 중 2명은 주남마을의 상황실로 옮겨졌다가 "귀찮게 왜 데려왔냐"는 작전보좌관의 말에 야산으로 끌려가 사살·암매장됐다.
 
 1980년 5월 23일 사망한 고 박현숙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1980년 5월 23일 사망한 고 박현숙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권우성
그 동안 주남마을 사건은 이 사건 하나로 알려졌으나, 공수부대원과 생존자 1명(홍금숙씨)의 증언이 달라 비슷한 사건이 더 있었을 거란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대표적으로 시민 11명이 탄, 흰색 페인트로 '103'이 적힌 승합차에 총격이 가해진 사건이 그것이다. 때문에 계엄군이 여러 사건을 묶어 하나로 축소했다는 의혹도 더해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두 사건으로 숨진 28명 중 11명만 시신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생존자 3명 중 2명을 사살하고 암매장했던 사례처럼 17명도 어딘가 암매장됐거나 시신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5.18민주화운동 미성년 사망자인 고 김춘례(여, 1962년생)의 유품(수의 상하의).
▲  5.18민주화운동 미성년 사망자인 고 김춘례(여, 1962년생)의 유품(수의 상하의).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주남마을에서 숨진 미성년 사망자는 5명이다. 박현숙(여, 1964년생), 김춘례(여, 1962년생), 손옥례(여, 1961년생), 백대환(남, 1961년생), 황호걸(남, 1960년생)이 그들이다. 모두 하복부, 복부, 흉부, 전신다발성 총상으로 숨졌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몸에서 7~9곳의 총상이 확인됐다.

특히 여성인 손옥례의 검시조서엔 '좌유방부 자창(날카로운 것에 찔린 상처)'이, 박현숙의 사망잔단서엔 '우족장부(발바닥) 4cm와 3cm 열상(피부가 찢어져 생긴 상처)이 적혀 있다. 박현숙의 보안사령부 '검시참여결과보고'엔 '좌취부(왼쪽 겨드랑이와 가슴 사이) 자상도 있음'이란 내용도 적혀 있다.

빨리 취직해 집안형편에 보탬을 주려고 상업고등학교(신의여상, 현 송원여고)에 진학한 박현숙은 고향인 담양을 떠나 광주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5월 18일 이후, 언니는 부모님으로부터 동생 소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취방을 찾았는데 정성들여 다려놓은 하얀 봄가을 교복만 선풍기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 뒤로 동생을 만난 건 5월 30일 망월묘역이었다.

"주남마을 주변 산에 가매장돼 있던 것을 시청 직원이 파내서 망월동으로 옮겼답디다.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해갖고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죠. 배에 총을 맞았는가 움푹 패어 있고, 얼굴엔 벌레가 들끓고 있드만요. 유난히도 숱 많고 검은 눈썹을 본께 현숙이인 것을 알아봤죠."

나중에 들은 이야기론 동생은 18일부터 자주 밖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22일에도 전남도청에서 일을 도왔고 23일 그 참혹한 현장을 지났던 버스를 탔다.

"버스에 총알이 날아든께 남자들은 총을 머리 욱으(위)로 들고, 여자들도 머리 욱으로 손을 흔듦서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안 하요. 근디도 총을 계속 쏴브렀대요. 딱 한 명 산 사람 홍금숙씨 말에 따르믄, 현숙이도 살려달라고 애원하믄서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죽어갔다고 합디다."


[24일 송암동 학살] "그게 군인들이 할 짓이요?"
 
 1980년 5월 24 사망한 고 방광범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1980년 5월 24 사망한 고 방광범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권우성
 
다음 날 송암동 인근에서도 비극이 발생했다. 이날 11공수여단은 주남마을에서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다 오후 2시께 효덕초등학교 부근에서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인근 마을에서 놀던 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1969년생)와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중학교 1학년 방광범(1967년생)이 총을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날 전재수는 여동생과 싸우다 아빠에게 혼이 나 밖으로 나가 놀고 있었다. 나가는 길에 도로를 지나는 군트럭에 손을 흔들기도 했단다. 오후 두시께 동네가 떠나갈 듯한 총성이 울리자 아빠는 가슴이 덜컥했다. 곧이어 아들의 친구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날벼락 같은 말을 내뱉었다.

"재수 아버지, 군인들이 총을 쏴갖고 재수가 죽었어요."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니, 계엄군이 총을 난사하자 아이들이 총소리에 놀라 산 뒤로 무작정 달아났다고 한다. 그때 아들의 고무신이 벗겨졌고, 뒤돌아 고무신을 주워들려는 순간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진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엄마는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위와 간 질환으로 1984년에 아들 곁으로 떠나고 말았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 댕기던 그 어린 애한테까지, 그것도 벗겨진 신발을 주울라고 돌아선 그 어린 것한테까지 무지비하 총을 갈겨대야 했습니까? 도저히 용서가 안 되제라. 총이란 것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인께 꼭 쏠 곳에다만 쏴야제 죄 없는 사람한테까지 쏘믄 쓰겄습니까. 그놈들 행동은 순 장난이었제. 어찌 그게 군인들이 할 짓이요? 동네 앞 서 있던 커다란 소나무가 그때 군인들이 갈긴 총탄에 쓰러져브렀어요. 온 마을에 탄피가 깔릴 정도였당께요."
 

11공수여단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후 효천역 부근에 도착했을 때 11공수여단과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 사이에 오인 사격이 오갔다. 뒤늦게 오인 사격인 것을 안 11공수여단은 인근 마을로 가 집에 있던 민간인 여럿을 끌어내 보복 학살을 저질렀다. 오인 사격과 보복 학살 과정에서 미성년자 살레시오고등학교 2학년 김평용(1963년생)과 회사원 김승후(1961년생)가 숨졌다.

*<한참 집 쳐다보던 고3 아들... "죽을 생각하고 그랬는갑서" http://omn.kr/1jbxv>로 이어집니다

 
 518 민주화운동 미성년 사망자 전수조사
▲  518 민주화운동 미성년 사망자 전수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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