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대 10일 남기고 1980년 5월 17일 전남대 투입
-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 목격 후 국회 양심선언
- 양심선언 후 가족과 떨어져 신변 위협 느껴
- 주남마을 학살 생존자와의 만나며 눈물
- 계엄군이 증언할 수 있는 안전장치 마련해야
-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 목격 후 국회 양심선언
- 양심선언 후 가족과 떨어져 신변 위협 느껴
- 주남마을 학살 생존자와의 만나며 눈물
- 계엄군이 증언할 수 있는 안전장치 마련해야
■ 방송 : MBC 라디오 표준FM 95.9MHz <심인보의 시선집중>(07:20~08:30)
■ 진행 : 심인보 뉴스타파 기자
■ 대담 : 최영신(주남마을 주둔 7공수여단 부대원)
☎ 진행자 > 이번 주 토요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을 맞게 됩니다. 이 오랜 세월을 흘려보내고도 우리 사회는 아직 1980년 광주에 대한 진상규명 이 숙제를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틀 전에는 전두환 씨, 그리고 그를 둘러싼 군부세력에 대한 당시 주한미군 정보요원과 보안사 직원의 의미 있는 증언도 나왔었는데요. 오늘은 1980년 5월 광주 그 현장에 있었던 또 한 분의 증언을 들어볼까 합니다. 당시 주남마을 학살 사건 공수부대원으로 투입됐다가 이후 계엄군 학살에 대해서 양심선언한 뒤에 5.18 진상규명을 위해서 계속 목소리를 내고 계신 분입니다. 얼마 전에는 학살 사건 피해자를 직접 만나서 사과를 하셨다고 하네요. 5.18 당시 계엄군 7공수여단 소속이었던 최영신 씨 연결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최영신 > 네, 안녕하세요.
☎ 진행자 > 선생님 사흘 후면 또 다시 5월 18일일 되는데요. 매년 이맘때 되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 최영신 > 저는 5월 달이 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그런 심정입니다. 언론 인터뷰하는 것도 참 곤혹스럽고요. 5월 달만 되면 사실 그 우리 같이 투입됐던 계엄군들이 다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되고요.
☎ 진행자 > 어려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응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요. 39년 전이죠.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정확히 어떻게 또 언제 진압군으로 투입되셨습니까?
☎ 최영신 > 제가 75년 7월에 입대를 했는데 특전사에 논산훈련소에 지원했어요. 모병6기 예비역 중사 최영신입니다. 지원할 당시는 정말 멋있는 군대생활을 한 번 해보자 한마디로 이제 베레모가 좋아서 지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복무기간은 원래 계약이 4년 6개월인데 제대할 당시가 아주 혼란의 시기라 박정희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그랬었죠. 그래서 제가 4개월을 더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대로 제가 전역했으면 5.18하고 전혀 관계가 없을 텐데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제대 10일 남겨 놓고 17일 밤에 전남대학에 투입했습니다.
☎ 진행자 > 실례지만 그 1980년 5월 17일 전남대에 투입되셨을 때 그때 연세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 최영신 > 그때가 26살 때인가 그렇죠.
☎ 진행자 > 26살이요. 물론 성인이긴 하지만 저희가 지금 생각해보면 26살이라면 세상물정에 대해서 잘 모를 때잖아요.
☎ 최영신 > 네. 저도 거기 가는 줄 몰랐었죠. 이제 익산 지금 금마, 지금 거기가 저희 부대인데 갑자기 출동 명령이 떨어져 가지고 제대가 10일 남겨놨으니까 저희들은 충정훈련 이런 걸 면제 받고 오히려 사역 같은 걸 했어요.
☎ 진행자 > 훈련보다는, 그런데 갑자기 하자고 한 거예요?
☎ 최영신 > 출동하면 우리는 특전사는 다 갑니다. 열외 1명도 없이.
☎ 진행자 > 그렇게 해서 결국 운명 1980년 5월 23일 이 날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벌어진 일이 주남마을 학살 사건입니다. 이 사건 모르는 분들 위해서 잠깐 설명드리면 광주 주남마을 지나던 미니버스를 향해서 공수부대가 사격을 했죠. 사격을 해서 버스에 타고 있던 게 18명인데 그 중 15명이 즉사했고요. 생존자가 3명이 있었습니다만 남자 2명, 여자 1명 중에 남자 2명은 또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해서 최종적으로 17명이 숨진 아주 끔찍한 사건인데요. 그 당시 주남마을 학살 사건 당시에 바로 공수부대 소속으로 현장에 계셨던 거죠?
☎ 최영신 > 네, 그렇습니다.
☎ 진행자 > 직접 발포를 하진 않으셨고 목격만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최영신 > 예, 저희가 5월 21일 조선대학에 특전사만 전부 모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도청 앞에 투입했던 대대들도 다 집결해서 5월 21일 날 저녁 7시쯤 거기서 이제 우리 그 부대에서 쓰는 용어로 도피 및 탈출을 해서 조대 뒷산을 통해서 거의 산악구보 형식으로 도망갔죠. 그래서 최종적으로 도착해서 주둔한 데가 주남마을 7부 능선 쪽에 CP(Command post, 지휘소)가 있었습니다.
☎ 진행자 > 그럼 왜 그렇게 미니버스를 향해서 총을 쐈습니까?
☎ 최영신 > 미니버스에 타고 있었는지 안 타고 있었는지 그 당시는 전혀 제가 모르죠. 왜냐하면 우리는 7부 능선 거기에서 은폐 엄폐를 하고 대비상태로 매복하고 있었는데 그 주남마을 미니버스가 사고가 난 것은 주남마을 밑에 동네, 그러니까 광주에서 화순 나주 방면으로 이동하는 미니버스가 있었는데 11여단 쪽에 집회가 거기에 정찰을 하다가 차가오니까 정지명령을 내렸는데 오히려 이제 버스는 겁이 나니까 그냥 막 달렸죠. 그래서 거기다가 집중사격을 해서 그 현장에서 버스에서 15명이 즉사를 하고 나머지 앵커님이 말씀하셨듯이 3명이 부상 당한 사람을 싣고 CP가 있는 데로 올라왔어요.
☎ 진행자 > 목격하신 건 그때부터군요. 그러니까.
☎ 최영신 > 그래서 올라왔는데 올라와서 우리가 CP에서 이렇게 보니까 밑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려서 뭔가 해서 저 뿐만 아니라 한 몇 명 같이 내려갔어요. 내려가니까 그 남자 2명은 제가 기억하기로 교련복 비슷한 걸 입고 이렇게 리어카에 포개져서 실려 있었는데 다리하고 뭐 눈 쪽에 부상들을 입어가지고 이렇게 돼 있었고 여고생처럼 보이는 여학생이 손에 붕대를 칭칭 감고 손을 올리고 서 있었어요. 그때 이제 저만 본 게 아니라 한 3, 40명 정도가 리어카 둘레에서 이렇게 봤는데 그 당시 그 지휘관이 그때 당시 계급이 소령으로 제가 알고 있는데 니들이 총을 쐈냐 안 쐈냐 취조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총을 안 쐈다, 뭐 살려달라. 이렇게 간절하게 이제 애원 했는데 주머니 소지품 검사를 하니까 실탄이 나왔어요. 몇 발인지 모르지만.
☎ 진행자 > 총알이 나왔다는 거죠.
☎ 최영신 > 그러니까 지휘관이 너 너 이렇게 찍어서 해치우라는 식으로 정확한 멘트는 제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논조로 얘기했어요. 그런 멘트로. 그러니까 거기서 70m 정도 떨어진 밑으로 내려가서 내려 가는 걸 보고 이제 저희들은 본래 있던 CP로 올라왔죠. 올라가고 나서 한 시간 지났는데 총소리가 났어요. 탕탕탕~,선명하게 총소리가 나는데 안 그래도 좀 크게 걱정이 태산 같이 돼서 올라갔는데 이 친구들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
☎ 진행자 > 그렇군요.
☎ 최영신 > 그래서 이제 그 밑에 갔다 밑에 리어카 끌고 갔다가 올라온 친구들한테 제가 물어봤어요. 어떻게 됐느냐 했더니 그 두 명을 이제 소나무 있는 데 기대놓고서 총을 쏴서 죽이고 거기다 암매장을 했다는 거죠. 그 얘기를 듣고 정말 그 우리 군인이 이럴 수가 있느냐,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군인이 이런 야만적 행동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제가 이 가슴 속에 계속 남아 있었는데 그날 오후에 저희가 거기서 철수 명령이 떨어져 가지고 거기서 군장 메고 헬기를 타기 위해서 밑으로 내려 왔어요. 쭉 내려오는데 여기가 그 지점이구나 하는 데서 이렇게 보면서 보다 보니까 소나무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이렇게 남아 있더라고요. 내려 오는 사람들이 전부 말 안 해도 이게 아침에 벌어졌던 그런 현장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이렇게 내려왔습니다. 저만 본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걸 봤죠. 참 어이 없는 일이죠. 지난 번에 제가 광주 가서 살아남은 마지막 살아남은 홍금숙씨하고 대화했는데
☎ 진행자 > 아까 말씀하신 버스에 타고 있던 여학생 말씀하시는 거죠.
☎ 최영신 > 밑에서 사고가 났을 당시에 앰뷸런스가 왔다는 거예요. 간호사도 오고 그런데 홍금숙씨는 병원으로 보내 달라 자기도 애원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일언지하에 묵살하고 3명을 처음에는 경운기 타고 올라오다가 아마 길이 좁아지니까 리어카로 두 사람을 이렇게 싣고 다시 올라온 것 같은데 거기서 병원으로 보냈으면 그 사람들이 살아 있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을 해봐요. 그런데 올라와 가지고 그것도 저항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그런 사람을 사살 명령을 내려서 또 사살해 갖고 암매장 해 갖고 처리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 진행자 > 저희는 1980년 5월 주남마을 학살 사건에 대해 계엄군 출신으로 양심선언하셨던 최영신씨와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실 때 선생님 홍금숙 씨를 최근에 다시 만나셨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언제 만나신 거예요?
☎ 최영신 > 날짜를...
☎ 진행자 > 최근 일이죠.
☎ 최영신 > 최근에 만났는데 제가 그 광주에 내려가서 만났습니다만 햇수로 40년 만에 만나는 거죠. 하여튼 오래 전에 만났던 사람 같이 반가웠어요. 참 반갑고 같이 대화를 했는데 저는 사실 뭐 거기에 지휘관도 아니고 당사자도 아니고 목격자에 불과하지만 그 홍금숙씨한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사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그 양반이 저를 걱정해줬어요.
☎ 진행자 > 뭐라고요?
☎ 최영신 > 아니, 정말 이런 일을 해서 어떻게 여러 가지 신변 문제나 이런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해주시고 너무 감사했어요. 양심선언 후에 저에게 가해진 협박, 조롱, 또 여러 군데 정보기관에서 사찰도 받고 그 안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치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 진행자 > 청취자 분들은 갑자기 양심선언 말씀하셔서 무슨 말씀인지 모를 수도 있는데요. 아까 전에 말씀하셨던 주남마을 학살 사건 뒤에 그러니까 1988년 국회 청문회에서 양심선언하신 거잖아요.
☎ 최영신 > 89년 1월에 했는데요. 제가 유일한 목격자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건 밝혀야 되겠다 해 가지고 양심선언하고 또 그 당시 참고인으로 현장 가서 검증도 하고 했습니다.
☎ 진행자 > 양심선언을 하기 전까지도 인간적 고뇌가 있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양심선언 이후에도 참 어땠습니까? 주위 분들의 반응이나 아까 잠깐 말씀하셨는데요.
☎ 최영신 > 그때 제가 5살 짜리 하나 그 다음에 임신 중인 아내 이렇게 대학에서 교직원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 양심선언하고 나서 이건 안 된다 해서 따로 떨어져서 도망 다니면서 살았어요.
☎ 진행자 > 가족과 떨어져서요.
☎ 최영신 > 그런데 어느 부대인지 모르지만 여러 명의 군인이 총을 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서 아이고 이제 가스총을 저도 하나 사서 가슴에 차고 그러고 다녔어요.
☎ 진행자 > 당시가 노태우 정부 때였습니까?
☎ 최영신 > 그랬습니다. 그때 만약에 제가 잡혔으면 뭐 어떻게 됐는가 뭐 그런 생각도 해보고.
☎ 진행자 > 엄청난 신변 위협을 느끼셨음에도 불구하고 양심선언을 해주신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 최영신 > 아이고. 감사하기까지 하겠습니다. 제가.
☎ 진행자 >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최영신 선생님께서 양심선언하셨지 않습니까? 당시 목격자가 한 명만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동료 분들이 계셨을 텐데, 추가적 증언 같은 게 안 나와서 말이죠.
☎ 최영신 > 익명으로 나온 분들이 몇 명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제가 그 양심선언하고 나서 더 많은 계엄군들이 양심 고백 할 줄 알았어요. 전혀 아니더라고요. 벌써 제가 양심선언한지 30년 됐는데 지금까지. 침묵을 하고 있는 거죠.
☎ 진행자 > 그러면 그 당시에 같이 군생활했던 분들 아직 연락하면서 지내십니까?
☎ 최영신 > 물론 만나고 있습니다. 만나고 있는데 가끔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지 만나죠.
☎ 진행자 > 뭐라고 그러세요. 그분들은.
☎ 최영신 > 만나면 광주 문제는 금기 사항이죠.
☎ 진행자 > 서로 얘기 안 하세요?
☎ 최영신 > 금기사항인데 가끔 동기들은 안 그런데 후배들은 왜 그랬냐 하고 대드는 애들도 있고 심적으로 내 의견에 동조하는 동기나 후배가 더 많이 있어요. 더 많이 있는데 제 생각하고 정반대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심지어는 태극기 집회를 따라 다니는 애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 진행자 > 지난 월요일에 5.18관련 기자회견 했던 미군 정보요원 출신의 김용장씨가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묵은 십자가 내려 놓으려한다 이런 표현 썼는데 당시 광주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에게도 이 십자가라는 표현이 좀 어울리지 않는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최영신 > 글쎄, 허장환 씨는
☎ 진행자 > 그분은 보안사 출신이고요.
☎ 최영신 > 양민학살 증언할 당시에 그 당시에 증언했던 분이에요. 증언했던 분이라 잘 알고 있는데.
☎ 진행자 > 그리고 김용장 씨요.
☎ 최영신 > 그 분 말이 100% 맞다고 해도 저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한 가지가 있어요.
☎ 진행자 > 어떤 부분이죠?
☎ 최영신 > 그 분이 모든 정보를 갖다 미국에 보고하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10일 동안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이 사망이 165명, 그 다음에 부상자가 3,100명, 구속자도 1,600명 이 정도 났지 않습니까? 이렇게 살육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보고가 됐는데 불구하고 미국이 무슨 액션을 취했습니까? 난 그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지금도 이해가 안 가요.
☎ 진행자 > 미국이 왜 개입하지 않았는가 알면서도
☎ 최영신 >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고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한 것은 참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숙명이라고 이렇게 봅니다. 저도.
☎ 진행자 > 알고 가신 건 아니니까요.
☎ 최영신 > 그렇죠. 거기에 투입됐던 계엄군이 1만 명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 정도 될 겁니다. 그런데 그 계엄군들이 전부 잔혹한 계엄군으로 그렇게 매도돼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휘관, 부당한 지휘관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경우도 있을 거고 제가 그 꼭 우리 참여했던 그 동기들이나 후배들한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이제 우리 동기들이 60대 중반 넘어서고 있어요. 지나간 건 어떻게든지 밝히는 것이 후세들에게 더 이상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좀 늦었지만 좀 전면에 나서기 껄끄러우면 익명으로 라도 보고 듣고 실행한 모든 사실을 밝혀야 된다고 이렇게 봅니다. 그게 오히려 특전병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 진상규명위원회를 한다는데 이 사람들이 증언할 수 있도록 뭔가 안전 장치나 어떤 부분을,,,
☎ 진행자 > 안심하고 지원할 수 있는 장치들이 필요하다.
☎ 최영신 > 그런 안전장치도 마련해줘야 하고 적극적으로 증언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고 봅니다.
☎ 진행자 >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인터뷰 마치기 전에 5.18 민주화운동 관련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 최영신 > 전두환 씨가 5.18 관련해서 발포 명령 없다. 계엄군 개입에 관여한 바 없다, 이렇게 얘기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건 참 당시 전권을 가진 사람이 전두환 씨 아니겠어요. 그런 말 하면 누가 믿겠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리면 진상규명위원회가 잘 안 되고 있는 게 북한군 투입설이라고 보는데요. 저는 이걸 포함시켜서라도 이걸 빨리 진상규명위원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가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그렇게 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진행자 > 오늘 말씀을 쭉 들어보니까 선생님 같은 분의 증언들이 추가적으로 너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최영신 > 저도 동감입니다.
☎ 진행자 >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고요. 힘들고 외로운 세상 꿋꿋하게 견뎌주시고 양심선언해주셔서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 최영신 > 감사합니다.
☎ 진행자 >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1980년 주남마을 학살 사건에 대해 양심선언하셨던 계엄군 출신 최영신씨와 함께 5.18진상규명 문제에 대해서 말씀 나눠봤습니다.
[내용 인용 시 MBC <심인보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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