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사복입고 학생들 틈에 끼라고 명령
학생의 날 앞두고 집회 모임 정보 캐내
동행 형사에게 신호주면 학생들 체포해
당시에는 애국이라 믿어, 후회하고 있다
학생의 날 앞두고 집회 모임 정보 캐내
동행 형사에게 신호주면 학생들 체포해
당시에는 애국이라 믿어, 후회하고 있다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홍성택(제보자)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홍성택(제보자)
여러분, 지금부터 들려드릴 인터뷰는 제가 어제 여러분들과 약속했던 그 인터뷰입니다. 기억하시죠? 주한미군 정보원 출신 김용장 씨와 어제 인터뷰를 하던 중에 김용장 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5.18 당시 광주에서 정보를 수집해서 미국으로 보냈는데 여러 가지 사안들, 전두환 씨가 그 당시 광주에 왔었다는 이야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에 ‘편의대’라는 굉장히 낯선 단어를 언급했습니다. ‘광주에 편의대가 있었다. 민간인처럼 편리한 의복을 입은 군인들이 시민들 사이에 침투해서 장갑차를 탈취한다든지 시민을 약탈한다든지 이런 안 좋은 행동들을 유발했다’는 겁니다. ‘한 30-40명가량의 편의대가 광주로 내려온 걸 내 눈으로 목격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했죠. ‘군인들이 사복을 입고 민간인 사이에 침투해서 교란하는 그 편의대가 광주 말고 다른 곳에, 다른 민주화 현장에도 있었습니까?’ 그랬더니 김용장 씨가 ‘다른 곳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미국으로 정보 보고한 게 아니기 때문에 언급할 수 없다’ 이러셨어요.
이 방송이 나가던 중에 청취자로부터 문자가 들어온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내용인즉슨 ‘방송을 듣다가 편의대라는 말이 나와서 깜짝 놀라서 문자를 보냈다. 나도 1979년 부마 항쟁에서 편의대로 일했던 사람입니다’라는 문자가 온 겁니다. 어제 저희가 바로 전화를 해서 이분하고 여러 가지 사실들을 확인했고요. 오늘 인터뷰 약속을 잡았습니다. 인터뷰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직접 만나겠습니다. 1979년 부마 항쟁 당시 편의대로 활동을 했던 분. 실명을 그냥 내도 좋다라고 말씀을 하시네요. 홍성택 씨 연결해 보죠. 홍 선생님, 안녕하세요?
◆ 홍성택> 안녕하세요.
◇ 김현정> 어제 김용장 씨와의 인터뷰를 들으시면서 ‘저도 편의대였습니다.’ 이런 문자를 저희에게 보내 주셨어요.
◆ 홍성택> 네.
◇ 김현정> 어떤 생각이 드셔서 문자를 보내시게 된 걸까요?
◆ 홍성택> 김용장 씨가 인터뷰하는데 아마 앵커님께서 광주 민주화 운동 이전에도 편의대가 있었냐고 질문을 하셨는데 김용장 씨께서 그건 잘 모르겠다고 그러시더라고요.
◇ 김현정> ‘내가 보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많이 흔하게 있었던 걸로 저는 압니다’ 이러셨어요.
◆ 홍성택> 네, 그래서 제가 그 편의대라는 이름으로 유신의 국군이라고 하죠. 그건 이제 박정희 대통령 말기 때, 부마 항쟁 때 그렇게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문자를 보내게 됐었어요.
◇ 김현정> 부마 항쟁, 그러니까 박정희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그 민주화 운동 당시에 편의대로 활동을 직접 했던 것이 기억이 나서 저희에게 ‘여기 있습니다’라고 문자 주신 거예요?
◆ 홍성택> 네.
◇ 김현정> 우선 감사합니다. 제가 어제 보내 주신 그 문자를 그대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저는 부마 항쟁의 편의대였습니다. 경남대학에서 한 달여 머무는 동안 편의대로 학생들에게 접근하여 대화하다가 11월 3일 데모 이야기가 나오면 따라 다니던 형사들에게 말해서 체포해 가고는 했습니다. 10월 26일로 그 일이 끝났지만 지금도 마산분들께 죄송합니다.’ 이렇게 보내셨어요. 하나하나 이야기를 좀 풀어가보죠. 그러니까 이 당시 군인이셨던 거예요?
◆ 홍성택> 네.
◇ 김현정>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디서 군 복무를 하셨나요?
◆ 홍성택> 제가 78년 8월에 입대를 해서 특전사라는 곳에 차출돼서 공수 훈련을 받고 부마 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 때는 서울에서 계엄군으로 일을 했고 80년 5월에 제대를 했습니다.
◇ 김현정> ‘제가 이 부분을 청취자들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 당시의 기록들을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탁을 드렸는데 사진들과 어떤 기록들 여러 장을 보내주셨어요. 지금 유튜브와 레인보우로 보고 계시는 분들은 이 사진을 확인하실 수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보내주신 것들이 어떤 거죠, 선생님? 직접 좀 설명을 해 주시겠어요?
◆ 홍성택> 부탁을 받고 찾아보니까 앨범이 있더라고요. 제가 공수 부대에 있었다는 그런 거고요. 그리고 공수 휘장증이라는 게 있는데 공수 훈련을 받게 되면 사령관 이름으로 주는 그런 증명서이고요.
◇ 김현정> 앨범에는 ‘축 재직 기념. 이렇게 써있고. 안 되면 되게 하라. 병장 홍성택.’ 이렇게 돼 있네요. 그런 것도 있고.
◆ 홍성택> 사진들은 부대 앞에서 찍은 사진이고 사실 계엄 때는 사진을 찍은 게 전혀 없죠.
◇ 김현정> 그 당시에는 사진을 찍고 이런 상황은 아니었으니까요. 이렇게 공수 부대로 근무하시다가 부마 항쟁 당시에 경남대학교에 머물게 되셨어요.
◆ 홍성택> 그러니까 이 부대는 서울 근교에 있었고 부마 항쟁이 일어나서 저희들이 계엄군으로 그곳을 부산을 먼저 갔고요. 거기에서부터 마산을 거쳐서 시위를 진압을 했죠. 그리고 계엄이 풀리기까지 경남대학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다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하면서 급히 서울로 다시 올라왔죠.
◇ 김현정> 그러면 경남대학교에 머무를 때는 군인 신분으로 군복 입고 총 들고 머무르다가 어느 날 어떤 식으로 편의대원이 되신 거예요?
◆ 홍성택> 그날 그냥 부대에서 ‘너는 오늘 사복 입고 나가라. 가서 학생들에게 데모를 11월 3일에 어떻게 하는지를 한번 이야기를 들어봐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형사들하고 같이 가고, 항상 형사들은 제 뒤에 있었고요. 그리고 저는 다방에 있었던 몇 명의 학생들에게 가서 저는 서울에서 온 누구누구인데 11월 3일 당신들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 이렇게 물어봤고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그런 얘기를 해서 아마 제가 신호를 했고 그 학생들이 잡혀갔던 걸로 기억이 돼요.
◇ 김현정> 다방에 대학생 무리가 보이면, 아는 대학생도 아닌데 가서 자연스럽게 앉으셨어요?
◆ 홍성택> 그렇죠.
◇ 김현정> 나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다라고 소개하면 다 경계를 그냥 허물고 술술 얘기를 하나요?
◆ 홍성택> 그렇게 경계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돼요. 그냥 그들하고 편하게 얘기를 했던 것 같고. 이게 11월 3일 학생의 날에 데모하는 게 그때는 아마 큰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날 당신들도 이제 여기 마산도 데모하냐?’ 그걸 물어봤고요.
◇ 김현정> 그러면 물어봤을 때 ‘맞소’라고 얘기하면, ‘맞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면 손짓을 하셨어요, 형사들한테?
◆ 홍성택> 그러면 제가 이렇게 손을 들죠. 오른손을 들면 형사들이 와서 그들을 데리고 갔어요.
◇ 김현정> 이게 여러 차례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 홍성택> 제가 세 번 했습니다. 제 기억으로. 그러니까 제가 항상 머릿속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요, 편의대라는 단어가.
◇ 김현정> 선생님도 그러면 군에 가서 편의대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신 거예요, 그때?
◆ 홍성택> 그렇죠. 이런 프락치 역할을 하는 게 편의대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 김현정> 그렇군요. 그렇게 해서 오른손을 들어서 뒤에 숨어 있던 형사가 이 학생들을 끌고 가면 그러면 어디로 가는 거였어요, 이 학생들은?
◆ 홍성택> 최종 목적지는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버스가 와서 그 버스에 이 학생들이 실릴 때 저도 같이 탔는데 굉장히 많이 그 안에 학생들이 있더라고요.
◇ 김현정> 이미 실려 있어요?
◆ 홍성택> 그리고 저도 그 학생하고 같은 줄 알고 그 안에 있던 군인이 저를 때려가지고 ‘저는 공수부대 군인이다.’ 그렇게 했던, 그래서 제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 일들이.
◇ 김현정> 이미 버스에 하나 가득 잡혀온 대학생들이 있던가요?
◆ 홍성택> 네, 버스가 여기저기 가서 계속 싣고 가는 걸 보면 그 일을 저 혼자 했던 건 아니었던 거죠.
◇ 김현정> 부마 항쟁의 기억. 굉장히 이것도 아픈 기억이시겠습니다마는 그 기억은 어떤 걸 가지고 계세요?
◆ 홍성택> 부마 항쟁 때는 저는 뭐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몽둥이로 막 후드려치던. 그게 지금도 굉장히 마음이 아파요, 그런 것들이. 왜 내가 그 사람들을 왜 때려야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 김현정> 왜 때려야 했는지. 하지만 때리라고 하면 때릴 수밖에 없는...
◆ 홍성택> 무서웠어요. 그냥 제가 안 때리면 제가 맞으니까요. 그리고 그 당시는 그분들이 아주 미웠고 저분들 때문에 내가 너무 고생을 하니까 빨리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 이게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던 기억이에요.
◇ 김현정> 지금 저는 들으면서 어제 김용장 씨도 그러셨고 오늘 홍 선생님 증언을 들어봐도 그렇고 군인들 중에 그 무렵에 편의대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을 걸로 보이는데 왜 이런 홍 선생님 같은 양심선언이 통 나오지 않았던 걸까요? 그것도 좀 희한한 일이다 싶네요.
◆ 홍성택> 아마 이제는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디서 말할 것도 아니었고 그게.
◇ 김현정> 그냥 시키니까 하는 일.
◆ 홍성택> 그러니까 편의대라고 하면 다른 어떤 조직이 있어서 한 게 아니라, 편파적으로 보내서 사복 입고 나갔다가 일을 하다 돌아온 거기 때문에 어떤 죄의식도 없고 그게 뭐 그래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참 어쩔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굉장히 미안하죠.
◇ 김현정> 어제도 그러셨어요. 저희에게 문자 보내시면서 마산시민들에게 미안하다 하셨어요. 그리고 저희가 지금 실명 인터뷰가 괜찮으시겠습니까 했는데 실명으로 사과하고 싶다. 실명 인터뷰 괜찮습니다라고 하셔서 제가 좀 놀라기도 했는데. 어떤 점이 그렇게 미안하세요? 마음에 걸리세요?
◆ 홍성택> 그냥 어린 시절 때 그냥 사람을 막 때리고 그들을 못살게 굴었던 게 너무 미안해요. 그건 평생도록 저는 그건 계속 미안해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문제는.
◇ 김현정> 몽둥이를 휘두르지 않으면 그 몽둥이에 내가 맞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음에도 지금 생각하면 마음에 짐이 되는 거죠.
◆ 홍성택> 그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그렇죠. 그런데 그때는 그게 애국하는 일인 줄 알았어요. 이런 일들은 아주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을 했었던 거죠.
◇ 김현정> ‘나라에 폭동이 일어났으니 이걸 진화해야 된다, 평화를 위해서’ 이렇게 교육받으셨겠죠. 어제 김용장 씨는 ‘광주에서 전두환 씨를 목격한 사람, 목격한 정보원들이 여전히 여럿 생존해 있다. 다만 그들과 연락이 안 될 뿐이다’ 그러셨고 편의대원도 30-40명 정도가 광주에서 활동하셨다고 얘기하셨어요. 그러면서 이분들이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우리 홍 선생님도 그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더 많은 증언이 나오기를 아마 바라시면서 오늘 인터뷰 응하신 걸로 제가 압니다.
◆ 홍성택> 저는 김용장 씨한테 너무 고마워서 사실 방송을 들을 때 제가 젖은 장갑을 끼고 있어서 문자를 찍을 만한 형편이 아니었는데 그걸 얼른 벗고 막 닦고 어려운 환경에서 찍었습니다. 왜냐하면 김용장 씨는 이 일을 증언하기 위해서 한국까지 오셨고 저도 조금이라도 보태야지 하고 쓴 것뿐입니다.
◇ 김현정> 선생님, 감사드리고요. 선생님 증언을 시작으로 해서 과거에 편의대라는. 이것 또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고 지워야 하는, 털고 가야 하는 어떤 역사의 과오인 것 같습니다. 군인들에게 사복을 입혀서 편의대로 활동시켰다는 아주 사실은 좀 충격적이고 낯선 사실이거든요. 이 사실을 용기내서 알려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제2, 제3의 양심선언이 나오기를 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홍성택> 저도 그렇게 바라겠습니다.
◇ 김현정> 오늘 고맙습니다.
◆ 홍성택> 네, 감사합니다.
◇ 김현정> 부마 항쟁 당시의 편의대. 그러니까 사복 군인으로 시민들 사이에 뛰어들어서 활동했었던 이른바 공작 활동을 했던 분의 양심선언이었습니다. 홍성택 씨 만나봤습니다. (속기=한국스마트속기협회)
[CBS 김현정의 뉴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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