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막노동 일지 ⑫] 연장근무 실종에 현장 노동자수 급감... "잠잠해질 때까지 버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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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필 기자]
▲ 5월 1일 오후 부산항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이날 발표한 4월 수출입동향에 따르면 4월 수출액은 496억2천만달러로, 작년 같은 달보다 14.2%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 부문의 경기 부진 장기화 여파로 한국의 수출이 7개월 연속 역성장했고 무역적자는 14개월째 계속됐다. |
ⓒ 연합뉴스 |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뭐를 먹고 살아야 하나..."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르던 반도체 업계에 불황이 닥치고 있다. 반도체가 한국을 비롯해 미국, 중국, 대만, 일본 등의 패권 장악 무기로 변모하면서 '먹고 사는 경제상품'이던 것이 '죽고 사는 안보상품'이 돼버렸다.
'삼성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경기 평택고덕 반도체 공장 건설현장은 잘나가던 시절, 매주 평균 1000명에 가까운 신규 근로자를 뽑았지만 이젠 필요할 때만 충원한다. 더욱이 기존 인력을 쳐내기에도 바쁘다. 적게는 2만 명, 많게는 3만 명의 현장 인력이 사라졌다. '고덕 숙노(고덕 숙소 노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네가 북적북적댔지만 지금은 방 빼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충북 청주 SK하이닉스 현장도 썰렁하다. 한때 협력업체 노동자가 1만 2000여 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1000여 명도 안 되는 인력이 마무리 작업을 한다. 여기저기서 '끝물' 현상이 보인다. 아침 조회(TBM)시 빽빽하게 모여 체조하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시장통 같던 식당은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도 차례가 온다.
내가 일하는 반도체 현장도 직격탄을 맞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공(단순보조작업자) 월급이 500만~800만 원에 달했지만 일거리가 크게 줄며 임금이 반 토막 났다. 연장·철야 근무는 옛말이고, 매일 '맨대가리'(기본 공수)에 그친다. 이마저도 일자리가 없어진 노동자들은 짐을 싸서 떠나고 있다.
칼바람 부는 반도체... 노동자는 파리 목숨
누군가는 잘렸고 누군가는 돈을 좇아 떠났다. 이 모든 책임을 정부에게 물을 수야 없겠지만 노동자는 괴롭다. 미국의 반도체 패권선언에 우리나라는 샌드위치 신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반도체법(CHIPS Act)에서 규정한 투자 보조금을 받으면 이후 10년간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능력을 5% 이상 확장하지 못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미 제조된 반도체 물량이 넘쳐나 몇조 원대의 적자도 기록 중이다.
이는 현장 일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돈을 향해 몰려들었던 불나방들은 살길이 막막하다. 청주에서 부산으로, 평택에서 이천으로, 다시 청주에서 아산 탕정으로, 또다시 평택에서 용인, 파주로 떠나야만 한다. 길 잃은 유목민 신세다. '조선족'(조선소 출신)들은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 거제 등지로 돌아간다.
나 또한 언제 보따리를 싸야 할지 모른다.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고, 언제 칼바람이 불어 닥칠지 노심초사다. 간당간당한 파리 목숨이다. 이제야 일이 몸에 익어 할 만해졌는데, 차디찬 한겨울의 한풍도 어렵게 견뎌냈는데 봄바람이 불자 된서리를 맞고 있다.
일할 사람은 넘쳐나는데 일자리가 사라지니 졸지에 백수가 창궐한다. 일이 넘쳐날 땐 일이 힘겨워 매일매일 쉬고 싶고, 막상 일이 떨어지면 일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일'이란 언제나 이율배반의 평행선을 달린다. 매일 매일 일이 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은 없다.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 일을 하는 것이다. 사명감이니 보람이니 하는 개똥철학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와 소시민에게 있어서 노동은 도망칠 수 없는 절벽 같은 것이다.
문제는 일이 없어졌을 때의 상실감이 더 크다는 것이다. 오늘 갑자기 내일이 없어지는 충격적인 '현타(현실 자각 타임)'에 직면하면 공포스럽다. 출근이란 늘 지겨운 윤회지만 막상 출근할 필요가 없어지고 나면 마음 한편에 구멍이 나는 것이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도 땀 흘린 대가로 아주 가끔 주어지는 자유이기 때문 아닌가. 일 년 내내 일하지 말고 여행만 다니라고 한다면 그건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다.
'살아보니 친구로 남은 건 소주, 담배, 커피뿐'이라는 말이 딱 내 현실이다. 모두가 쓴맛만 남았다. 나는 막일을 하며 막일에 대한 선입관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부끄러워야 할 직업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의 그릇된 인식이다. '막일'을 그저 천한 '남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일이 소중하다. 일이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여력이 있는 한 노동판에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 삼성전자가 1분기 매출 실적을 발표한 27일 서울 서초구 삼성 딜라이트 샵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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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유년시절의 기억이 한몫했다. 사과 과수원을 했던 우리 집은 부농이 아니라, 근근이 체면은 깎지 않을 정도의 빈농이었다. 아버지는 사과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자 과수원 사이사이에 여러 곡물, 채소들을 심었다. 어느 해엔 땅콩을 심었고, 호박, 감자, 고추, 오이 등도 심었다. 사과가 본업인지 부업인지 모를 정도로 땅 한 뼘도 빈틈이 없었다.
문제는 노동력이었다. 사람을 사서 농사를 지어보고 인건비 감당이 안 되자 자식들 힘을 빌렸다. 사과 적과, 농약치기, 거름주기, 사과 따기, 호박 심기, 고추심기, 따기 등 겨울을 뺀 1년 농사를 함께 했다. 자식농사보다는 돈벌이농사가 급했다.
그러다 보니 휴일이 사라졌다. 평일엔 학교를 다니고 주말엔 밭으로 나가야했다. 시내에 사는 친구들이 축구하자고 하는 날에도 난 농약줄을 잡고 있었다. 언젠가는 아버지 허락을 받지 않고 하이킹을 다녀왔다가 호되게 혼난 적도 있다. 그날 이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내게 휴일은 거의 없었다. '시지프스 노동' 같았다.(시지프스는 신을 기망한 죄로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받아 산꼭대기에 커다란 바위를 올려놓고, 굴러 내려오면 또 올려놓는 무한반복 노동의 형벌을 받은 신화 속 인간이다.- 기자 말)
이제 유년의 노동은 기억에서 추억으로 치환된다. 힘에 겨웠던 아버지의 노동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눈물과 화해하기 시작했다. 자식에게까지 어쩔 수 없이 시켜야 했던 막일에 대한 고통을 알게 된 것이다. 난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없던 힘도 생긴다. 조그맣게 붙어있는 근력의 DNA가 꿈틀댄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이고, 당시 아들이었던 내게도 그 나이대의 아들이 있다. 나의 노동은, 나의 아들들에게 노동을 답습시키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나는 두 아들을 생각하면 시지프스의 노동을 감내할 자신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뼈가 닳아도 나의 DNA는 아버지의 과거를 겨냥하고 있지 않다.
지금도 20대 중후반의 두 아들과 조우할 때면 뽀뽀로 인사한다. 서로가 징그럽다고 느끼지 않으니 부끄럽지도 않다. 모든 걸 다해주지도 못했는데 잘 커 줬고, 그들은 내 막일을 이해하고 응원해 준다. 더욱 고마운 것은 아빠의 막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휴, 잘 살았다."
풍랑이 일 때는 피할 방법이 없다. 잔잔한 물결이 너울로 변하는 순간 삼각파도는 절벽의 등허리를 때리며 산산이 부서진다. 그 파고는 밀려오는 물결과 밀려나가려는 물결이 부딪쳐 집채만 한 배를 집어삼킬 수도 있다.
지금 겪는 고부채, 고금리, 고물가의 3각파도가 그것이다. 다중위기(polycrisis)다. '이웃이 실업자가 되면 경기불황이고,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으면 경제공황이며, 정부가 정신 차리면 그게 경기회복'이란 말이 있다. 지금 노동자가 할 일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3각 패턴을 디디고 버텨야 할 때다.
▲ 내가 일하고 있는 야적장도 이제 마무리작업에 한창이다. |
ⓒ 나재필 |
▲ 항상 근로자들로 북적대던 반도체 증설공사현장 게이트 앞이 썰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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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체 공장 증설현장은 막바지 단계로 모든 가설물이 철거되고 공터로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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