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영국의 BBC 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서 확인 되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기자 세 사람은 10 여년간의 조사끝에 1982년 「성혈과 성배」(TheHoiy Blood And Holy Grail / 미카엘 베이전트, 리처드레이, 헨리 링컨 공저)라는 책을 통하여 위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밝힌바 있는데, 책의 중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마리아 막달라와 결혼하여, 자녀까지 두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구세주 행세를하며, 다윗 왕을 계승하여, 유대의 왕이 될려다가,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 처형 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의 요셉을 통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바 있는,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은 것 같이, 연극을 하고는 그 뒤 부활의 연극을 한다음, 로마 병사들의 호위속에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
아내 막달라 마리와와 자녀들과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는,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를 넘게 살다 죽었다. 프랑스 남부마을 렌느 르 사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야산몽 카르두에 예수의 무덤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렌느 르 사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 주교관구 겔트교회를 세워 주교로 있다가 거기서 죽었다.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스 왕국의 메로빙 왕조에 동화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지코트가등 8개의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기독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의 혈족은,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코드프로아 드부이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친척 표징을 가진 귀존을 포함하여, 많은 예수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다. 이러한 예수가의 비밀에 대해, 성당 기사단(聖堂騎士團, 111 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군대)과 시온의 소수도원이라는 유명한 비밀 조직은, 깊이믿고 신뢰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자세한 비밀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다.
그것이 중세 성당기사단의 지방지부의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 마을 렌 르 사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체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 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부를 누린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모든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BBC 방송에서 부분적으로, 3차례에 걸쳐 방송된바 있는 이러한 내용의 책 성혈과 성배가 출판이 되어, 셰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인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서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기독교인이 주심판사를 맡아 3년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예수로 되어있는 족보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 하고는, 무덤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심판사는 판결을 미뤄오다 빨리 판결하라는 법원의 독촉을 받고, 판결하기를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 하였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살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 이었습니다. 라고 판결 하였다.
이에 이러한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 기독교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지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 확대되어 영국 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재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재판 과정을 지켜본 기독교인들은 약 80%가 교회 등 타종교로 개종하였으며, 유럽과 미국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나와 세계적인 화재가 되자. 대한민국에서는 전 언론(동아,조선,중앙,부산일보등)에서 보도(사진3 :1982.2.20자 동아일보)를 하였으나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가 급격히 퇴락하던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는 달리 대한만국의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편승하여, 계속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
그리고 또 십자가에 메달린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로써 예수의 시신을 쌓던 성의라고 하여 기독교와 로마교황청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증거로 삼던 세마포(토리노 성의로 불려왔음)가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감쌓던 것이라는 것이 과학적 분석과 여러 가지 문헌의 고증에의해 밝혀진바, 국내에서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앨마그루버, 홀거 케르스텐 지음, 홍은진 번역, 아침이슬 간행)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토리노 성의는 1세기 때부터 유대와 유럽의 교회와 왕가에 때로는 공개 전시되며, 보관되어 오다 1460년에서 1983년까지 성의를 보관해오던 사보이 왕가에서 교황청에 기증하게 되어 현재 토리노의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죽은 시체에는 필요없는 100근(40kg)이나 준비 된 상처 치려제인 몰약과 침향(알로에 추출물)(요한복음19:40)과 피, 땀, 등에의해 얼굴과 전신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토리노 성의는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산 사람을 그대로 싼 세마포라는 것이 밝혀져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유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1988년 10월 13일 토리노의 대주교 발레스테레오 추기경은 토리노 성의가 13~14세기에 만들어진 모조품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검증을 계속 요구하자 1997년 9월 5일에는 토리노의 성의가 예수의 시신을 감쌓던 진품이라고 번복 발표하고는 감정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토리노의 성의는 예수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의 몸을 감쌓던 것이지만 그 마져도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출처 - 1982년 2월 20일 동아일보
이거 밝혀지고 서구유럽에선
성당이나 교회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만 남고..
기독교의 세가 많이 꺾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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