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사건 재판에서 유독 자주 등장한 개념이 진술거부권이다. 헌법 12조 2항이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 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는 권리이다. 삼성그룹 전·현직 임원들이 박근혜 前 대통령의 재판에서 증언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도 진술거부권 덕분이다. 박상진 前 삼성전자 사장은 입사 후 경력에 대해서 묻는 간단한 질문조차 증언을 거부했다. 특검이 "증언 거부는 사법제도를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법이 보장한 권리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형사 절차의 대상자와 달리, 국민이 위임한 권리를 행사하는 고위 공직자는 직무와 관련해 제기된 의혹에 대해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공직자가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선출 과정도 거치지 않고 최고 수준의 재판권을 위임한 대법원장이라면 답해야 할 이유는 더욱 많아진다. 그 의혹이 법관 독립성 훼손의 증거로 지목된 '법원행정처의 판사 블랙리스트'라면 더욱 그렇다. 의혹을 제기한 주체가 전국 판사들이 민주적으로 총의로를 모은 '전국법관회의'에서 구성한 '현안 조사 소위원회'라면 답변 거부 이유를 찾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 지극히 간단한 질문…답변하지 않은 대법원장
양승태 대법원장은 답변하지 않았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전국법관회의가 구성한 '현안 조사 소위원회'가 지난 8월 8일 대법원장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은 지극히 간단했다: "(판사 블랙리스트 파일이 저장돼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컴퓨터 저장매체 등이 이미 폐기된 것은 아닌지, 다른 컴퓨터 저장매체들과 분리되어 보관돼 있는 것은 있는지"였다. 특검이 박근혜 前 대통령 재판에서 박상진 前 삼성전자 사장에게 삼성 근무 경력에 대해 물은 것만큼 간단한 질문이었다. 박상진 前 사장과 마찬가지로 양승태 대법원장은 소위가 요구한 답변 기한인 8월 14일까지 답을 하지 않았다.
대법원이 비슷한 질문에 답을 한 적은 있다. 현안 조사 소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6월 22일 한 국회의원이 문제의 컴퓨터 저장매체 교체 여부에 대해 질의했고, 이에 대해 대법원은 "대법원, 법원행정처, 법원도서관에서 사용 중인 컴퓨터 본체는 약 2,705대이고, 많은 법관 및 직원이 근무 중이며 정기 인사를 포함한 인력의 이동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관계로, 전산장비 사용자 변경 이력 관리는 하고 있지 아니하며 요청한 관리 현황은 파악할 수 없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해당 컴퓨터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떤 상태로 있는지 관리를 안 해서 모르겠다는 뜻이다.
●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던 대법원
현안 조사 소위원회는 지난 8월 17일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현안 조사 소위원회가 대법원장께 드리는 재청"이란 글에서 "(이런 설명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조사 대상 컴퓨터는 사용자와 사용 기간 등으로 특정되는 약 5대에 불과한 점, 행정처 근무 법관의 전임자-후임자간 인수인계 관행이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위 5대의 컴퓨터 저장매체 교체 폐기 여부를 파악할 수 없다는 답변을 쉽사리 납득할 수 없다"고 현안 조사 소위원회는 주장했다.
현안 조사 소위원회가 '판사 블랙리스트'가 관련됐다고 의혹을 제기한 컴퓨터는 법원행정처 내 요직을 맡았던 판사가 사용했던 공용물건인 컴퓨터다. 일반 회사나 행정부처의 경우에 비춰봐도 기획조정실 등 조직 총괄 부서에서 요직을 맡았던 직원이 최근까지 사용한 컴퓨터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답변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가까운 사례로 특검은 조윤선 前 문화체육부 장관이 국회에서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일을 문화체육관광부 등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에서 찾아낸 바 있다.
● '양승태 코트'의 저장매체 삭제에 대한 판례
'현안 조사 소위원회'는 "조사 대상 컴퓨터 저장매체 중 일부가 실제로 교체되거나 폐기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더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또, "만에 하나라도 저장매체를 폐기하거나 은폐하는 행위가 있었다면, 그 매체에 저장된 전자증거에 대하여 정확하게 조사함으로써 진상을 규명하고 의혹을 해소하려는 전국법관대표회의의 결의, 그리고 이에 따른 현안 조사 소위원회의 정당한 직무를 방해하는 행위에 해당하며 명백히 위법하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대법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지난 2013년 대법원은 이명박 정부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에 대해 검찰이 수사하기 직전 컴퓨터 저장매체를 물리적으로 복구 불가능한 방식으로 삭제한(디가우징) 장진수 前 주무관 등에 대해 유죄를 확정한 바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양승태 대법원장이 형사 절차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6월 15일 시민단체인 투기자본감시센터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양승태 대법원장 등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할 경우 현직 대통령과 달리 형사상 면책 특권이 없는 대법원장 역시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또는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양승태 대법원장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이유가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국의 대법원장이 형사적 소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진술거부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가정만으로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 "대법원장으로서 마지막 역할"
양승태 대법원장의 남은 임기는 이제 1달 정도에 불과하다. 이번 주에 청와대가 차기 대법원장 후보를 지명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만약 양 대법원장이 본인의 임기 내에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떠난다면, 차기 대법원장의 첫 번째 과제는 '판사 블랙리스트' 문제 추가 조사 여부 결정이 될 것이다. 차기 대법원장이 이 문제로 임기를 시작하는 것은 사법부 구성원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사태일 것이다. 전국법관회의가 구성한 현안 조사 소위원회가 8월 14일에 올린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사법부가 역사의 오명을 남기지 않도록 대법원장으로서 마지막 역할을 하여 주시길 간곡히 재청합니다."
※ 진상조사위 조사 자료 관련 설명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 측은 이 문제와 관련해 전국법관회의 개최에 앞서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조사해 "사실무근"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독립기구인 진상조사위원회 측이 전국법관회의 측 현안 조사 소위원회에 '블랙리스트 관련 조사 자료를 제공할 테니, 이를 검토해 보고 논의해보자'는 취지의 공개 제안을 한 바 있으나, 현안 조사 소위원회가 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블랙리스트 저장 의혹이 제기된 컴퓨터 저장매체의 폐기 여부부터 질문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전국법관회의가 구성한 현안 조사 소위원회 측은 '진상조사위든 법원행정처든 해당 조사 자료를 제공하면 소위는 받아서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라 해당 제안을 거부한 바 없다. 한편, 대법원장께 드린 컴퓨터 저장 매체 폐기 여부에 대한 질문은 제2회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증거보전절차를 취하라고 결의했기 때문에, 보전절차에 앞서 증거 자체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질문과 진상조사위의 자료 제공 제안은 별도이고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임찬종 기자cjy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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