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 '법관 파면 청원' 전달에 사법권 침해 우려한 법조계, '자본권력'에도 일관성 보여야
[오마이뉴스 최지용 기자]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정형식 부장판사를 '파면해 달라'는 국민청원을 청와대가 법원에 전달한 것을 두고 법조계가 시끄럽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 4일 성명에서 "법원의 독립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사법부 독립은 엄정하게 보장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현직부장 판사도 법원 내부망에 글을 올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성명서를 채택하도록 전국법관회의에서 안건으로 논의하자"라고 제안했다. 여기에 다수 대표법관들이 동의를 표하며 다음달 10일에 열리는 법관회의에서 실제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이 같은 반응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사법부의 독립', 특히 행정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은 중요하다. 과거 독재정권에서 사법부가 권력에 굴복하며 벌어진 불행한 역사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최근 사법부는 박근혜 청와대와 당시 대법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을 두고 교감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또 한번 신뢰를 잃었다. 그러니 이번 청와대 조치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법관들이 이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일관성이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행정권력뿐 아니라 모든 권력으로부터 독립될 때 굳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법원은 삼성이라는 '자본권력' 앞에 한없이 초라하다. '현직판사 파면'이라는 다소 무리한 청원이 등장한 것도 결국 삼성을 바라보는 법관의 시선에 국민들이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벌에 관대하다'는 비판이 사회적으로 제기됐지만 이에 목소리를 내는 법관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또 삼성 관련한 재판을 맡은 강민구 부장판사가 삼성 수뇌부에 인사청탁성 문자를 보낸 것에는 얼마나 문제 제기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언론에 자기 판결 언급하는 판사, 침묵하는 동료들
이번 논란의 출발점이었던 정형식 부장판사의 판결부터 다시 살펴보자. 그는 국정농단 사건의 '스모킹건'(Smoking gun, 결정적 증거)으로 불리는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재용 부회장의 형량을 대폭 낮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독대에서 '승마지원' 요구가 있었고 이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수첩에 기록했지만, 정 부장판사는 이를 정황증거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종범 수첩'은 다른 국정농단 재판에서 모두 일정부분 증거능력이 인정됐다. 판사는 오로지 '법리와 증거, 법관의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고 한다. 법리를 해석하는데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판사와 저 판사가 완전히 상반된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대법원은 '판례'를 만들어 그 기준을 세운다.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에 관한 판례는 이미 세워져 있었다. 다른 판사들은 이 판례에 따라 증거를 판단했다. 그렇다면 정 부장판사만의 다른 판단은 '양심'의 차이라고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관련기사 : '안종범 수첩' 증거능력 또 인정, 이재용 판결 뒤집힐까)
정 부장판사는 또 판결 다음날 일부 언론을 만나 "법리는 명확했다. 석방 여부를 고민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법리가 명확하다면 석방 여부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법리에 따라 구속할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석방하는 게 당연하다. 결국 이 말은 역설적으로 정 부장판사가 이 부회장을 석방하려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고백'과도 같다. 판사가 판결 후 언론을 만나는 것 역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판사는 판결로 말해야 하고, 그것이 정당하다면 굳이 언론에 변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 부장판사 판결을 두고 법원에서도 반박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김동진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재용 판결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짧은 글을 올렸다. 법원에서 나온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이후 <오마이뉴스>가 만난 여러 판사들은 정 부장판사가 일부 언론을 만나 인터뷰한 것에 공통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 '법원은 왜 재벌에게, 특히 삼성에 관대한가'라는 국민적 의구심에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고위 법관의 부적절한 행동, 계속돼도 괜찮은가?
최근 독립언론 <뉴스타파>는 법원장을 지낸 한 현직 부장판사가 삼성 대외협력업무 최고책임자였던 장충기 사장에게 모두 13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을 보도했다. 사회 고위층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어 연락을 주고 받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문자에서 삼성을 다니는 자신의 동생 인사 문제를 언급하고, 삼성 휴대폰을 홍보했다고 생색냈다. 그는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의 이혼소송도 맡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강 부장판사는 부산지방법원 법원장으로 재직하던 2015년 8월부터 2016년 7월 사이 장충기 사장에게 "인도 사업장 가 있는 제 막둥이 동생이 김 사장의 억압 분위기를 더 이상 못 견디어 해서 이달 중이나 인수인계되는 대로 사직하라 했습니다. 아직도 벙커식 리더십으로 부하를 통솔하는 김 사장이 안타깝습니다. 그동안 진 신세는 가슴에 새깁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동생의 인사 문제를 장 사장이 해결해주길 바란다는 취지의 뜻으로 읽힌다.
그는 또 장 사장에게 평소 자신이 삼성전자 제품과 서비스를 자주 이용하고, 주변에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도 보냈다. 강 부장판사는 자신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린 영상을 언급하며 "두 번째 영상 말미 앞에 자연스럽게 삼성페이 화면을 스쳐가듯이 소개했습니다"라고 보냈다. 고위 법관이 삼성을 홍보할 의도로 영상을 제작해 올리고 이를 삼성 고위직에게 보고하듯 한 것은 친분이 있는 관계라고 해도 적절하다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를 비판하는 법원 내 목소리는 찾을 수 없다. 법원노조가 강 부장판사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고 있을 뿐, 판사들은 침묵하고 있다. (관련기사 : 법원노조, '장충기 문자' 강민구 부장판사 조사 촉구) 또 이부진 사장과 이혼 소송중인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이 지난 3월 '강 부장판사가 삼성과 밀접한 것으로 알려져 객관적이고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재판부 기피신청서를 제출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강 부장판사의 문자가 공개됐지만 재판 공정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이유였다.
여기서 판사들에게 묻고 싶다. 강 부장판사의 행위가 아무 문제가 안 된다면, 앞으로 장충기 사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삼성의 고위직 누군가에게 고위 법관이 가족 일을 언급하고 제품을 홍보하고 있다는 문자를 보내도 된다는 건가? 그리고 그 법관이 삼성과 관련된 재판을 맡아도 되는가? 국정농단 사건의 주범들은 대부분 구속돼 있고 법원은 엄중한 책임을 묻고 있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간부들은 누구도 구속돼 있지 않고 모두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이런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는 국민들에게 잘못이 있는 건가?
이번 청와대의 조치에 반발해 전국법관대표회의 논의를 요구한 김태규 울산지법 부장판사는 글에서 "우리 현대사에서 사법부의 독립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은 행정부고, 현재도 사법권 침해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행정부가 될 공산이 크다"라며 "사법권 독립에 위해가 되는 행위에 침묵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입장을 표출했던 것이 우리 법관들의 모습이었다"라고 밝혔다.
정말 과거에도 그렇게 분연히 일어났는지 의문이지만, 지금이라도 행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 법관들의 행동에 지지를 보낸다. 그리고 부디 삼성과 관련된 문제에도 침묵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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