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는 검찰이 수사 중인 쌍방울 '800만 달러 대북 송금' 사건의 실체를 담은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비밀 문건을 입수해서 보도하고 있다. 모두 45개 문건으로 분량은 140여 쪽에 달한다. 어제(20일) 뉴스타파는 쌍방울그룹 김성태 회장이 대북 사업을 미끼로 계열사의 주가 조작을 펼칠 가능성을 미리 예측한 국정원 2급 비밀 문건을 공개했다.(관련 기사 : [국정원 문건]① 비밀보고서에 "쌍방울, 대북사업 내세워 주가조작" 정황]
오늘(21일)은 국정원이 처음부터 우려했던 김성태의 '주가 조작' 정황이 더욱 자세히 기재된 국정원 문건을 추가로 공개한다. 여기에는 쌍방울 김성태 회장이 대북 사업 협약 등을 통해 자사의 주가를 부양하는 대가로 북측에 거액의 금품 제공을 약속했다는 첩보가 등장한다. 만약 첩보가 사실이라면, 김성태 회장이 북측에 건넸다는 800만 달러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대북 송금 800만 달러의 실체 가늠할 '국정원 비밀보고서'
검찰은 쌍방울 관계자들의 진술을 근거로 800만 달러의 사용처가 '경기도 스마트팜 비용 대납(500만 달러)과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방북 비용(300만 달러)이라고 주장한다. 경기도가 내야 할 돈을 김성태가 대신 내줬을 뿐, 쌍방울의 대북 사업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달 7일, 1심 선고를 앞둔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재판에서도 800만 달러의 사용처가 핵심 쟁점이다. 이 전 부지사는 김성태와 외국환관리법 위반(불법 대북송금)의 공범 신분이다. 그러나 이 전 부지사는 김성태가 북측에 돈을 건넸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몰랐고, 이재명 경기도지사에게도 보고한 사실이 없다는 입장이다.
핵심 인물은 남측은 아태협 '안부수', 북측은 정찰총국 공작원 출신 '이호남'
국정원 보고서 내용을 종합하면, 국정원은 안부수 아태협 회장과 쌍방울 김성태 회장, 이화영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북한 인사 접촉을 면밀하게 체크했다. 특히 국정원은 안부수 회장을 협조자로 발탁해서 대북 정보 수집에 동원했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던 2018년에 안부수는 통일전선부 김성혜 책략실장과 연락이 되는 거의 유일한 대북 사업가였다. 그 당시 김성혜는 북-미 베트남 정상회담을 막후에서 실무 조율하며 트럼프 대통령과 나란히 사진을 찍을 정도의 실세였다. 국정원은 김성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안부수에게 거액의 특수활동비까지 지급했다.
그런데 국정원 문건과 검찰 수사기록을 종합하면, 안부수에게 김성혜를 소개해준 건 북한 정찰총국 대남 공작원 출신 이호남(본명은 리철, 1954년생)이다. 그는 국정원 문건 곳곳에 북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참사 이호남 혹은 리호남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안부수와 김성태가 중국에서 북측 인사를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이호남이 나온다. 김성태는 법정에서 그가 2019년 7월에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방북 비용을 300만 달러로 조율했을 당시 북측의 협상 창구가 이호남이었다고 주장했다.
이호남은 윤종빈 감독의 영화 <공작>에서 안기부 블랙요원 흑금성(황정민 역)의 북측 사업 파트너로 나온 북 대외경제위 처장 이명운(이성민 역)의 실존 모델이다. 이호남은 이름과 소속, 직책을 계속 바꿔가며 30년 넘게 대남 공작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고문역이란 타이틀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北 정찰총국 이호남 "쌍방울 계열사 주가 띄워주는 대가로 수익금 받기로"
국정원 대북 담당 요원은 2020년 1월 31일에 쌍방울 관련 보고서를 작성했다. 문건의 제목은 '北 이호남, 쌍방울의 대북사업 이용 주가조작 시도 언급'이다. 문건 1쪽에는 '北 정찰총국 이호남은 지난해(2019년) 3월경 김○○(남측 대북 사업가)에게 "대북 사업으로 쌍방울 계열사 주가를 띄워주는 대가로 수익금 일부를 받기로 했다"며 "쌍방울이 (주가조작) 수익금을 1주일에 50억 원(총액 미상)씩 김○○에게 전달하도록 할테니, 국내 백화점 상품권을 구입해서 중국 선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는 첩보 내용이 적혀 있다. 이호남이 평소 친분이 있던 대북사업가 김○○에게 쌍방울로부터 약속받은 주가조작 수익금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호남은 쌍방울이 2019년 1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대북 사업 협약서를 작성할 때도 개입했다. 그런 이호남이 쌍방울의 주가를 부양하는 조건으로 1주일에 50억 원씩 받기로 했다고 남측 대북 사업가에 직접 말했다는 것이다. UN의 대북 제재를 의식한 듯, 국내 백화점 상품권으로 바꾼 뒤에 중국 선양(심양)으로 보내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호남의 제안을 받은 대북 사업가 김○○은 "만약 이런 내용들이 알려지면 국내 민간단체들의 대북 사업이 다 틀어질 수 있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더해 김○○은 "이호남이 최근에도 자신에게 대북 사업 과정에서 돈이 부족하면 쌍방울을 물주로 소개해주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대북 합의서 '공개 체결식' 급했던 쌍방울...최고급 말안장 상납하고 통전부 접촉
쌍방울이 대북 사업 협약식을 맺으면서 북한에 사업 권리금 명목으로 1억 달러를 약속한 사실도 문건에서 확인된다. 또 쌍방울은 태양광 발전이나 내복 지원을 명목상으로 내세웠을 뿐, 북한의 희토류 자원 공동 개발이 협약의 핵심이고, 이를 위해 쌍방울 계열사인 나노스가 2019년 1월에 '광물자원 개발'을 새로운 사업 분야로 추가한 사실도 기재됐다.
2019년 2월 북-미 베트남 정상회담 결렬로 이후의 남북 관계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쌍방울은 "북측과 물밑 접촉을 지속하면서 합의서 공개 체결식을 요청 중인 가운데 금년(2020년) 들어서는 사업 강행 의지도 표출"했다는 게 국정원 문건에서 확인된다.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쌍방울은 북한과 두 차례 맺은 사업 협약서를 통일부에 신고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김성태 회장은 재판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방북할 때 같이 가서 협약식을 공개적으로 체결하려고 했다"고 증언했다. 2019년 당시에 쌍방울은 대북 사업권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협약을 맺었지만, 이를 코스닥 시장에 공개적으로 밝힐 수가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쌍방울 입장에서는 공개적인 '체결식'이 급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국정원 문건에는 당시 쌍방울의 적극적인 대북 구애 행보가 상세히 적혀있다. 방용철 쌍방울 부회장이 2019년 3월 이후 통일부에 신고도 하지 않은 채 북측 인사들을 만난 것, UN 제재를 어기고 북조선 아시아태평양평위원회(아태위)에 최고급 말안장을 전달(11.27.)하고, 북 통전부 주선으로 마카오에서 미상 인물을 접촉(12.9.)한 사실도 국정원은 모두 파악해 보고서에 담았다.
대북 사업가 김○○ "국정원 문건 속 내 발언은 모두 사실"
뉴스타파는 국정원 문건 내용의 진위를 검증했다. 우선 문건에 등장하는 대북 사업가 김○○에게 이호남이 제안했다는 주가조작 수익금 분배에 관한 내용이 사실인지 물었다.
김○○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호남과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절친이고, 그때 내가 이호남을 직접 만난 건 아니고 이호남을 만나고 온 우리 회사 직원이 국정원 문건 내용과 같은 제안을 듣고 와서 나한테 보고했다. 이후에 내가 이호남의 제안을 욕하다시피 하며 거절한 것도 사실이며, 이호남이 내게 쌍방울을 소개해주겠다고 한 것도 사실이다"라면서 "중요한 내용 같아서 그 당시에 이런 내용을 모두 적어서 통일부에 보고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이호남이 혼자 지어내 말한 것이 아니라면, 쌍방울이 북측과 '주가 조작' 혹은 '주가 부양'을 위해 모종의 뒷거래를 했다는 국정원 문건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김성태 회장과 쌍방울 관계자들은 법정에서 "경기도와 이재명 도지사를 위해 800만 달러를 북측에 건넸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자신들의 대북 사업을 위해 건넨 게 아니라는 취지다. 쌍방울을 북한과 이어준 안부수 아태협 회장도 비슷한 진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정원 문건에 따르면, 안부수는 쌍방울 계열사의 이사로 재직하며 쌍방울과 한몸처럼 움직인 사실이 포착된다. 그는 국정원의 자금 지원을 받는 협조자였음에도, 국정원에 쌍방울과 자신의 관계를 숨기다가 발각돼 협조자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정원은 쌍방울이 정부에 신고도 하지 않은 채 불법적으로 북측과 접촉하고, 수시로 UN 제재를 어기는가 하면, 심지어 북측 고위 인사와 주가 조작까지 공모한 정황 등 쌍방울의 일거수 일투족을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번 45개의 국정원 비밀 문건에서 확인된다.
뉴스타파 봉지욱 bong@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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