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70년에 달갑잖은 언행 팩트체크]
최근 조선일보·홍준표 대표 등
“4·3, 남로당 좌익 무장폭동일 뿐”
역사적 사실·생존자 증언과도 ‘배치’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오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선언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3일 제70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제주도민 앞에서 약속했습니다.
같은 날 <조선일보>는 어땠을까요. 김기철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남로당 폭동 떠받드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4·3사건은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위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일으킨 무장폭동으로 시작됐다”며 “피해자가 많았던 것은 남로당 무장대가 산간지역 주민을 방패 삼아 유격전을 펼친 탓”이라고 주장했습니다. 4일에도 “‘남로당의 무장 반란'에서 모든 사태가 비롯됐다”는 주장은 계속됐습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앞줄 맨 오른쪽),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앞줄 가운데) 등 여야 정치인들이 3일 오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를 듣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주장도 비슷합니다. 홍 대표는 3일 추념식 참석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제주 양민들이 무고한 죽음을 당한 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좌익 무장 폭동이 개시된 날이 4월 3일”,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제주 4·3은 공산폭동이라고 말했다”고 썼습니다.
독재정권 아래에서나 했을 법한 ‘4·3 폄훼’가 반복되는 모양새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한겨레21> ‘제주4·3 70년 특집판(제1204호)’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짚어봤습니다. 문 대통령이 말한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사실’이 무엇인지, 생존자들의 목소리로 따져봤습니다.
1. “4월3일은 제주 양민들이 무고한 죽음을 당한 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좌익 무장 폭동이 개시된 날…추념식 다른 날로”
-3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4월3일은 정말 제주 양민들의 ‘무고한 죽음’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걸까요. 또 ‘좌익 무장 폭동’이 개시된 날이기 때문에 추념해선 안 된다는 논리는 성립하는 걸까요.
먼저 4·3의 역사와 사회·경제·정치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2000년 제정된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4·3 특별법)은 4·3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제주 4·3연구소 조사반이 1992년 3월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중산간 다랑쉬오름 주변 동굴에서 발견한 4·3사건 당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검들의 유골. <한겨레> 자료사진
홍준표 대표는 1948년 4월3일 ‘단 하루’에 주목하고 있지만 4·3의 전개과정은 짧게는 1년 전, 길게는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사건의 배경은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 변동이 있었다.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미곡 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미)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3·1 발포사건은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바로 이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다. 경찰 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관공서·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인구 급증과 대흉년이 제주 사회를 사회경제적으로 압박했다면, 경찰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또 다른 의미로 제주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미군정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 수탈에 앞장섰던 경찰과 관리들을 해방 뒤에도 그대로 기용했는데요. 이들과 3·1 발포사건 직후 제주도에 들어온 서북청년단(서청)은 그 폭압적 행태로 4·3의 촉매제 구실을 했습니다.
4·3 직전 잇따라 발생한 경찰의 고문치사 사건도 민심에 불을 지폈습니다. 당시 이인 미군정 검찰총장이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 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고 진단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명이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 ‘단독선거 반대’ 등을 내걸고 경찰지서 12곳과 우익단체 사무실 등을 공격한 1948년 4월3일까지의 상황입니다. 단순히 이날을 ‘좌익 무장 폭동’이 일어난 날로만 단정 지어 말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4·3의 원인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습니다.
항쟁으로서의 성격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양정심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은 “학살에만 초점을 맞추면 제주도민이 역사 속에서 항쟁의 주체로 존재했던 사실을 배제하는 ‘절반의 기억’에 머무르고 만다”고 말했습니다. “학살론을 통해 국가폭력 문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이것만 강조하면 제주도민은 피해자 지위에 머무르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홍 대표는 양민들의 ‘무고한 죽음’을 강조하면서도 누가 가해자인지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2. “남로당이 4·3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다”
-4월4일 <조선일보> 칼럼
남로당을 빼놓고 4·3을 이야기할 순 없습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도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제주사회 긴장 상황을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다”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1948년 8월 해주대회에 참석, 인민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판단된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로당이 4·3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다”는 <조선일보>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먼저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 개편의 과정을 겪었고 4·3은 1948년 여름 한때 소강 국면을 맞기도 했습니다. 1949년 6월7일에는 김달삼의 자리를 이어받은 이덕구 무장대 사령관이 사살됐습니다. 그의 죽음은 사실상 4·3의 종식을 뜻했지만 정부의 탄압은 계속됐습니다.
지금까지 파악된 무장대의 규모도 희생자 수에 비하면 매우 적습니다. <진상조사 보고서>는 “4·3 전 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썼습니다. 4·3 희생자는 최소 1만4232명(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희생자로 결정한 인원·사망자 1만245명, 행방불명자 3575명, 후유장애인 164명, 수형인 248명 등)에서 많게는 3만 명(진상조사 보고서 추정)에 달합니다. 당시 제주도민 10분의 1에 가깝습니다.
제주 4·3을 다룬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사 제공
만약 “남로당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다”고 한다면, 이 많은 희생자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조선일보>는 5일 사설에서 “4·3 사건은 남로당의 무장 폭동을 우리 군경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다수 발생한 사건이다”고 썼습니다. 맞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군경 토벌대 학살에 희생되었습니다. 1948년 10월17일 송요찬 경비대 9연대장은 “해안에서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고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11월17일에는 정부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때부터 1949년 3월까지,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났습니다. 9연대에 이어 제주도에 들어온 2연대의 작전 시기인 1949년 1월17일에는 하루 300여 명이 학살된 이른바 ‘북촌 사건’이 터졌습니다.
3. “피해자가 많았던 것은 남로당 무장대가 산간지역 주민을 방패 삼아 유격전을 펼친 탓이다”
-4월3일 <조선일보> 칼럼
김기철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토벌대의 강경 진압작전 탓도 있지만” 단서를 달면서도 남로당 무장대에 수만 명에 이르는 희생의 책임을 돌렸습니다.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있지만 일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948년 8월2일 경비대가 탈영했던 경비대원 3명을 제주시 근교에서 총살하기 직전의 모습. 당시 경비대 원의 총살은 미군 입회 아 래 집행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먼저 제주4·3사건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입니다. 토벌대가 78.1%, 무장대가 12.6%, 가해 표시를 하지 않은 공란이 9%입니다. 공란을 제외하면 토벌대 86.1%, 무장대가 13.9%입니다. 여기서 토벌대는 군경뿐 아니라, 서청·민보단 등 우익단체도 포함합니다.
다음은 당시 미군 보고서입니다. 1949년 4월1일의 기록입니다.
“제9연대는 모든 주민이 게릴라에 도움과 편의를 주고 있다는 가정 아래 민간인 대량학살 계획을 채택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말도 이와 일치합니다. 이 전 대통령은 국군 제14연대가 4·3 진압을 거부하며 봉기한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23일 ‘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여, 반역적 사상이 만연하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습니다.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는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 하여야…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했습니다.
경고문은 현실이 됐습니다.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3%, 10살 이하 어린이가 5.8%, 61살 이상 노인이 6.1%를 차지합니다. 이 전 대통령의 승인에 따라 1949년 10월2일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249명이 집단처형되기도 했습니다. 학살을 직접 지휘한 송요찬 등 연대장과 미군정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이 전 대통령을 4·3의 최종책임자로 보는 이유입니다.
3일 오전 70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 희생자 표석에서 한 유가족이 고개를 떨군 채 앉아있다. 제주/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두 차례에 걸친 ‘4·3 사건 군법회의’에 의한 피해도 있습니다. 군법회의는 1948년 12월(871명)과 1949년 6월(1659명) 등 모두 253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지만 소송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흘 만에 345명에 사형선고를 내리고 그 시신들은 암매장했습니다. <진상조사 보고서>는 이를 두고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더구나 한국전쟁 기간의 집단학살은 <조선일보>가 말하는 ‘유격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른바 ‘예비검속’이 죽음의 고리가 됐습니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와 입산자 가족 등이 한 번에 수백명씩 바다에 수장되거나 총살됐습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4·3추모공원의 비석에 희생자 이름이 새겨 있다. 왼쪽 3개에 빼곡히 적힌 가시리의 희생자는 420명으로, 표선·성읍·세화·토산 등 다른 4개 리의 전체 희생자(330명)보다 훨씬 많다. 김현대 선임기자
마지막으로 생존자의 이야기입니다. 4·3으로 주민 3분의 1가량인 450명 이상(행방불명자 포함)이 참변을 당한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평생을 산 오국만(86) 할아버지는 “왜 가시리에서 희생이 많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치안이 미치지 못하는 벽지였기 때문이지요. 우리 마을에 경찰지서가 있었다면 그렇게 안 당했을 거예요. 지서가 있던 근처 성읍리는 희생자가 별로 없었거든요. 늘 얼굴 대하는 이웃 사람을 어떻게 참살할 수 있겠어요. 여기는 경찰이 지키러 온다면서 괴롭히기만 했어요. 산에 숨은 이들한테 식량을 줬다느니 하면서 마구 두들겨 패니, 경찰이 온다 하면 젊은이들이 무조건 산으로 도망갔어요. 누가 경찰을 좋아했겠어요. 우리 세 형님도 전혀 무학이에요. 좌익사상, 그런 것 몰라요. 국민학교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4. “4·3 사건에 대해 제주도 밖에서 합당한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은 제주도민 간의 갈등 때문이다”
-4월4일 <조선일보> 칼럼
4·3의 조직적 진상규명과 전국적 관심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거꾸로 말해, 민주화 이전 독재정권 아래에서 긴 침묵이 강요됐다는 뜻입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제주, 거창, 함양, 남원, 영암 등지의 양민학살 사건 진상규명 논의가 이뤄졌지만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좌절됐습니다. 1978년 ‘북촌사건’을 그린 <순이삼촌>을 발표한 현기영 작가는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순이삼촌>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됐습니다.
<조선일보>가 말하는 제주도민 간의 갈등은 이미 해소된 것이기도 합니다. 2013년 4·3 유족회와 제주경우회는 ‘조건없는 화해’를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은 3일 추념사에서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화해와 용서로 이념이 만든 비극을 이겨냈습니다. (중략)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고 당부했습니다.
5.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제주4·3은 공산폭동이라고 말했다”
-4월3일 홍준표 대표
홍준표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이 “1998. CNN과 인터뷰 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정확하게는 1998년 11월23일 미국 언론 <시엔엔>(CNN)과의 회담입니다. 회담 내용은 ‘김대중 사이버 기념관’에 고스란히 올려져 있습니다. 다음은 홍 대표가 주장한 부분이 언급된 문답의 전문입니다.
-질문: 한국과 미국 정부는 1948년 제주 4·3 사태에 대한 진상은 서로 언제 공개할 방침입니까?
-대통령: 제주 문제가 국회에 청원되어 있습니다. 정부로서는 과거의 억울한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문제는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해서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김 전 대통령의 답변은 홍 대표의 말처럼 ‘공산폭동’에 방점이 찍힌 게 아닙니다. 오히려 김 전 대통령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며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다짐했습니다. 그럼에도 홍 대표는 답변 앞뒤를 자르고 자신의 편의대로 해석한 셈입니다.
70년 전 한신화 할머니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감옥에서 1년을 살았고, 고아원에 보내졌다는 4살 아들 양봉선을 영영 잃었다. 아들이 그리울 때마다 한라산을 바라보며 애끓는 노래를 부른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우리 양봉선이 양봉선아, 날 찾아오라. 한라산에 눈이 내렸구나, 날 찾아오라.”
제주 중산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사는 한신화(98) 할머니는 스물여덟 살이 되던 1948년, 4살 아들 양봉선을 영영 잃어버렸습니다.
서귀포경찰서에 무작정 끌려간 뒤 장작으로 후려맞고, 대롱대롱 매달린 끝에 육지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였습니다. 죄명을 묻자 할머니는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주장과 주의가 할머니의 말을 앞설 수 있을까요. 문 대통령이 말한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사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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