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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anuary 29, 2012

영화 <부러진 화살>과 사법개혁


영화 <부러진 화살>과 사법개혁(서프라이즈 / 느릅나무 / 2012-01-30)

영화 <부러진 화살>을 두고 세상의 말들이 헛돌고 있다. 법원은 영화가 김명호 교수의 재판 사실과 다르다고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고 나섰다. 정지석 변호사는 <오마이뉴스>에 쓴 글에서 이 영화가 김명호 교수의 일방적 주장을 받아들여 사법부를 향해 화살을 겨누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한다. 그는 말한다.

“영화의 초점은 과연 교수가 부장판사를 향해서 석궁을 쏘았는지, 부장판사는 석궁에 직접 맞은 것인지에 대해서, 부장판사가 재판에서 위증이나 증거조작을 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그리고 재판을 담당한 법원이 교수나 변호인의 정당한 증거신청을 부당하게 배척하고 편파적인 재판을 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내 눈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재판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담당 재판장이나 판사 개인에 대한 테러를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교수의 말대로 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위협만 하려고 했다고 해도 과연 그것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에 맞추어져 있었다. 영화를 본 지 벌써 3주가 지났고, 영화가 개봉 5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하는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나의 이러한 의문은 점점 걱정으로 변해갔다”


사실은 늘 단순하다. 말이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말에 의해 감추어지는 것이다. 정 변호사가 말하는 테러에 사용된 부러진 화살은 없어졌다. 이 감추어진 사실을 영화가 드러냈을 뿐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 있기는 있었지만 눈 밝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거나 눈에 띄었어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외면했던 불편한 사실이다. 그 불편한 사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울음으로 분노로 속으로 억눌러 왔다. 그것을 수학자의 독특한 영혼이 세상에 까발렸다.

정지석 변호사는 김명호 교수가 박홍우 판사를 찾아간 일을 (사법) 테러로 단정하고 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아닌가. 영화는 김명호 교수의 사건과 관련하여 법원에서 두 번이나 공식 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사건을 ‘사법 테러’로 간주하고 엄단할 것을 예단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한 번은 1심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또 한 번은 2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나는 묻는다. 테러는 김명호 교수가 한 것이 아니라 사법부가 한 것이 아니냐고. 그리고 당신들이 정말 법을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 분명하냐고. 근대 사회의 법은 국가 폭력으로부터 개인을 해방하는 싸움이 바로 법의 역사였다는 것을 법을 다루는 자들은 너무나 잘 알 것이다. 그래서 99명의 범죄자를 가려내는 일보다 한 사람의 억울한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른 바 민주사회를 관통하는 법의 정의라는 것을.

영화에서 김명호 교수는 법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문화되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법이 법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에 그는 질문하고, 항의하고, 고발한다. 그러나 법원은 마치 중세의 교회가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은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다며 절대 권능을 행사했듯이, 법대로 해달라는 김 교수의 요청을 법원의 권능으로 묵살한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진정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안쪽이 아닐까.
다시 정지석 변호사의 말을 들어보자. 좀 길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담당 재판장이나 판사, 다시 말해서 ‘법원’에 대한 테러를 용인한다면, 그것이 비록 교수의 ‘의도’대로 단순한 협박에 불과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건강한 법원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SNS를 통해서 드러나는 판사 개인들의 성향이나 전력에 대한 보수언론들의 막가파식 테러로부터 우리의 건강한 법원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이렇게 볼 때 영화 <부러진 화살>로 교수가 쏜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최후의 보루인 ‘법원’ 그 자체인 것이다. 일부 잘못된 ‘법원’이 부당한 재판을 한다고 해서 ‘법원’에 대해 화살을 쏜다면, 그와 함께 건강한 ‘법원’도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어떤 법원이라도 당사자나 권력의 부당한 압력이나 협박에 ‘쫄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법원’을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점에서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교수의 그러한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감독도 이 점에서는 교수와 시선을 달리했어야 옳다. 그리고 대다수 관객의 바람과 같이 이 영화가 제2의 도가니가 되어 사법개혁의 도화선이 되기 위해서는, 법원 그 자체에 대한 테러에 대해서는 일반 형사범에 비해 가중처벌하는 법 개정도 반드시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해본다. 우리에게는 ‘정당한 재판진행’ 못지않게 ‘법원의 독립’ 또한 잃어서는 안 될 소중한 헌법적 가치이자 제도이기 때문이다”
아하, 김명호는 ‘우리 사회의 최후의 보루인 법원’을 향해 테러를 한 범법자이기 때문에 그가 요청하는 ‘법대로’에 앞서 ‘가중 처벌’이 되어야 하는 자였던 거다. 나는 또 묻는다. ‘일부 잘못된 법원이 부당한 재판을 한’ 결과로 개인의 삶을 파멸시켰던 그 법원이 어떤 가중 처벌을 받았는지. 인혁당 재판은 말할 것도 없고, 성고문을 받은 권인숙 씨를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했다며 감옥에 가두었던 법원. 그 법원은 어떤 가중 처벌을 받았느냐고. 아니 가중 처벌이 아니라 어떤 불이익을 받았느냐고.

나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다.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을 무죄로 판결한 법원을 건강한 법원이라고 말하는 정 변호사에게. 정 사장 사건은 무죄가 아니라 ‘항고 기각’ 또는 ‘상고 기각’를 했어야 그나마 법원이 정당한 재판을 했다는 평가받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법원이 판단한 사안을 가지고 다시 3년이라는 세월을 재판에 매달렸던 당사자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그리고 자신들이 판단한 사실을 3년 동안 주물럭거린 끝에 법원은 단지 ‘무죄’라고만 했다.

그런데 그는 이제 그 무죄를 가지고 한국방송으로 돌아갈 수 없다. 더구나 그 무죄를 가지고 이제부터 그는 그동안 입은 경제적 피해 따위에 대한 소송을 ‘시작해야’ 한다. 또 3년이라는 세월이 걸릴지도 모른다. 법에 따른다는 일은 이처럼 우울하고 허무하다. <한낮의 우울>의 저자 앤드류 솔로몬은 “우울은 우리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악마다”라고 쓰고 있다(<한낮의 우울>, 민음사. 25쪽). 그 악마가 그의 앞길을 동행하고자 기다리고 있다. 법으로 사는 세상은 이처럼 끔찍하다.

지난 3년 동안, 검사의 표독스러운 말은 그의 살과 영혼을 찔러댔고, 그의 살을 찢으며 날아간 말들은 다시 올드 언론에 의해 창이 되고 칼이 되어 그의 살과 영혼을 무참하게 찔러댔다. 그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한 채 그는 3년을 견디어야 했다. 그냥 견디어야 했다. 사법 테러범이 되지 않으려면. 그러나 나는 그를 무죄로 선고한 1심, 2심, 그리고 대법원 재판부가 그를 기소한 검사를 공소 남용으로 고발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김명호 교수가 테러범이라면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을 기소한 검사는 더 교활하고 더 잔혹한 테러범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사법개혁이라는 말은 주로 검찰개혁과 동일한 의미로 유통되었다. 그런데 <부러진 화살>은 사법개혁이 검찰만이 아니라 법원의 통절한 자기반성과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진정한 사법개혁은 정 변호사가 말하는 법원의 판결을 불신하는 자에 대한 가중 처벌이 아니라 잘못된 재판으로 개인의 삶을 파괴한 재판부에 대한 가중 처벌이 선행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어지러운 말들에 가려 있던 이 단순한 사실을 <부러진 화살>이 드러냈다.

그래서 나는 재심 결과로 당초의 판결이 번복되는 조작 간첩 사건 같은 경우, 그 사건을 재판한 재판부에 대한 ‘가중 처벌’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가중 처벌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당시 재판부의 사죄와 그 재판부에 대한 적절한 징치가 있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야만 국민이 <민족일보> 사법 살인에 참여한 판사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테러를 당하여 허둥대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다면 정지석 변호사가 말하는 ‘소중한 헌법적 가치인 법원의 독립’이 어떻게 진정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아, 그렇다 해도 나는 여전히 뭔가 허전하기만 하다.


그렇다, 정지석 변호사는 김명호 교수의 행위를 ‘테러’라는 表意로 표현했다. 법원이 그러했듯이 ‘법의 질서’로 <부러진 화살>을 조망하면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법을 다루는 자들이 이처럼 무례하게 인간을 대하는 한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받기는 아득히 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법원’은 아득히 높은 곳에 있어서 권위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낮은 세상에서 거름이 될 때 저절로 권위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거름은 아무것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먹고 배설한 똥이 시간과 함께 익어서 거름이 되고 거름은 다시 생명을 키워내고, 그 생명을 먹은 인간은 또 배설하며 순환을 이어간다. 똥이 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똥통에서 오랫동안 숙성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썩지 않은 똥은 거름이 되지 못한다.

영화 <부러진 화살>은 제대로 썩은 똥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인간을 법의 위세로 대하는 법원은 그의 몸을 4년이나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의 영혼을 법원의 뜻대로 교화할 수는 없었다. 아니, 인간의 영혼은 원래 가두어질 수 있거나 교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영화는 말한다. 인간은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존재가 아니라고, ‘감치’로 법정의 권위를 세우는 사회는 아름다운 사회가 아니라고, 제대로 썩지 않은 똥은 거름이 될 수 없다고.

그러니 ‘교화’를 위해 면회를 제한한다는 정봉주 전 의원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 법원이 인간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부러진 화살>이 사법개혁을 촉구하고, 그 개혁이 법을 다루는 자들의 헛도는 말이 아니라 법을 몸으로 받는 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느릅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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