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Click map below !!)

Turkey Branch Office : Europe & Middle East (Click map below !!)

Mobile Phone Cases (Click photo here !)

Mobile Phone Cases (Click photo here !)
Mobile Phone Cases

Friday, February 3, 2012

최필립 “자꾸 이러면 부산일보 팔아버린다”


[토요판] 정수장학회 이사장…박근혜 27살 때 영애비서관으로 첫 인연
박정희 전 대통령 가리켜 ‘임금님’이라 표현…“장학회 운영은 아주 투명”

정수장학회 털고 가라고?
정신없거나 모자라는 주장들
그런 사람들 한나라당 나가야
부산일보가 안되는 건
편집권이 독립돼 있기 때문
그러니 10대 일간지에 못 끼지
 
 최필립(84)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누가 뭐래도 박근혜 새누리당(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사람이다. 1978년 청와대에서 50살의 나이로 27살의 ‘큰 영애님’ 시절의 박 위원장을 처음 만났다. 이듬해 10·26 사태가 벌어진 뒤 그의 곁을 지킨 유일한 비서관이기도 하다. 최 이사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너무 불쌍해 만나면 눈물밖에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34년 전 박 위원장 뒤에서 비서 겸 멘토 구실을 성실히 수행했던 최 이사장이 이번에는 그를 대신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박 위원장을 향한 시민·언론단체의 정수장학회 사회환원 요구에 대해 최 이사장은 “박 위원장은 장학회와 법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며 선을 그었다. 그는 지난달 4일부터 지난 1일까지 <한겨레>와 한 세 차례의 인터뷰에서 장학회 이사진 교체 및 선임절차 개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다. 인터뷰 마지막 대목에서는 현재 편집권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는 <부산일보>의 직장폐쇄 및 매각 가능성도 수차례 내비쳤다.

최 위원장은 1957년 미국 캘리포니아대를 졸업한 뒤 1960년 11월 민주당 정권에서 ‘청부 촉탁직’으로 외무부 생활을 시작했다. 최 위원장은 “청부가 청소부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고 격분했는데, 1961년 5·16이 터진 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곧바로 주사로 승진했다”고 말했다. 그해 7월에는 외무부 초대 대변인(공무관)을 맡았으니, 9개월 만에 청소부로 들어온 외무부의 입으로 승진한 것이다. 자신을 큰 영애 담당 비서관으로 앉힌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리켜 그는 ‘임금님’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건물 11층에 있는 정수장학회 이사장실에서는 박 전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씨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언제 처음 만났나?
 “청와대에서 의전비서관을 거쳐 막 섭외비서관으로 옮긴 1978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늦은 밤 집무실로 불러 ‘큰애 주변이 좀 시끄러운데, 자네면 잘할 거야’라며 큰 영애(박근혜 위원장) 담당 공보비서관을 맡겼다. ‘나가봐’라는 말을 듣고 얼결에 집무실을 나서니 큰 영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 10·26 사태가 벌어질 때까지 1년을 모셨다.”
 -뭐가 시끄러웠나?
 “큰 영애가 ‘가짜 목사’인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와 지나치게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청와대 안팎에 파다했다. 박 대통령이 권력투쟁 양상을 보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과 큰 영애 및 최태민 목사 등을 모두 불러 ‘친국’을 벌일 정도였으니까.”
 
 언론인들에게 뿌리던 옷감과 15만원
 -10·26으로 청와대를 나온 뒤에도 인연이 이어졌다.
 “정승집 개가 죽는 것과 정승이 죽는 것과 다르다는 말이 꼭 그랬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식장에서) 밤새는 사람도 많고 대단했는데 박 대통령이 죽은 다음에는 밤새는 사람 한 명이 없었다. 장례식 다 끝나고 청와대를 나와 박 대통령이 원래 살던 서울 신당동의 스물 몇 평짜리 집으로 여자 둘만 돌아가는데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당시 내가 바레인 대사로 발령받은 상황이었지만, 신당동 따라가서 ‘1급 비서관으로 임금님 머슴도 하고 큰 영애님 비서도 했으니 할 거 다 했습니다. 이제 대사는 그만두고 제가 계속해서 모실게요’ 했다.”

 -결국 대사로 나갔는데.
 “이 양반이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다음 많은 사람이 인사를 잘못해서(사람을 잘못 써서) 이렇게 됐다고 하는데 대사 일 잘하셔서 아버지 옆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는 걸 보여주세요’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제가 필요하시면 아무 때라도 부르세요. 언제든지 그만두고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나갔는데, 언젠가는 큰일 한번 하실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박 대통령에 대한 존경이다. 박 대통령은 신발 밑창이 닳으면 고무창을 덧대어 신을 정도로 검소한 지도자였다. 자신은 국산 양복 아니면 입지 않았다. 어쩌다 영국제 옷감이 들어오면 큰 영애가 옷감에 현금 15만원씩 보태 박 대통령과 가까운 언론인에게 나눠줬다.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도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덕분이다. 그분 후손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한히 돕고 싶었다.”
 -2001년 박 위원장이 만든 한국미래연합 운영위원을 맡았다.
 “대사직을 맡은 뒤에도 나가고 들어올 때 꼭 인사를 갔다. 1993년 리비아 대사를 끝으로 정년퇴직한 뒤였는데 난데없이 자기 좀 도와달라고 해서 뭔지도 모르고 가봤더니 그게 미래연합이었다. 그러다 박 위원장이 다시 한나라당으로 복당할 때 나는 정치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빠졌다.”
 -2005년 이사장을 맡기 전 정수장학회에 대해 알고 있었나?
 “청와대 있었을 때 박 위원장이 한 달에 한 번씩 출입기자들과 테니스를 쳤다. 그때 부산일보 송아무개 기자가 있었는데 그가 나중에 부산일보 사장이 됐다. 배경을 알아보니 부산일보가 청와대 것이고, 송 기자가 청와대 출입 경력 덕분에 사장이 됐다고 들었다. 그때 갖고 있으려면 제대로 갖고 있지 왜 저렇게(재단법인 형태로) 가지고 있을까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다.”
 -이사장직을 맡을 때 박 위원장의 권유가 있었나?
 “아니었다. 하루는 정수장학회 총무이사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미래연합 시절 (재단과 미래연합 사이에서) 심부름 다닌 사람이었다. 만나봤더니 이사장을 맡아달라는 이야기였다. 누구 결정이냐고 물었더니 이사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며 ‘대사님이 지금 이사장님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일 테니 누구보다 적임자 아니겠습니까’라고 하길래 수락했다.”
 
 ‘정수’ 이름 포기는 있을 수 없어 
 -비슷한 것 같다. 박 전 대통령이 재단을 사유화했기에 그 딸인 박 위원장이 10년간 이사장을 맡았고, 그 뒤에도 계속 측근이 재단을 이끌고 있다는 비판적 관점에서 본다면.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면 노무현재단 문재인 이사장은 뭔가, 아태평화재단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 인사가 이사로 있는 것은 또 뭔가. 모시던 사람을 계속 뒷바라지하거나 받들어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노무현재단이나 아태평화재단은 학술재단 성격이고, 정수장학회는 언론사 지분을 갖고 있는 장학재단이다. 목적사업과 자산 규모가 다르다.
 “목적사업은 달라도 국가와 사회를 위한 인재 양성이라는 목표는 같은 거 아닌가. 자산도 모두 공개하고 있다.”
 -정수장학회의 기본재산인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주식도 원래는 장학회 소유가 아니었다.
 “원 소유자였던 김지태씨는 1961년 5·16 당시 부정축재와 반혁명, 보석밀수 등으로 걸려 구속된 인물이다. 자기가 살아야 하니까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재산을 내놓은 것이다. 게다가 당시 부산일보는 자산보다 부채가 3배나 많았고, 라디오도 생산하지 못할 때라 <문화방송>(MBC)도 값어치가 거의 없었다. 최고회의가 받지 않으려는 것을 박 대통령이 ‘맡아줘라’ 해서 할 수 없이 받은 것이다. 그때 장학회가 맡지 않았으면 이만큼 크지도 못했다.”
 -밀수를 했으면 밀수 혐의로 처벌해야지 왜 재산을 받고 풀어주나?
 “그게, 당시 김씨 밑에서 부산일보 주필을 하던 황용주라는 인물이 있었다. 박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기동창이었는데, 그가 ‘김씨를 풀어주는 대가로 부산일보 받아놓으면 내가 나중에 사장도 할 수 있다’며 박 대통령을 설득한 결과였다.”
 -김씨 유족이 부산일보 및 문화방송 주식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금의 장학회 이름에 김씨의 호인 ‘자명’을 함께 써달라는 것이 유족 주장이다.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 장학회 이름이 바뀌면 존재해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감이 안 좋다는 이유로 5·16장학회의 이름을 바꾸라고 해 정수장학회가 된 것인데, ‘정수’는 그래도 의미가 있다. 다시 ‘정수’장학회를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폐쇄적인 재단 이사진 선임 절차를 좀더 투명하게 바꾸자는 요구도 받아들일 수 없나?
 “투명하고 아니고의 기준이 뭔가.”
 -당신은 박 위원장 사람이다. 박 위원장 측근이나 김지태씨 유족이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의 추천을 받은 인물로 이사진을 꾸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있을 수가 없다. 장학회 운영이 투명하지 않다면 모르겠지만 천지신명에게 고하더라도 불투명한 건 하나도 없다. 박 위원장과 개인적 관계가 있다고 이사장 할 수 없다는 건 논리가 안 되는 것 아닌가.”
 -장학회가 임명한 부산일보 전임 사장은 지난해 11월30일 장학회 사회환원의 필요성을 다룬 기사가 실린다는 이유로 윤전기를 세웠다. 편집권 침해의 대표적 사례라는 지적이 있다.
 “부산일보가 안되는 이유가 편집권이 독립돼 있기 때문이다. 광고 팔아서 먹고사는 게 신문인데 광고와 관계없이 편집국장 마음대로 내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5대 일간지로 불리던 부산일보가 이제는 10대 일간지에도 못 낀다. 광고가 팔릴 턱이 없다. 그러면서도 편집권 내놓아라, 사장 나가라 이러면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직장폐쇄다. 올해 만약 대규모 적자가 발생하고 앞으로도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면 팔아버리는 수밖에 없다.”
 
 박 위원장에 영향, 그것만 생각하면 잠이 안와 
 -매각이라니, 개인적 판단인가?
 “이사들 모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박 위원장과도 부산일보 사태에 관해 논의해봤나?
 “본인도 답답할 것 같아 한달 전부터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않았다.”
 -부산일보 사태가 장기화되면 박 위원장에게도 유리하지 않은 것 아닌가?
 “박 위원장에게 영향은 있을 텐데, 그것만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온다. 하지만 장학회는 ‘저 양반’과 법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다. 자기 아버지가 설립한 것인 만큼 미련은 있겠지. 나 역시 그래서 살아있는 한 이걸 지켜줄 의무가 있다. 정치논리에 휘말려 장학회를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내가 있는 이상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당 일각에서도 박 위원장이 정수장학회 털고 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정신이 없거나 모자라는 사람들이다.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이 한나라당을 나가야 한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취재후기 
 인터뷰를 모두 마친 뒤 최필립 이사장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부산일보 노조로부터 ‘박근혜 하수인’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재단 이사장직을 못 버리는 이유는 뭡니까.” 최 이사장은 “충성”을 강조했다. 그때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간미 등에 대한 긴 찬사가 시작됐다. 꼬박 30분간, 화장실까지 참으며 모두 들어야 했다. 그는 “그분이 남기고 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든 지켜드리고 싶은 것”이라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