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굴삭기 몰고 서초동 대검청사 돌진
'상고 포기' 징역 2년 확정..정읍교도소 수감
선후배 면회 줄이어.."원래 심성 착한 사람"
"방법 부적절했지만 분노엔 공감" 탄원서도
굴삭기는 임실서 막내가 할부금 내주며 보관
막내 "재산 없는 형, 출소 후 살림 밑천 되길"
나는 굴삭기다. 정확히 말하면 지지리도 재수 없는 굴삭기다. 굴착기나 포클레인으로도 불린다.
지난해 11월 1일 오전 8시30분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한복판에서다. 이날 주인 양반은 나를 몰고 대검 청사로 돌진했다. 시설물을 부수고 이를 말리던 방호원까지 다치게 했다. 나도 자의(自意)는 아니었지만 공범(共犯)인 셈이다.
대한민국 공권력의 심장부를 타격한 우리 주인은 '괴물'일까. 이력만 보면 평범한 소시민에 가깝다. 전북 임실군 강진면이 고향인 주인은 3남3녀 중 다섯째다. 위로 줄줄이 누나 셋이 있고, 그 아래 아들 삼형제 가운데 둘째다. 중학교까지는 임실에서 다니고 순창에서 농고를 졸업했다. 군대는 향토사단에서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굴삭기를 몰았으니 중장비 경력만 20년이 넘는다. 막내(44)까지 정씨 삼형제가 굴삭기 기사가 된 것도 주인 양반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고향 주민들도 주인 양반의 '돌출 행동'에 적잖이 놀랐다. 당시 서정준(65) 갈담리 이장은 "(정씨가) 어렵게 살아 왔어요. 투쟁가도 아니고 그저 외로운 사람이오. 굴삭기 갖고 제주도나 강원도로 일 다니고 그랬지. 열심히 살려고 돈 버나 했는데 비보를 들으니 가슴이 아프네"라고 말했다.
앞서 주인의 고향인 전북 임실을 중심으로 모금 및 탄원 운동이 있었다. 파손된 대검 시설물 변제금 1억5000만원과 방호원 치료비 등을 물어야 하는 주인을 돕기 위해서다. 약 1500만원이 모였고, 4000여 명이 '정씨를 선처해 달라'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이들은 "정씨의 행동은 부적절했지만 그가 표출한 분노에는 공감한다"고 입을 모았다.
주인 양반의 1·2심 변론을 맡은 이덕춘 변호사는 "정씨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지만 검찰이 '최순실 사건'을 제대로 수사했다면 과연 이런 극단적 선택을 했을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그는 "국정 농단 사태에 저항한 민간인 가운데 구속된 사람은 정씨가 유일하다"고도 했다. 실제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내 대다수 언론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촛불이 타오른 6개월 동안 단 한 차례의 폭력 시위나 구속자는 없었다"고 보도했다.
주인의 막내 동생은 7월 말쯤 주인 양반의 친구와 함께 교도소로 면회를 다녀왔다. 주인에게서 굴삭기를 배운 막내는 지난해 결혼해 올해 딸도 낳았다. 20여분간 면회하는 동안 우리 주인은 특별히 지난 사건에 대한 심경을 밝히지는 않았다. 다만 1심이 끝나고 항소한 일에 대해서는 후회했다.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자책감에서다.
막내는 "둘째 형은 굴삭기로 벌목을 시작한 초창기 멤버로 전국에서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기술이 좋다"고 했다. 굴삭기를 운전하는 사람들도 경사가 70도 넘는 산비탈에서 작업하는 건 위험하다는 것이다. 자칫 장비가 뒤집혀 구를 수도 있어서다.
그래서일까. 가족보다 주인 양반 친구와 선후배들이 교도소를 더 자주 찾는다고 한다. 대부분 사정이 어려울 때 주인이 금전적으로 도와주거나 굴삭기 기술을 전수한 이들이다. 주인은 수년 전 '중고 기계'인 나를 2000만원에 할부로 샀다. 나도 새것일 때는 5500만원이었다. 전에는 주인 양반이 매달 40만원씩 할부금을 갚다 사건 이후 중단됐다. 할부금이 400만원가량 남았는데 제2금융기관에서 '채무 상환' 독촉장이 날아오자 지금은 막내가 대신 내고 있다. 막내는 "형이 따로 모아 놓은 재산이 없어요. 출소해도 변제금 갚을 일이 막막하죠. 그래도 굴삭기라도 있으면 뭐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상고 포기' 징역 2년 확정..정읍교도소 수감
선후배 면회 줄이어.."원래 심성 착한 사람"
"방법 부적절했지만 분노엔 공감" 탄원서도
굴삭기는 임실서 막내가 할부금 내주며 보관
막내 "재산 없는 형, 출소 후 살림 밑천 되길"
[사건추적]최순실에 분노해 대검 돌진한 굴삭기 기사 지금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전북 임실군 강진면의 한 다리 밑 공터다. 한창 공사장을 누비며 땅을 파거나 산에서 벤 나무를 옮겨야 할 몸이 5t 화물차 위에서 옴짝달싹 못 한 채 녹슬어가고 있다.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다. 내 주인은 올해 만으로 46살인 노총각 정모씨다. 뭔가에 홀려 갈팡질팡 헤매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을 넘긴 양반이 나를 앞세워 난동을 피운 것이다. 더구나 '정의의 칼'을 휘두르는 신성한 공권력에 대들었다.
당초 주인이 공격하려 한 표적은 최순실씨였다. 당시 '대한민국 서열 1위'인 박근혜 대통령 뒤에 숨어 국정을 농단한 여성이다. 지금이야 한국에서 그 이름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유명 인사지만, 1년 전만 해도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던 인물이다.
현장에서 테이저건을 맞고 붙잡힌 주인은 경찰에서 "(범행) 전날 최순실이 검찰에 출두하면서 '국민들께 죽을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죽는 것을 도와주러 왔다"고 말했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당시 최씨의 분탕질에 속앓이만 하던 국민 일부는 주인 양반을 '굴삭기(포클레인) 열사'라 부르며 지지하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사건이 터진 날 오후 중앙일보 기자가 무작정 임실을 찾아가 만난 큰형(48)은 "삼형제 모두 고졸인데 동생이 먼저 굴삭기 기술을 배워서 알려줬다"고 했다. 큰형은 "동생(정씨)은 머리가 이상하지도 않고, 술 먹고 남을 때리는 주폭도 아니다. 오히려 평소 손해를 보면서 양보하는 성격"이라며 동생을 감쌌다.
하지만 현행법을 어긴 주인은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그리고 지난 3월 3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 황병헌)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한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이날 같은 법원 321호 법정에서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이 열렸다. 주인 양반은 같은 층 311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날 박 전 대통령은 구속됐고, 주인 양반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정씨가 범행을 자백했고 국민참여재판 배심원이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려 실형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주인은 이날 피고인 최후 진술에서 "저희는 하루하루 목숨 걸고 일하고 있는데 최순실씨는 법을 어겨가며 호의호식하는 걸 보고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와중에 다친 분(방호원)이 있는데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 제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건지 광화문 촛불집회를 보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고 반성했다.
우리 주인은 항소했지만 지난 6월 23일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기각됐다. 대법원 상고는 포기했다. 1심대로 징역 2년이 최종 확정됐다. 항소심까지 서울구치소에서 생활하던 주인은 지난 7월 전북 정읍교도소로 이감됐다. 고향인 임실 강진면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다.
1년 전 사건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렇다. 애초 주인은 사건 전날까지 전북 순창에 있었다. 농고 동창이 하는 축사에서 소똥 치우는 일을 도왔다. 자기 분신(分身)인 내 몸에 속칭 '바가지'를 달고서다. 그리고 닷새 뒤 제주도로 갈 계획이었다. 소나무재선충병 방제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내 몸에 '우드그랩'이라 불리는 나무집게를 장착하고 벌목한 고사목들을 산 아래로 옮기는 일이다.
사건 전날 주인 양반은 독일로 잠적한 지 두 달 만에 검찰에 출두한 최순실씨를 보고 분기탱천(憤氣撐天)했다. 제주도로 가야 할 나를 데리고 상경해 대검으로 돌진한 배경이다. 가족들은 당시 뉴스를 보면서도 주인 양반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그 '굴삭기 기사'인 줄 전혀 몰랐다. 막내는 "그때 놀란 심정은 가족밖에 모른다"고 했다. 가족들은 여전히 주인 양반이 미덥지가 않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친구나 선후배들에게는 간·쓸개 다 빼주는 스타일이라고….
우리 주인은 임실 고향 집에 1년에 한두 번 갔다. 주소지는 큰형이 사는 고향 집으로 돼 있지만 일하는 지역에 따라 원룸 등을 전전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주인의 '떠돌이 생활'도 잠시 유예됐다. 이 양반이 죗값을 모두 치르는 내년 11월은 초겨울이다. 교도소를 나서는 그날이 오면 우리 주인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돼 있을 터. 그때 나는 기꺼이 내 녹슨 몸을 움직이리라. 우리 주인이 '굴삭기 기사'인 큰형과 막내 동생처럼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밑천이 되고 싶다.
임실·정읍=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본 기사는 굴삭기 기사 정모(46)씨의 가족과 정씨를 변론한 이덕춘 변호사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굴삭기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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