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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September 9, 2011

안철수 돌풍 소감(1)

안철수 돌풍 소감(1)한국식 정당 정치와 양대 정당에 대한 Red Card
(사회디자인연구소 / 김대호 / 2011-09-09)

5년의 간극 - 통탄에서 희망으로
솔직히 내가 4~5년 전에 안철수 돌풍을 접했다면 한국 사회의 부박함을 통탄하고 착잡한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정당 정치와 정치·행정 경험이 개무시 당하는 상황을 심히 우려하며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혁신’을 화두로 삼아 5년여를 여의도 바닥에서 구르면서 철이 들어서인지 ‘안풍’은 정치 변화를 갈망하는 민심의 자연스런 반영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매우 희망적, 고무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나에게 ‘안풍’은 지긋지긋한 장마철에 잠깐 나타난 파아란 하늘이다. 끝도 없을 것 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 아침에 잠깐 맛본 선선하고 상쾌한 가을바람이다.
정치 콘텐츠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아예 이것으로 밥벌이까지 하는 프로 작가(?) 내지 정도전 류의 경세가(?)가 되어보겠다고 여의도에 사회디자인연구소(당시는 주식회사)를 연 2006년 9월부터 문국현 돌풍이 몰아친 2007년 가을까지, 나는 정당에서 훈련되지도 않았고, 선거나 청문회를 통해서 검증되지 않은 기업인, 시민운동가, 교수 출신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국가경영의 비전, 전략, 정책을 묻지 않는 이미지 정치가 싫었고, (정치는 세력과 조직인데) 인물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정치 풍토가 싫었다. 큰 정치는 사자의 심장, 여우의 두뇌, 독수리의 눈, 얼굴 성형의사의 섬세한 손길 등이 필요한 상당한 전문분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까운 지인들이 문국현에게 가자고 강권했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한국에서 크고 복잡한 조직을 운영한 행정 경험이나 기업 경험은 어느 정도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지만, 한국식 정당 정치는 별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는 내 개인의 시각이기 이전에 대중의 시각일 것이다. 한국의 정당정치는 불합리한 선거제도, 공천제도, 정당법, 부실한 정당 조직기반, 후진적 정치문화와 뒤틀린 언론, 피폐한 정치생태계 등이 합작하여 만든 정치적 독과점 체제에다가 (저들의 후진성이 나의 존재 이유가 되는) 적대적 상호의존 체제여서 정치 품질을 혁신할 이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지 정치도 사필귀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치가 가치, 비전, 정책의 정치를 보여주지 않고, 언론 역시 이를 교정하기는커녕 증폭하는 상황에서는 대중은 그가 살아온 이력과 이룩한 성과를 보고 능력과 노선을 짐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중의 시각에서 안철수 인생을 개괄하면 정말 매력이 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대(시장)가 요구하는 상품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 창업을 했고, 탁월한 창의, 열정, 경영 능력을 발휘해서 영혼이 있는 기업(한 때 500명)을 만들었다. 그 이후 기업과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많은 벤처기업인의 로망인, 기업 가치를 높여 큰 회사에 팔아서 일확천금을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마다했다. 또한 매체를 통하여, 주로 한국 산업과 기업(특히 중소기업과 IT분야)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정책 제언을 많이 했고, 그 말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이런 인생 역정과 발언과 활동이 큰 감동, 작은 공감을 쌓아 이번에 서울시장 관련 여론 조사를 통해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기존 보수, 진보 정치가 지지리도 못났기 때문에 안철수에게 확 쏠린 것이다.
물론 정치권 바깥에는 안철수보다 훨씬 오랫동안 치열하게 공적 가치 -노동, 빈민, 복지, 세금혁명, 교통, 생태환경, 다문화, 북한동포, 해외동포, 정당 민주화, 지역주의 타파 등- 를 추구해 온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박원순이나 내가 인생을 걸고 추구하는 가치도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정말 ‘안풍’에 대해 샘을 내도 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특히 기업인 중에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그러나 가수가 열창하는 모든 노래가 다 청중을 열광케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 공간, 청중의 특성에 따라 폭발적으로 감동하는 노래가 있는 법이다. 2002년의 노무현 바람도, 2007년의 이명박에 대한 열광도, 박근혜에 대한 기대도, 안철수 바람도, 여름에 부는 태풍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비하거나 활용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일 것이다. 나는 ‘안풍’으로 희망을 만들고 싶다. 안철수 앞세워 ‘정치 투기’ 내지 ‘정치 벤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 ‘안풍’을 만든 에너지 원인 대중의 열망 혹은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나는 이 일을 오래전부터 해 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낸 책들은 그 발자국이다. ‘한 386의 사상혁명(2004)’ ‘진보와 보수를 넘어(2007)’ ‘희망한국 프로젝트(2007)’ ‘노무현 이후-새시대 플랫폼은 무엇인가-(2009)’ 등

‘정치, 하지 마라’

그런데 정치의 속살과 바닥 현실을 조금은 봐서인지 (정치에 비하면 그래도 온실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에서 일가를 이룬 안철수 같은 사람이 과연 현실 정치의 처절한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나는 정치권력은 산 정상과 너무나 닮았다는 것을 절감한다. 작은 권력은 1000~2000미터 산과 비슷하다. 우거진 수목도 있고, 고즈넉한 공간도 있고,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도 있고, 산토끼와 사슴과 멧돼지가 뛰논다. 정말 보기 좋다. 그러나 권력이 커지면 높은 산 정상처럼 황량해진다. 이해관계자들 간의 대립, 갈등이 심한 한국에서 당권, 대권 후보군에 들면 5000~6000미터 급 산이 되고, 유력한 주자가 되면 6000~7000미터급 산이 된다. 사방에서 질투, 견제, 검증, 비난의 칼바람, 눈보라가 몰아친다. 자신도 까맣게 잊고 있는 사소한 허물 들추기가 시작된다. 일거수일투족이 관심, 감시의 대상이 된다. 대부분은 아주 악의적이다. 허물 찾기 스토커나 정신 이상기가 다분한 스토커들도 따라붙게 되어 있다.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도 거의 없다. 가족, 친구와의 일상의 작은 행복(사생활)이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큰 권력을 가지려면 엄청나게 강한 욕망, 나 아니면 이 일을 할 사람이 없다는 사명감, 모순 부조리에 대한 뜨거운 분노, 내가 하면 정말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 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거친 칼바람, 눈보라, 황량함, 고독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9년 3월 4일 올린 ‘정치, 하지 마라’라는 글에 정말로 공감한다. 큰 권력을 가져보지는 않았지만 직관적으로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정치, 하지 마라.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정치에 바쳐야 합니다. 정치를 위하여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를 헤아리는 것보다, 그가 가진 것 중에서 정치에 바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사생활, 특히 가족들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고통입니다.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많은 사람들이 이 수렁에 빠져서 정치 생명을 마감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말년이 가난하고 외롭습니다.
돈의 수렁… 돈을 조달할 방법은 없습니다…. 돈벌이를 할 방법도 없습니다…. 노후는 대책이 없습니다…. 정치인은 사생활이 없습니다. 행동의 자유도 없습니다. 연극을 보러 가는 일도, 골프를 치는 일도 세상 분위기와 언론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밥 먹는 자리에서 농담도 함부로 하면 사고가 납니다…. 저격수는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공의 이익과 사생활보호의 한계가 너무 모호하여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정치를 하는 동안 옛날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졌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없기도 하고, 생각과 정서도 달라지기도 하고, 손을 자주 벌려서 귀찮은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안철수는 적어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사생활 검증의 수렁과 이전투구의 수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왜 그렇게 싸우는가? 민주주의 정치 구조가 본시 싸우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당을 서로 나누어 싸우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정치는 무너집니다…. 민주주의라고 싸움이 항상 규칙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정쟁을 전쟁으로 하던 적대적 정치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고, 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큰 나라 에서는 자연 싸움이 거칠어지고 패자에 대한 공격도 가혹해 지기 마련입니다. 욕설, 몸싸움, 거짓말, 중상모략, 뒷조사 이런 악습이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결국 이런 싸움판에서 싸우는 정치인들은 스스로 각박해 지고 국민들로부터는 항상 욕을 먹는 불행한 처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는 십자가 고행

여기까지 써놓고 나니 안철수에게 함부로 정치하지 말라고 하는 취지의 글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정반대다. 오히려 안철수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의 글을 소개한 것이다. 한국 정치가 이렇게 각박해 진 것은 기본적으로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몰상식, 무원칙하게 추구하고, 공공(정치, 관료, 사법, 언론)이 이를 방조, 조장해 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승자는 독과식하고, 패자는 완전히 짓밟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의 후진성(잔학함, 몰상식)이 나의 존재 이유로 되는 적대적 상호의존 체제를 만들기 마련이다. 또한 원래 기득권자들은 정의와 상식의 칼이 무디면 정치적 독점(경쟁자 제거 등)이나 경제적 독점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건전한 상식과 균형감각을 가진 정치세력이 공공의 중심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 정치가 엉망이 된 것이다. 물론 보수의 오른쪽에 북한, 좌파, 노조, 무질서, 호남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와 피해의식을 가진 세력이 포진하고 있고, 진보의 왼쪽에는 미국, 시장, 경쟁, 개방, 영남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와 피해의식을 가진 세력이 포진하고 있는 정치지형이 이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근거 없는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롭고, 건전한 상식과 균형감각을 갖추고 있으면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 않은 유권자들을 대변하는 안철수 류의 정치세력이 힘 있게 등장하면 정치적 독과점에 기반을 둔 적대적 상호의존체제는 많이 완화될 것이다. 그러면 노 전 대통령을 괴롭힌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과 정치보복의 악습도 상당 정도 완화될 것이다. 그런데 안철수의 가족, 친지, 친구들 대부분은 정치하는 것을 말리지 않을까 한다. 정치는 우리 시대의 ‘십자가 고행’ 비슷한 거니까!

진짜 레드카드 받았다고 생각할까?

안풍을 양당 구도 혹은 정당 정치에 대한 레드카드로 해석하는 식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는 촛불 시위 때도 나온 얘기다. 그런데 나는 진짜 그렇게 생각할까 의문이다. 현실정치를 아는 대부분은 속으로는 기존의 강고한 양당 구도에 편입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진보 논객들은 이구동성으로 정치는 인물과 바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력과 정당으로 한다면서 야권연대 테이블에 들어오라고 종용하였다. 안철수의 “반한나라 비민주”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또는 무소속 가능성에 대해 적의를 표하였다. 한나라당의 어부지리를 경고 내지 우려하기도 하고, 민주 개혁을 위해 싸워 온 민주당의 역사를 무시한다고 격노하기도 하였다. 지금이야 안철수가 반한나라당 입장을 명확히 했고, 야권통합 후보가 되지 않으면 당선이 곤란한 박원순에게 후보를 양보했으니까 이런 우려와 분노는 사그라졌겠지만……. 그러다 보니 이제는 레드카드의 대상은 진보와 민주당이 아니라, 오로지 한나라당과 보수만 되어 버린 것처럼 되었다.
나는 이것이 진보의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안철수가 레드카드를 잠깐 비쳤다가 너무 빨리 집어 넣어버린 것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레드카드의 배경

9월 2일자 한겨레신문은 최저임금(4320원) 100% 적용으로 인해 해고를 두려워하는 아파트 경비원 관련 기사가 3개, 사설 1개를 실었다. 먼저 3개의 기사 제목만 보자.
최저임금 100% 지급? 경비원은 되레 서럽다강제휴식에 임금 깎기 등 관리사무소 꼼수 늘어 /노동단체 "예견된 문제" 정부가 대책마련 나서야
“내 임금 인상 말라” 서명받는 경비원들‘최저임금 100% 적용’ 씁쓸한 풍경 / 입주자 요구에 마지못한 동참 / “해고가 두려운데 어떡하겠나”
‘무인경비’ 주민투표 바람… 몸 낮춘 경비원들 ‘해고 조바심’아파트마다 “CCTV 등 확대” / 보안업체는 공짜 마케팅 / 쓰레기 분리 자처·머리 염색 / “주민에 잘 보이자 인정 호소
사설 제목은 이렇다.
[사설] 아파트 경비원 스스로 "임금 더 안 받겠다"는 세상
이튿날에는 독자(김병현 미국 공인회계사) 의견을 실었다.
[왜냐면] 우리 이러지 맙시다9월2일치 1면 “‘내 임금 인상 말라” 서명받는 경비원들”을 읽고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감시·단속직 노동자(아파트 경비원, 수도·가스 검침원, 건물전기기술직, 주차관리원, 청원경찰 등)에 대해서는 그동안 최저임금 적용 유예를 했는데, 2012년부터는 100% 적용하도록 최저임금법 시행령이 정했기 때문이다. (2007년에는 최저임금의 70%, 2008~11년은 80%를 적용받았다)
이승준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최저임금의 100%를 줄 경우, 현재 평균 110만~120만 원을 받는 경비원의 월 급여는 평균 20만~30만 원가량 오를 것이 예상되며, 이에 따라 관리비 인상(가구당 1~2만 원)을 우려한 전국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연합회(전아연)가 대응에 나섰고, 일자리를 잃을까 봐 경비원들이 ‘임금 인상을 하지 말라’는 서명 운동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전아연 관계자는 “근로조건 개선도 중요하지만 65살 이상 고령층이 대부분인 경비원들이 거리로 내몰릴 텐데 최저임금 100%를 적용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자 그러면 이승준 기자가 소개하는 대안은 무엇일까?
“노동단체와 전문가들은 최저임금법의 취지를 강조하며, 감단직 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100% 지급 규정 적용을 유예하자는 일부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다”고 하면서 민주노총 정호희 대변인의 발언을 소개했다. 요지는 “최저임금 자체가 너무 낮다”는 것과 “감단직 최저임금 보장은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다. 누가 합의를 했는지, 합의를 위한 조사, 연구, 대안에 대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르지만….
이승준 기자는 민주노동당 홍희덕 의원실 관계자의 발언도 소개했다.
“노동강도가 높은 현재의 24시간 맞교대를 바꾸고 고용유지 지원금, 교대제 전환 지원금 제도를 활용해 고용안정과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대책 마련을 검토 중”
김윤자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의 발언도 소개했다.
“경비원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보장할 수 있도록, 일정 규모 이상의 아파트에는 정해진 수의 경비원을 두어야 한다는 법 조항을 만들어 고용을 보호해야 한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대부분 노년층인 아파트 경비원들은 일자리를 잃으면 더 기댈 곳이 없다. 많게는 월 몇만 원의 관리비 증가를 이유로 우리의 아저씨, 할아버지 같은 경비원들에게 하루아침에 경제적·정신적 충격을 주는 것은 인간적 도리가 아니다. 세상이 힘들고 각박할수록 어려운 이웃의 고통을 껴안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부도 아파트 경비원들이 최저임금 100%를 적용받으면서 고용불안에 시달리지 않도록 고용유지 지원금 등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런 상생의 정신이 사라진 사회는 말 그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세상’이다.”
김병현 미국 공인회계사도 호소한다.
“조금 편하고 깔끔하다고 해서 재래시장보다는 대기업 마트에 길들여지지 않으셨습니까? 프랜차이즈 배달 음식이 아니면 주문하는 것이 꺼려지지 않으십니까? 커피 한잔에 원가의 수십 배에 달하는 돈을 망설임 없이 지불하면서, 입주민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경비 아저씨의 법정 최저임금 지급을 위해 늘어나는 관리비 1만~2만 원이 아깝다고 생각되십니까?…… 우리 작은 것부터 해나갑시다……. 우리 공생 문화를 만들어봅시다.”
한겨레사설과 김병현의 호소는 나와 우리 가족은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도 실천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이런 자발적 나눔과 상생의 정신이 보편화되어 시장 원리를 근본적으로 거스를 수 있다면, 양극화, 비정규직, 청년실업, 노인빈곤, 사교육 열풍 등 한국 사회의 대부분의 문제가 아예 발생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런데 아무리 선진국이라도 바로 이것이 안 되기에 국가의 책임성을 높이려 하고, 조세와 재정을 놓고 고민하고, 복지의 우선순위, 대상, 전달체계를 고민하고, 고용과 성장 친화적인 경제사회 제도를 고민하는 것 아닌가? 홍희덕 의원실 관계자와 김윤자 교수의 대안도 그래서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일정규모 이상의 아파트는 정해진 수의 경비원을 두도록 하자”는 김윤자 교수의 대안은 실효성이 있을까?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용유지 지원금, 교대제 전환 지원금 제도”는 이보다는 조금은 나은 대안이지만, 형평성의 문제와 지속가능성의 문제가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다.
원래 최저임금제의 취지는 최저임금도 못 줄 정도면 사업체 문을 닫거나, 노동력을 해고(방출)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차원에서는 보다 생산성 높은 부문으로 노동을 재배치하자는 산업구조조정 전략인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실업자들은 국가가 고용보험이나 공적부조제도(기초생활보장제도 등)로 떠안아야 한다. 이것이 안 되면 고용유지지원금이라도 주어서 일단 대량 실업사태를 막아야 한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규제 수준을 정하거나 높일 때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취약 근로자들이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마련하자는 '좋은 의도'가 바닥현실을 조사해 본 결과,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것이 예상되면 최저기준을 조심스럽게, 지혜롭게 다뤄야 한다. 앞에서 말한 취약근로자-그것도 노인근로자- 보호, 완충 장치와 더불어 지역별, 연령별, 산업별 최저임금 수준 차등화도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일이 결코 간단치 않기 때문에 직업관료를 두고, 의원과 정당을 세금으로 생활비와 활동비를 보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는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 진보의 정체성인 것처럼 생각한다. 민주당은 지난 7월 초 2011년 현재 4320원인 최저임금을 2012년에는 노동자 평균임금의 50%인 5410원으로 올리고, 2015년까지는 60%로 올리겠다고 하였다. 더불어서 현재 전체 노동자의 50%인 비정규직을 30%로 줄이고, 임금은 80%로 올리겠다고 공언하였다. 이는 야권 연대를 의식하여 내지른 측면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한국 특유의 고용·임금 구조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최저기준의 대폭 상향에 따라 수백만 명의 취약 근로자와 기업이 받을 엄청난 충격에 대한 인식도, 대안도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몇 백만 명의 고소득 근로자와 다수의 취약근로자로 구성되어, 1인당 GDP를 기준으로 보면, 평균임금 수준(2009년 259만 7천 원, 5인 이상)은 OECD 국가 중에서 높은 수준이지만, 중위임금은 낮고(211만 원, 5인 이상), 최저임금에 걸리는 노동자 숫자가 너무나 많다. 또한 고용률과 임금근로자 비율이 낮다. 이는 자본의 가혹한 임금 착취 때문이 아니라 자본력 자체가 약하기 때문이다. (www.socialdesign.kr/news/articleView.html?idxno=6382)
한겨레신문은 치밀한 조사도, 숙고도 없이, 그것도 ‘사회적 합의’로 인해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 필요가 없는 자들이 모여서 ‘사회적 합의’란 것을 해 놓고, 막상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대량 실업 사태 앞에서 사실상 무대책인 진보와 보수 정치권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다. 진보는 아파트 입주자들에게는 인정에 호소하여 가구당 1~2만 원을 더 부담하라고 하면서, 사회적 합의 테이블의 주체인 민주노총 등에게 뭘 내놓으라고 요구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아파트에 사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중심이 되어 관리비 1~2만 원 더 내놓기 운동을 벌이든지, 대량 실업 위기에 처한 노인들을 위한 고용유지 지원금을 위한 증세나 예산 배정 운동이라도 벌이면 그래도 좀 봐 줄만 하겠지만……
한국에서 최저 임금 수준을 급상승시키면, 먹고 살 만한 진보 인사의 상당수는 양심이 덜 아파서 좋을지 모르지만, 노인들은 감내하기 쉽지 않은 강한 충격을 받게 되어 있다. 이들은 보다 생산성 높은 부문으로 옮겨갈 수가 없고, 국민연금은 아예 붓지 않았기에 혜택이 없고, 기초생활보호 제도에서는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다수가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결국 어디로 가겠는가? 아마도 도시 빈곤 노인들 상당수는 지하철과 시장통의 폐지 줍는 일에 나설 것이고 적지 않은 수는 자살 유혹을 받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도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 문제는 엄청나게 심각하다는 사실이다.

OECD는 노인자살률(10만 명당 자살자 수)을 표기하기 위해 원래 5명, 10명, 15명으로 증가하는 왼쪽 눈금을 사용하는데, 한국의 폭증하는 노인 자살률을 표기하기 위해 20명, 40명, 60명, 80명 (…) 160명으로 증가하는 별도 눈금을 만들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자살률 그래프를 보면, 잔잔했던 바다가 1990년대 초반부터는 큰 풍랑이 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중에서도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 그래프는 그야말로 거대한 쓰나미를 연상케 한다. 자살이라는 것이 아무리 실존적인 행위라 하더라도, 그 원인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깝고도 직접적인 원인은 노령연금제도가 부실하고, 근로소득이든 자산소득이든 사적이전소득이든 노인들이 소득을 얻을 기회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좀 멀고 간접적인 원인을 꼽아보면 급격한 핵가족화(대가족 공동체의 해체)와 도시화, 가계 교육비 부담, 중국발 산업구조조정 압력, 벤처중소기업의 발목을 잡아 결과적으로 일자리 창출을 틀어막는 기득권 과보호의 노동, 금융, 유통시장 및 원하청관계, 부가가치를 국내화하는 능력(부가가치 유발계수)과 고용을 창출하는 능력(고용계수)이 현격히 떨어지는 산업구조 등이 꼽힐 것이다. 한반도의 기후, 일조량과 한민족의 성정과 문화, 절대적인 부의 수준 등을 종합하면 한국은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멕시코 등 라틴계 민족처럼 자살률이 결코 높을 수 없는 나라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살대란, 특히 노인자살대란은 1990년대 후반 북한의 대량기아사태처럼 일종의 사회적 대학살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안철수 돌풍을 얘기하다가 왜 뜬금없이 최저임금과 노인자살 타령인가?
그것은 노인자살대란과 최저임금 관련 갈등을 파고들어가 보면 우리 시대 고통, 증오, 갈등, 분노, 불신의 대부분이 거의 동일한 뿌리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내외적 변화의 압력이 쓰나미처럼 밀어닥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도 대응하지도 못하는 한국 공공(정치, 행정, 사법, 언론, 지식사회)의 둔감, 무능, 무책임이다. 그로 인해 국가가 복지로써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고, 정의로써 사회적 강자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냉정하게 보면 한국의 진보, 보수의 주류의 철학, 가치, 행태는 일자리, 청년의 희망, 노년의 행복을 합동으로 목 졸라 죽이는 짓을 끈질기게 하고 있다. 한국에서 힘 있는 존재의 대표격인 재벌, 금융, 관료, 노조, 전문직, 지식인, 정치인의 행태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재벌의 황소개구리적 행태, 금융과 전문직능의 기득권 과보호 시스템, 공평성, 연대성, 유연성과 담쌓고 오로지 기득권 노동의 안정성만 추구하는 노조의 행태, 공무원의 양반관료화와 마피아화, 시장과 기업의 동력학에 대한 진보의 놀라운 무지, 언론의 저열한 당파성이 그 예다. 정치의 둔감, 무능은 오랜 적대적 의존 관계의 양당 체제 및 지역적 정치 독과점 체제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나는 이것이 레드카드 사태의 진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이를 먼저 알아먹고 환골탈태하는 세력이 안풍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계속)

김대호 / 사회디자인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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