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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September 4, 2015

‘세 살배기 난민’ 주검 사진, 모자이크 해야 했을까요?

2일(현지 시각) 오전 터키 남부 보드룸 휴양지 인근의 해변에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이 아일란 쿠드리가 숨친 채 발견됐다.
2일(현지 시각) 오전 터키 남부 보드룸 휴양지 인근의 해변에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이 아일란 쿠드리가 숨친 채 발견됐다.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바로 ‘베트남전의 네이팜탄 소녀’ 사진입니다
시리아 코바니 출신의 세 살배기 아이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이 세계를 비통함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쿠르디는 2일 오후 터키의 휴양지 보드룸의 해변에서 숨진 상태로 발견됐습니다. 엄마, 다섯 살 형과 함께 터키 해안을 떠나 유럽으로 가려다 배가 뒤집히면서 숨을 거뒀습니다. 감청색 반바지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마치 엎드려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으로 숨진 쿠르디, 그리고 쿠르디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기록한 뒤 주검을 옮기는 터키 해안경비대원의 침통한 얼굴은 AP통신의 취재로 전세계 언론에 타전됐습니다. <한겨레>도 3일 오전부터 누리집을 통해 사진과 함께 쿠르디의 사연을 실은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관련 기사 : 파도에 밀려온 3살 시리아 난민 아이의 주검…전세계 ‘공분’ )
세계는 이 한 장의 보도사진에 요동치고 있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쿠르디를 추모하는 물결이 일고 있습니다. ‘파도에 휩쓸린 인도주의’(#KiyiyaVuranInsanlik)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추모 메시지를 담은 패러디 사진과 그림도 앞다퉈 게재되고 있습니다. 영국 내로 난민을 수용하는 조처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여론이 급변하면서 “도덕적 책임들을 이행할 것”이라고 하루 만에 달라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보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언론사가 쿠르디의 주검 모습을 가감 없이 보도해도 취재 윤리상 문제가 없느냐는 의문이었습니다. 한겨레 트위터(@hanitweet) 멘션창에는 “이 사진, 꼭 함께 트윗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었나요?”, “사진 모자이크 처리라도 좀 하지”라는 반응부터 “미쳤나요? 이런 사진 올릴 필요가 있나요?”라는 반응이 달렸습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바로 가기 )에도 “글로도 충분합니다. 아이들의 이런 사진을 올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끔찍하고 쉽게 죽음을 접하며 살다 보면 삶마저 쉽게 끔찍해지는 것 같습니다”, “제발 모자이크라도 좀. 어떤 사진은 아이만 확대해서 올리는데 정말 이건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댓글이 달려서 다른 독자들과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분들의 견해대로 언론이 앞다퉈 보도했던 이 쿠르디의 주검 보도 사진은 정말 ‘선정주의 보도’라고 봐야 하는 걸까요. <뉴스AS>에서 차분히 짚어보겠습니다.
■ 언론은 태생적으로 선정적이다
베트남전 당시 네이팜탄 폭격으로 화상을 입고 맨몸으로 울부짖으며 거리를 내달리는 소녀. 한겨레 자료사진
베트남전 당시 네이팜탄 폭격으로 화상을 입고 맨몸으로 울부짖으며 거리를 내달리는 소녀. 한겨레 자료사진
언론사는 태생적으로 어떤 보도를 하든 ‘상업적’이라거나 ‘선정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언론사는 공공기관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민간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언론사의 보도로 인해 얻어지는 수익은 언론사라는 기업의 이익으로 환원됩니다. 저널리즘은 애초 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폭로하고 보여주는 방식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폭로 그 자체에 다분히 선정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상업성과 선정성을 인정한 이후의 과정에 있습니다. 언론사의 보도는 공공성에서 존재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공공성이 결여된 텍스트는 언론의 보도라고 말할 수 없지요. 상업성과 공공성 사이를 오가는 이 묘한 양가성은 보도를 하는 언론사나 취재 기자, 독자 모두에게 날선 긴장감을 요구합니다. 언론사나 취재기자는 보도 생산 과정에서, 독자들은 보도 소비 과정에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성찰적으로 텍스트를 생산하고 관찰하고 감시해야 합니다. 선정성을 기본으로 두되, 이 선정성이 상업적인 목적에 의해서만 활용되지 않도록 언론사 내부에서 검증을 하고, 시민 사회가 감시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뒤흔든 보도 사진은 언제나 딜레마적인 상황에 놓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베트남 전쟁 당시 전쟁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을 바꿔놓은 유명한 보도사진이 있습니다. 1972년 6월 AP통신의 사진기자 닉 웃은 네이팜탄이 투하된 직후 울면서 거리로 뛰쳐나오는 아홉 살 소녀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전세계 언론에 타전했습니다. 이 보도 사진은 미국 등 세계 각지에 전쟁의 참상을 알려 반전 여론을 일으켰고, 베트남전 종전을 앞당기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 사진 역시 소녀가 발가벗고 있는 모습에 더해, 사진 취재 당시 폭탄의 화염이 목과 등을 태우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습니다. 사진기자 웃은 나중에 CNN과의 인터뷰에서 “사진을 찍을 때까지는 소녀의 목과 등에 불길이 있는지 몰랐다. 사진을 찍고 난 뒤 곧바로 물을 끼얹어 불을 껐고 병원으로 옮겼다”고 밝혔습니다. 상황 논리에 따라 보도의 공익성에 대해 인정받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 세계를 움직인 보도사진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쿠르디의 주검 보도사진은 어떨까요. 문화비평가 이택광 경희대 교수(국제커뮤니케이션학부)는 이번 보도사진을 두고 ‘선정주의’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은 ‘가짜 문제 제기’라고 지적합니다. “우선 이번 쿠르디 보도 사진은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취재기자가 생명을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는 데만 열중했다거나, 좀 더 눈에 띄는 사진을 찍기 위해 의도를 가미해서 조작을 했다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정주의냐 아니냐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언론은 선정주의를 비켜갈 수 없어요. 단, 그런 기능이 어떻게 공익적인 효과를 만들어낼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이를 두고 사후적으로 시민사회가 고민하고 판단을 해야겠지요. 이번 사진 보도는 사실 보도였고, 사실 그 자체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여기에 언론의 어떤 상업적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옳겠지요.”
■ 사진은 정말 사실을 말하는 걸까
지난 2일(현지시간) 터키의 해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왼쪽)와 형 갈립(5)의 생전 모습. 이들 형제와 엄마 레한은 터키에서 그리스로 가기 위해 탄 소형 고무보트가 전복돼 모두 숨졌다. AP 연합뉴스
지난 2일(현지시간) 터키의 해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왼쪽)와 형 갈립(5)의 생전 모습. 이들 형제와 엄마 레한은 터키에서 그리스로 가기 위해 탄 소형 고무보트가 전복돼 모두 숨졌다. AP 연합뉴스
이런 의문은 어떤가요. 한 장의 보도사진은 정말 현장의 진실을 모두 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물론 쿠르디의 주검 보도사진의 경우, 한 장의 보도사진이 그 어떤 다른 텍스트보다 울림이 크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사진은 프레임에 따라, 어떤 순간을 포착하느냐에 따라 언제나 순간적인 사실을 포착할 뿐 현장의 총체적인 진실을 모두 전하진 못합니다. 물론 그건 글로 된 기사도 마찬가지겠지요. 언론사는 ‘진실’을 보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진실에 가까이 가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뿐이지요.
쿠르디의 주검 보도 사진도 쿠르디의 주검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사진, 터키 해안경비대원이 무언가를 적으면서 쿠르디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 쿠르디의 주검이 터키 해안경비대원에게 안겨 이송되는 모습이 담긴 사진 등 모두 다른 순간을 담고 있고,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언론의 선정성과 마찬가지로, 보도 사진은 순간의 포착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 사진을 둘러싼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더 중점을 둬야 할 겁니다. 원용진 서강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 보도사진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유럽의 난민 문제를 지금처럼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 이해하려고나 했을까요. 이렇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세상과 사회의 일보다 언론의 직업 규범을 더 강조하는 것이 무슨 공공성이 있을까 싶습니다. 만약 언론의 직업 규범을 따지고 싶다면, 언론이 언론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안 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따져야겠지요. ‘유럽 난민 위기’ 같은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언론의 직업 규범은 곁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상황에선 곁가지를 두고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원 교수는 언론의 취재 윤리는 언제나 상황의존적일 수 있다고도 설명합니다. “취재 윤리에는 교과서처럼 매순간을 가이드 하는 규범이 있지는 않습니다. 충분히 변동적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번 쿠르디의 주검 보도 사진의 경우, 만약 취재 윤리 교과서가 주검 사진을 보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면, 기존의 윤리에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의 보도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죠. 언론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쿠르디의 주검 보도 사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유럽 난민 위기의 구조적 모순은 무엇일까 계속 따지고 들어가야겠지요.”
■ 모자이크는 선정적이지 않은가
터키의 해안경비대 대원이 2일(현지 시각) 오전 터키 남부 보드룸 휴양지 인근의 해안에 떠밀려온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이 아일란 쿠드리의 주검을 옮기고 있다. 보드룸/AP 연합뉴스
터키의 해안경비대 대원이 2일(현지 시각) 오전 터키 남부 보드룸 휴양지 인근의 해안에 떠밀려온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이 아일란 쿠드리의 주검을 옮기고 있다. 보드룸/AP 연합뉴스
쿠르디의 주검 사진을 모자이크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됩니다. 특히 공감 능력이 상대적으로 예민한 분들이 쿠르디의 주검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도한 언론에 문제를 지적하거나 때로는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모자이크를 하지 않은 원본 사진이 모자이크한 보도 사진보다 공공성이 더 있는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이런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포르노그라피는 맥락에 관계없이 애정 없는 성적 행위를 해부학적으로 부각하기 때문에 포르노입니다. 어떤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는 경우 사람들의 관음증을 더 자극하기도 하지요. 어떤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느냐, 모자이크 처리를 하느냐는 선정성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번 쿠르디의 주검 보도사진의 경우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면 되레 사진의 메시지가 흐려지는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었겠지요.”
남 교수는 전쟁이나 분쟁 현장을 전하는 보도사진의 취재 윤리에 대해 두 가지 정도 생각해볼 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주검 등 취재 대상이 몸이 찢어져 있거나 훼손되어 있는 등 모습 그 자체로 과도하게 독자에게 거북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2003년 미국과 영국군의 이라크 침공 당시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민간인 가정이 공습 피해를 입어 두 다리가 찢어진 채 피를 뚝뚝 흘리는 아이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숨져 있는 모습이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한겨레>는 당시 초판 신문에 주검의 찢긴 다리가 담긴 사진을 그대로 보도했다가 다음판부터 아버지의 표정에 포커스를 두고 찢긴 다리를 보여주지 않는 사진으로 바꿔서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공익성이 있다 해도, 선정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이번 쿠르디 주검 보도사진의 경우 이와는 성격이 달랐지요. 쿠르디의 모습이 주검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지만, 언뜻 보면 그 모습이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거북함을 불러 일으키기보다는 안타까움과 비통함이라는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보도사진이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더 중요한 점은 보도사진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피사체가 사회에서 주체적인 발언권이 있느냐 여부입니다. 남 교수의 말입니다. “취재 대상이 평소 발언권이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거나 사회적 약자들일 경우, 이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공성에 의미를 담아 이 이슈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는 방편으로 보도를 한다면, 선정성으로부터 책임을 면할 수 있지요. 지금 유럽으로 몰려들고 있는 난민들의 경우에는 발언권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목소리를 쿠르디라는 아기의 주검 보도사진으로 전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충분한 공공성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남 교수는 마지막으로 취재 현장에서 주검 등의 보도가 가지는 윤리성에 대해 헷갈릴 때, 취재 대상 당사자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해 생각을 해보라고 조언합니다. “‘내가 지금 취재하는 대상의 처지라면, 나는 나의 목소리가 사회에 전달되길 원할까’ 자문해보는 겁니다. 당사자의 처지가 되어보는 것만큼 언론 윤리를 규정하는 데 중요한 방법이 없지요.”
3일 영국의 진보 일간지 <인디팬턴트>에는 쿠르디의 주검 보도 사진과 함께 이런 문구가 실렸습니다. “Do we really believe that this is not our problem?(우리는 정말 이 이 문제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언론은 이제부터라도 쿠르디의 죽음을 직시하는 일을 토대 삼아, 쿠르디라는 상징에서 머물지 않고 유럽으로 몰려드는 시리아 난민 문제 전반을 살피고, 난민 문제를 낳은 유럽의 각종 구조적 모순을 분석하는 일을 시작해야 할 겁니다. 올해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가려다 지중해에서 숨진 난민은 2600명이 넘습니다. 2600명이 넘는 쿠르디가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언론의 선정주의와 상업주의는 이런 과정을 통해 공공성의 이름으로 면책될 수 있을 겁니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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