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대선개입 유죄] 민낯 드러난 사법부·검찰
대법, 전합 만장일치로 이례적 파기환송
대선 댓글파일 증거에서 배제
"박근혜 정권 눈치보기 판결" 비판
논란 부른 1심·파기환송심
1심 "정치개입 맞지만 대선개입 아냐"
파기환송심 김시철 재판장 시간끌기
검찰, 윤석열 내친 뒤 감싸기 수사
채동욱 사퇴·수사팀 공중분해
되레 민주당 의원들 기소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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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윤석열 내친 뒤 감싸기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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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이 걸린 국가정보원 정치·선거 개입 사건은 결국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되고 난 뒤에야 네 번째 사법부 판단을 통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수사부터 재판까지 4년 남짓한 기간은 정권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정보기관과 수사기관, 사법부의 민낯을 드러낸 ‘치욕의 시간’이었다. 수뇌부가 수사를 방해한 검찰,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놓고 심리를 노골적으로 지연한 사법부 모두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 전합서 만장일치 파기… 박근혜 ‘임시정통성’ 연장해준 대법원
“최고 사법기관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의 판단이다.”
2015년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일영 대법관)가 만장일치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을 유죄로 판단한 원심을 깨자 법조계에선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대법원은 유무죄 판단을 하진 않았지만, 유죄 판단의 결정적 근거가 된 국정원 트위터팀 직원의 전자우편 첨부파일 2건(‘425지논’, ‘시큐리티 파일’)을 증거에서 배제하며 사실상 항소심 결론을 뒤집었다. 재판연구관 경험이 있는 한 부장판사는 “통상 결론이 같으면 일부 증거관계 판단이 달라도 파기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데, 지엽말단적인 데 집중해 유무죄 판단도 미뤘다. 살아있는 권력에 밉보일 수 없으니 하급심에 책임을 떠넘긴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고 했다.
전원합의체(전합)에서 만장일치가 나온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상고사건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를 먼저 거치고, 한명이라도 반대 의견을 내면 전합으로 간다. 법률과 같은 구속력이 있는 대법원 판결은 특히 전합을 거치면 무게감이 다르다. 새로운 판례를 내놓거나 기존 판례의 법리를 변경하는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전합으로 간다. 국정원 사건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당시 일부 대법관과 재판연구관(판사)들 사이에서는 “소부에서 판단해도 충분한 사안을 전합까지 와서 골치 아프게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소부의 반대 의견 등이 있어 전합을 열어놓고 소수의견 하나 없이 13 대 0 만장일치가 나오는 건 모순적이란 지적이 나왔다. 결국 양승태 원장 체제의 대법원이 합심해 박근혜 정부의 ‘임시 정통성’을 연장해준 셈이 됐다.
■ ‘지록위마’·심리 지연… 진실 규명 외면한 사법부
2014년 9월, 1심이 같은 댓글 활동을 두고 정치개입은 맞지만 대선개입은 아니란 판단을 내놓자 “술 먹고 운전해도 음주운전은 아니란 말”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김동진 부장판사가 법원 내부통신망에 “상식과 순리에 어긋나는 지록위마(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함)의 판결”이라고 비판하자, 대법원 법관징계위원회(위원장 민일영 대법관)는 “법원 위신을 떨어뜨렸다”며 정직 2개월 처분을 내렸다. 증인에게 “늙으면 죽어야 해요”라고 말한 법관이 견책 처분에 그치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최근 감봉 4개월 징계를 받은 데 비하면 강도 높은 징계였다.
나중에 대법원에서 사건을 돌려받은 서울고법에서도 파행은 계속됐다. 파기환송심 재판장을 맡은 김시철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1년7개월 동안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끌다가 지난 2월 정기인사에서 다른 재판부로 전보됐다. 김 부장판사는 법정구속 상태인 원 전 원장을 보석으로 풀어줬고, 재판에서 국정원의 댓글공작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탄력적 용병술’에 빗대는 등 공정성을 의심케 하는 재판 진행으로 구설에 올랐다.
■ 수사팀 공중분해, ‘달 가리키는 손가락’만 기소한 검찰
사건이 여기까지 온 데는 애초 떠밀리듯 미적지근하게 수사를 벌인 검찰의 ‘공로’도 크다. 2013년 6월 황교안 장관이 이끌던 법무부는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는 것 자체에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해 9월엔 정권 등 외압으로부터 수사팀 바람막이 역할을 하던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 의혹으로 옷을 벗었다.
검찰 수뇌부가 수사를 방해했다는 폭로도 나왔다. 윤석열 전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장(현 서울중앙지검장)은 2013년 10월 상부의 허가 없이 국정원 직원들을 체포하고 압수수색을 했다는 이유로 직무에서 배제됐다. 윤 전 팀장은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야당 도와줄 일 있느냐”며 압력을 넣었다고 그해 국정감사에서 폭로했다. 이후 법무부는 윤 전 팀장에게 보고 절차 누락을 이유로 정직 처분을 내렸고, 특별수사팀 소속 검사들을 지방으로 인사발령 내 수사팀을 사실상 해체했다. 수사팀 단성한, 김성훈, 이복현 검사 등은 원 전 원장 재판이 열릴 때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힘겹게 공소유지를 했다.
검찰은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주목하기도 했다. 2015년 6월, 검찰은 18대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 오피스텔을 찾아간 민주당 의원 4명 등을 공동감금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은 지난달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반면 댓글 작업을 주도한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과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에 대해선 기소유예 처분했다가, 민주당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인 법원 명령에 따라 이들을 기소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 황당증언에 자료제출 거부… 수사·사법기관 농락한 국정원
수사과정과 법정에서도 국정원은 실체적 진실 규명에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국정원 직원들은 법원의 증인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증언 거부, ‘모르쇠’ 답변으로 번번이 재판에 훼방을 놓았다. 1심 재판 때 증인으로 나온 심리전단 안보5팀(SNS팀) 소속 직원들은 “이메일을 안 써서 (내 계정이 맞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2011년 연말) 당시 소속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트위터 자체를 잘 모른다”는 황당 답변을 내놓다 재판장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파기환송심 땐 잇따라 불출석하거나 증언 거부로 일관하면서 제대로 된 증인 신문이 이뤄지지 못했다.
수사 초기부터 안보5팀 직원 명단과 트위터 계정 목록을 보내달라는 검찰 요청을 무시하던 국정원 기조가 수사 협조로 급선회한 것은 정권이 바뀌면서부터였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최근 국정원이 2009년 5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30개 ‘사이버외곽팀’을 꾸려 정치·대선개입한 정황을 담은 자료와 원 전 원장의 불법 지시가 담긴 2009~2012년 전 부서장 회의 녹취록 등을 검찰에 제출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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