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만명에 25조 빚 탕감
소멸시효가 지난 장기연체 채권 25조7000억원 규모가 소각돼 214만3000명에 달하는 채무자들이 빚 탕감 혜택을 받게 된다. 국민행복기금과 주택금융공사 등 공공부문 채권 21조7000억원과 은행 보험 카드 등 민간부문 채권 4조원이 소각 대상이다.
이번 조치는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 공약인 '소멸시효 완성채권 소각'의 대상을 구체화한 것이다. 다만 장기 연체자로 낙인 찍혀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서민·취약계층의 빚 부담을 덜어준다는 당초 취지와 달리 형평성 논란과 도덕적 해이 등 적잖은 부작용도 예상된다.
7월 31일 금융위원회는 금융 공공기관장·협회장들과 간담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소멸시효 완성채권 처리 방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공공부문 소각채권은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5조6000억원 규모(73만1000명)와 캠코, 주택금융공사, 예금보험공사 등 금융공공기관이 보유 중인 16조1000억원 규모(50만명)가 그 대상이다. 이들 공공부문 채권은 8월 말까지 전산기록 삭제와 서류 폐기를 완료해 채무자들은 9월 1일부터 신용정보원 소각채권 통합시스템에서 소각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민간부문 소각채권(대부업 제외)은 작년 말 기준 4조원 규모이며, 대상자는 약 91만2000명이다. 은행 9281억원(18만3000명), 보험 4234억원(7만4000명), 카드·캐피털 1조3713억원(40만7000명), 저축은행 1906억원(5만6000명), 농협·수협·신협 등 상호금융 2047억원(2만2000명) 등이다.
이들 민간 부문 연체 채권은 정부가 소각을 강제로 규정할 수 없지만 업권별 협회를 중심으로 올해 말까지 자율적인 소각을 유도할 방침이다.
다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 주도로 채무를 탕감할 경우 성실하게 빚을 갚고 있는 기존 채무자들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고, 정치권 주도로 각종 선거 때마다 채무조정, 탕감 조치들이 반복될 경우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장기간 추심의 고통에 시달린 취약계층의 재기를 돕겠다"며 "금융 소외계층의 금융 접근성을 높이고 재기할 기회를 주는 포용적 금융은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금융채권의 소멸시효는 상법상 5년(상법 제64조)이지만 법원의 지급명령 등을 통해 시효가 연장돼 연체 발생 후 약 15년 또는 25년 후에야 소멸시효가 완성된다. 소멸시효 이후에도 채무자가 빚의 일부를 상환하면 채권이 다시 부활해 불법·부당한 채권추심행위에 노출되는 사례가 많았다. 따라서 채권 자체를 소각하면 앞으로 이 같은 피해를 원천 봉쇄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 측 설명이다. 채권 소각 시 채무자가 일부를 변제하더라도 채권은 부활되지 않는다.
이번에 공공부문 채권이 소각되면 연체 기록과 시효 완성 여부 등 과거 기록이 완전히 삭제된다. 따라서 소각 이후 채무자는 바로 금융 거래를 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은행 등 민간 금융회사에서는 소멸시효 완성채권이 소각되더라도 일반적으로 신용정보보호법상 5년이 지나야 연체 기록이 삭제된다.
민간 금융회사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는 데다 소멸시효 완성채권 소각을 민간 금융회사에 강제적으로 밀어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다중 채무자들은 대부분 공공과 민간에 걸쳐 대출을 받았기 때문에 민간 회사에 자율적 소각을 유도하는 이번 조치의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창균 중앙대 교수는 "소멸시효 완성채권 소각은 민간 금융회사나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할 일이지 정부가 나설 사안이 아니다"면서 "정부가 할 일은 채권추심시장에서 불법·부당한 추심행위가 없는지를 감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그동안 정부는 소멸시효 완성채권의 추심·매각 금지 가이드라인을 통해 사실상 채권 소각에 준하는 효과가 발생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며 "그럼에도 불법·편법적 추심 피해 사례가 계속 발생해 이번에 일괄 소각하는 조치를 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용어 설명>
▷ 소멸시효 완성채권 : 금융회사가 채권 추심을 포기한 채권. 시효는 상법상 5년이지만 법원의 지급명령 등으로 15~25년으로 연장되는 경우가 많다.
[박윤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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