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기자, 잘 지켜보시오. 법원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아요. 겉으론 조용해 보이지. 그러나 내부는 그렇지 않아요. 머잖아 검찰이 기소한 적폐사건, 문재인 정부와 직접 관련된 재판에서 예상 못했던 결과들이 나올 거예요. ‘법원의 역습’이랄까. 아무튼 잘 지켜보세요.”
지난해 11월 법관 출신 변호사가 들려준 말이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되고, 국회에서 집권 여당이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하며 법원을 압박하던 무렵이다. 그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법원의 역습이라고?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 그때는 속으로 설마 했다.
그런데,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지난 3일 느닷없이 석방됐다. ‘박근혜 청와대’ 국정농단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 풀려난 것이다. 2017년 12월15일 구속됐으니 1년 하고 10여일 만이다.
국정농단 방조와 불법사찰 혐의로 각각 기소된 그는 별도로 진행된 두 차례 1심에서 징역 2년6월과 1년6월(합계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두 사건을 병합해 항소심을 맡게 된 재판부(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차문호)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검찰 쪽 요청대로 구속기간을 2개월 연장하거나 추가 기소된 불법사찰 혐의로 신규 구속영장을 발부하거나, 아니면 석방하고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하거나. 재판부는 세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석방된다는 얘기를 듣고 제일 놀란 사람은 아마도 우 전 수석 본인일 것이다. 그 역시 법률가라 (풀려나리라는) 기대를 안 했을 테니까. 항소심 재판부는 2개월 구속기간 연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더라도, 추가 기소 뒤 병합된 불법사찰 혐의로 새로운 구속영장을 끊어줄 수 있었다. 항소심으로 심급이 달라졌기 때문에 신규 구속영장 발부가 가능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논란을 무릅쓰고 석방을 선택했다.”(검찰 고위직 출신 변호사)
석연치 않은 석방 결정은 ‘뒷말’을 낳았다. 법조계에선 재판장인 차문호 부장이 검찰 조사를 받은 사실이 새삼 화제에 올랐다. 차 부장은 법원행정처의 지시를 받고 자신의 사촌이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상고법원 추진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차성안 판사에 대해 회유 시도를 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 전 수석 석방 결정에 이런 맥락이 작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법조인 말대로 법관의 판결이나 결정은 “헌법이 허용한 양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어서 확인이 불가능하다. 다만, 법원 내부의 어떤 기류를 반영한 것 아니냐는 시각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비슷한 사례는 앞서도 있었다.
“지방 사건이라 서울에는 잘 안 알려졌지만, 지난해 8월에도 주목할 만한 판결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가 ‘성완종 리스트’ 수사와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어서 주위 분들 하고 ‘저게 어떤 맥락에서 난 판결일까’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법관 출신 ㄱ변호사)
그가 말한 것은 창원지법 민사1단독 허성희 부장판사의 판결이다. 허 부장판사는 지난해 8월 노건평씨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한테서 특별사면 대가로 3천만원을 받았다는 특별수사팀의 발표로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국가는 노씨에게 5천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특별수사팀이 2015년 7월 수사 결과 발표 때 “노씨가 성 회장한테서 특별사면 대가로 3천만원 등을 받았으나 공소시효가 만료돼 불기소 처분한다”고 한 브리핑이 소송의 발단이 됐다.
허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특별수사팀이) 노씨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노씨가 피의사실을 범했다고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이나 단정적인 표현은 피했어야 함에도 피의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까지 나열함으로써 이를 듣는 언론이나 국민이 노씨가 피의사실을 저질렀으나 (단지) 공소시효가 도과해 처벌할 수 없다고 믿게 했다. 노씨가 정신적 고통을 받았음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씨의 청구금액인 1억원의 절반을 인용했다.
지난해 8월이면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가 한창일 때다. 게다가 당시 ‘성완종 리스트’ 수사를 맡은 특별수사팀의 팀장이 지금 사법농단 수사를 지휘하는 문무일 검찰총장이었다.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해 이렇게까지 넓게 배상책임을 인정해준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다른 법관 출신 변호사)
만약 이 판결이 확정된다면 국가는 문 총장 등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나중에 문 총장 등이 노씨 배상액의 상당 부분을 물어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일부에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 대한 교육부의 정석인하학원 임원 취임 취소 처분을 집행정지시킨 서울행정법원의 지난해 9월 결정도 주목한다. 이 결정으로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정석인하학원은 교육부 지시에 따를 필요가 없어졌다. 당시는 ‘국민 밉상’으로 낙인 찍힌 조 회장 일가에 대해 검찰과 경찰 등 11개 국가기관이 나서 집중적인 수사와 조사를 벌일 때다.
우 전 수석 석방이나 노건평씨에 대한 판결 등이 새삼스레 주목받는 까닭은 요즘 법원의 심상찮은 분위기 때문이다.
“‘어대’라는 말 들어보셨나. 김명수 대법원장을 어대, 어대 하길래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어쩌다 대법원장’의 준말이라고 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에는 사석에서 하는 대화에서도 판사들 대부분이 대법원장을 ‘대법원장님’이라고 깎듯이 존칭으로 불렀다. 그냥 ‘원장님’이라고 부르는 지방법원장, 고등법원장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요즘엔 ‘대법원장’ 뒤에 ‘님’자 대신 민망한 호칭을 붙인다. 그만큼 판사 사회의 민심이 싸늘하다. 판사들 불만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어쩌다 원장이 돼서 1년 반 동안 도대체 한 게 뭐 있냐’는 것이다. 원망과 실망, 불신이 뒤섞여 있다.” (법관 출신 ㄴ변호사)
불만을 표출한 일부 사례도 있었다. 최인석 울산지법원장은 지난해 11월29일 법원 내부 통신망인 코트넷에 ‘압수수색의 홍수’라는 글을 올려 검찰의 광범위한 사법부 수사를 비판했다. 그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범죄수사’라는 한 마디로 (무엇이든)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나라는 제대로 된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썼다가 젊은 판사들의 반발에 부닥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만은 법관사회의 특성상 수면 아래에 있다.
요인은 여러 가지가 중첩된 것으로 읽힌다.
우선 검찰 수사다. 법관 중 상당수는 지난해 6월15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수사 협조’ 발언이 사상 초유의 검찰 수사를 자초했다고 본다. 일반 국민 여론과는 거리가 멀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한다. 최근 저녁 자리에서 만난 한 고위 법관은 “김 대법원장은 (수사 협조 말고)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외통수가 아니었다”고 했다. 검찰에 불려가 조사받은 법관들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말도 보탰다. 판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검찰 수사 탓에 법원과 재판의 권위가 실추됐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도 ‘이상기류’를 감지하고 지난해 하반기 조직 다독이기에 나섰다. 서울 한남동 공관으로 판사들을 불러 저녁을 대접하고, 전국 법원 방문 횟수도 부쩍 늘렸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효과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김 대법원장은 올해 시무식에서도 ‘화합’을 유난히 강조했다.
김 대법원장의 ‘수사 협조’ 발언이 문재인 정부와 ‘사전 교감’을 통해 나왔다는 의심도 깔려 있다. 청와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법부와 검찰에 대한 ‘개입 불가’ 입장을 거듭 확인해왔지만, ‘그럴 것’이라는 의심까지 불식시키지는 못했다. 여전히 누군가의 ‘기획’이라고 믿는 법관들이 존재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13일 법원 70주년 기념식에서 “(사법농단) 의혹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며 검찰 수사에 힘을 실은 듯한 대목도 “남의 잔치에 와서 할 말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회자된다.
“작년 하반기쯤, (법원) 부장급 이상이 모인 자리였는데, 자괴감을 많이 토로하더라. 자기들이 집단적으로 시장 좌판에 횟감으로 던져졌다는 분위기? 전엔 존경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대접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 아니냐. 평소 보수 성향의 판사들일수록 검찰 수사에 대한 반발 강도가 셌지만, 진보적 입장의 판사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사를 받는 상황이라면 김명수 대법원장이 판사들 자존심을 살려주는 방안도 생각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았다.” (검찰 출신 변호사)
인사 문제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얘길 들어보면,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뒤 ‘고법부장’(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가 폐지되면서 법관들이 ‘쳐다볼 사다리’가 없어졌다. 이미 법원장이나 고법부장을 단 법관들도 변호사 개업을 극구 꺼린다. 대형 로펌의 구체적인 영입 제안을 받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법원 밖이 정글이라 생각하는 다수는 눌러앉기가 대세다. 기존 고법부장 승진에서 제외된 사법연수원 24기 이상에서도 법원에 그대로 남아 지법부장 등을 맡은 이들이 많다. 김 대법원장을 지지하는 법관들은 주로 지법부장보다 아래쪽에 분포해 있다.
지난해 헌법재판관 임명을 앞두고 ‘뒷말’이 나올까 봐 문재인 대통령이 잘 아는 이석태 후보자를 김명수 대법원장이 추천하고, 김명수 대법원장과 가까운 김기영 후보자를 더불어민주당이 추천했다는 이른바 ‘교차 추천’설이 법관사회에서 먹히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한마디로 반감이 팽배하다. 그냥 열심히 재판만 하는 평범한 판사들도 냉소적이거나 적대감을 드러낼 정도다. 법관 인사제도의 변화는 물론 검찰 수사의 배경에 청와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한테 임명장을 받은 법원장과 고법부장들은 물론이고, 지법부장급 일부까지 그런 인식과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법원에서 주류라고 생각한 사람들일수록 반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흠 그래, 잘들 해봐라. 나도 기회만 있으면 표시 안 나게 어깃장 놓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고, 실제로 재판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리에 그런 사람들이 앉아 있다. 대통령 지지율이 점차 떨어지고, 김명수 대법원장의 권위가 흔들리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우 전 수석 석방은 서곡에 불과할지 모른다.”(법관 출신 ㄴ변호사)
우 전 수석의 석방은 고법부장이 결정했다. 실제로 수많은 적폐 수사 재판이 지법부장 혹은 그들을 넘어 고법부장들 손에 가 있다. 어디서든 ‘제동’이 걸릴 수 있는 상황이다. 이미 대다수 적폐 수사에 적용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에 대해서는 인정 범위를 크게 좁히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설령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파기된다 해도 ‘파기환송심’ 재판은 대부분 고법부장들이 다시 맡게 된다. 과거 ‘치과의사 모녀 살해 사건’처럼 대법과 고법을 오가는 ‘핑퐁 재판’이 재연될 수 있다.
이들이 반감을 표출하는 대상은 이른바 ‘적폐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저런 사건들이 법원에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당장의 관심사는 10여일 앞으로 다가온 김경수 경남지사에 대한 선고다.
마침 김 지사의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의 성창호 부장판사는 지난해 검찰 사법농단 수사팀의 조사를 받았다. 2016년 ‘정운호 게이트’ 때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로 법원에 제출된 검찰 수사기록 일부를 신광렬 형사수석부장의 지시에 따라 복사해준 혐의(공무상 비밀누설)와 관련해서다. 검찰은 법원행정처가 당시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른 김수천 인천지법 부장판사의 혐의를 확인하려고 신 부장판사를 통해 수사기록 입수를 지시한 것으로 파악했다.
성 부장은 지난 4일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 관련 첩보 수집을 지시한 혐의(개인정보보호법 위반)로 기소된 남재준 전 국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목받았다.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이달 25일에 있을 김경수 지사 선고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김 지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그런 김 지사에게 특검이 징역 5년을 구형한 것은 실형을 선고해 달라는 것이다. 댓글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과 직결됐던 과거 국정원 댓글 사건과 유사한 점이 있다. 드루킹 사무실에 간 사실은 김 지사도 인정한다. 가서 뭘 했느냐를 놓고 김 지사와 드루킹의 진술이 정반대로 엇갈린다. 재판부가 판단할 몫이다. 김 지사는 선거법 위반 혐의까지 기소돼 있어 벌금 100만원 이상이 확정되면 지사직을 잃게 된다.” (검찰 고위직 출신 변호사)
강희철 선임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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