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이념전쟁’을 시작했다. 12일 교육부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발표하기로 하는 등 학계와 시민사회, 야권의 강한 반발에도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이는 모양새다.

국정교과서는 역사전쟁을 넘어 이념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주제다. 새누리당은 ‘종북’ 프레임으로 여론전에 나섰다. 김영수 새누리당 수석대변인은 11일 브리핑에서 “북한의 세습정권을 미화하고, 김일성 주체사상을 가르치는 사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일본군 위안부와 일본식 독도 용어를 사용하는 교과서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같은 날 당정 협의회에서 “(기존 검인정 교과서가) 반한·반미, 친북 성향 기술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훼손하고 국민 주권에 근거한 헌법 대신, 민중 주권에 근거한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반박에 부딪쳤다. 새정치민주연합 한국사교과서저지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도종환 의원은 11일 “교과서의 내용을 보면 주체사상이 김일성 개인숭배로 이어졌다고 가르치고 있고, 또 그것이 반대파를 숙청하는 구실, 북한주민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이 교과서에 분명하게 기술돼 있다”고 반박했다.

국정교과서 여론전을 위한 새누리당의 키워드가 ‘종북’이라면 새정치연합의 키워드는 ‘친일’ ‘독재’다. 유은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11일 브리핑에서 “친일독재를 미화해 부끄러운 과거를 세탁하고, 왜곡된 역사로 미래세대를 통제하겠다는 무참한 음모, 이념 갈등을 부추겨 총선 득실을 따지는 술수 앞에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정부와 여당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위한 당정협의회가 열린 11일 오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지도부가 서울 여의도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전문가 교수들이 참석한 긴급 대책회의를 시작하기전 국정화 반대를 촉구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민중의소리
 
정진후 정의당 원내대표는 12일 열린 상무위원회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친일을 미화하고 독재를 옹호하는 반대한민국 선언”이라며 “히틀러의 나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 그리고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군사독재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우리 국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새누리당은 국정교과서가 ‘친일 독재 미화 교과서’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1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역사교과서 정상화를 친일독재로 매도한다”고 주장했다. ‘국정교과서’ 대신 ‘균형 교과서’, ‘교과서 국정화’ 대신 ‘정상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근혜 정부가 대다수 학자들이 반대를 표명해 집필진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10개월여 만에 국정교과서를 제작하겠다고 밀어붙이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승부수라는 해석이다. 이념논쟁을 통해 보수층 결집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 친박계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간에 벌어진 공천 전쟁도 국정교과서 논의로 인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당정청은 언제 대립했느냐는 듯 일사분란하게 국정교과서를 계기로 하나가 됐다. 나아가 국정화 강행은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상황에서 이념전쟁을 일으켜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념전쟁의 결과가 보수층 결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층, 야권지지층도 하나로 결집할 가능성이 높다. 이념전쟁은 정책 이슈가 아니라 ‘정체성’에 관한 이슈이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은 황우여 부총리(교육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제출하고 각종 법안과 예산안까지 연계해 국정교과서를 저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시민사회와 연계한 장외투쟁까지 예고했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뉴스토마토에 기고한 글에서 “제1야당은 여당에 비해 절반 정도의 정당지지율을 얻는 데 그치고 있다. 이미 여권성향층은 여당으로 충분히 결집되어 있다는 의미다. 반면 야권성향층은 그렇지 않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정체성과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에 야권층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정부여당에 대한 반감의 강도를 높이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야당 지지율의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 대립각을 세우던 야권 인사들도 국정교과서를 두고는 비슷한 입장을 내비치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11일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황 부총리 해임건의안을 제출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청년경제 관련 기자회견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정교과서 문제로 이념 전쟁을 벌이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문 대표와 대립각을 세우던 안철수 의원도 “박근혜대통령에게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와 낡은 이념공세를 즉각 중단해 줄 것을 요구한다”며 국정교과서에서는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호남을 기반으로 한 신당 창당을 준비 중인 천정배 의원은 개인성명을 통해 “박근혜 정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헌법 파괴와 독재 부활의 암울한 역사로 끌고 가려는 쿠데타적 발상”이라고 밝힌 뒤 ‘수구기득권세력의 역사독점에 반대하는 비상대책회의’를 제안했다.

진보 보수가 서로 결집할 경우 변수는 중도층이다. 새누리당은 중도층에 ‘해볼 만한 싸움’이라 보고 있는 듯하다. ‘국정화’라는 방법론에는 반대해도 현재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가 이념 편향적이라고 느끼는 국민이 많다는 이유 때문이다.
  
▲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가운데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동사거리에서 한국사 국정교과서 거부 청소년들이 역사를 왜곡할 국정교과서를 거부한다며 기자회견을 마치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동아일보에 따르면 새누리당 핵심 관계자는 “지난주 중반 당의 기류가 달라졌다”며 “보수, 진보 양극단을 놓고 보는 게 아니다. 결국 중도를 겨냥한 싸움인데 교과서 내용의 문제로 접근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이 역사교과서의 이념 편향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 것이라 예상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민생 이슈가 아닌 이념문제를 강하게 제기할수록 중도층의 지지를 받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국정감사에서 고영주 MBC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 의해 이념 논쟁이 시작된 상황이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9일 ‘한수진의 SBS 전망대’ 인터뷰에서 “고영주 이사장은 교과서 단일화 국정화에는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 내다봤다.

‘노무현은 변형된 공산주의자’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역사학자의 90%는 좌편향’ ‘법원에 김일성 장학생 있다’ 등의 발언은 보수층 일각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며 중도층이 보기엔 ‘우편향’됐다고 볼 수밖에 없는 발언이다. 예컨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를 모두 인정해야한다는 입장에서 보기에도 ‘교과서에 저런 역사관을 담겠다는 건가’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줄 수 있다는 것.

결국 박근혜 정부가 임기 후반부에 던진 이념전쟁이 정부의 발목을 잡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야권 지지층의 결집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중도층의 지지가 이탈하는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 박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은 북한과 대화 국면, 외교적 성과 등의 결과라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전체의 대표자’ 역할을 하면서 지지율이 올랐기에 이념전쟁을 통해 보수층의 대표자로 자리매김할 경우 지지율이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박근혜 정부가 던진 이념전쟁이 교육현장에 미칠 영향이다. 수능을 준비해야할 학부모와 학생들, 그리고 현장에서 역사교육을 해야 할 교사들은 정부가 던진 이념논쟁의 피해자들이다. 날림으로 제작될 수밖에 없는 교과서는 학교현장에서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역사교육은 이념전쟁의 전유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