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개 대표로 나서 밀실협의 / 고위급 협의 두달 만에 쟁점 타결 / 日 군함도 유산 등재 추진 갈등 / 韓·日 서울정상회담 계기 물꼬 / 朴, 강행 의지.. 12월 최종 타결
2015년 12·28 한·일 일본군위안부 문제 합의가 외교 당국을 배제한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이하 당시 직책)과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 사이의 밀실 협의였음이 확인됐다. 박근혜 대통령 감독·이병기 실장 주연·외교부 조연의 대국민 기만극이었던 셈이다
오태규 한·일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 위원장은 27일 검토 결과를 발표하면서 “위안부 합의는 고위급 비공개 협의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국장급 협의는 조연에 불과했다”며 “실질적인 내용은 고위급 협의에서 논의되었고 고위급 협의 개시 후 국장급 협의는 역할이 제한적이었다”고 밝혔다.
이병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주일대사 및 국가정보원장 역임)과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 |
TF에 따르면 2014년 3월25일 한·미·일 3국 정상회의 과정에서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국장급 협의 개시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외교부 동북아국장과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간 첫 국장급 협의가 2014년 4월16일 열렸다.
이후 외교 당국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진전이 없자 박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고위급 비공개 협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양측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해 말 한국이 고위급 협의 병행 추진을 결정했고, 이후 일본이 협상 대표로 아베 총리의 책사로 불리는 야치 국가안전보장국장을 내세움에 따라 우리는 박 대통령 지시로 이병기 국가정보원장이 협의 대표로 나섰다. 이 원장은 2015년 2월 1차 협의 후 같은 달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고위급 협의 대표를 계속 맡았다.
더불어민주당 박병석 의원은 이와 관련해 이병기 원장 시절 국정원 내에 TF가 설치됐다는 주장을 했다. 박 의원은 지난 10월12일 국회 외교통일위의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외교부는 (위안부 협의에) 실질적으로 개입할 수가 없었다. 청와대에 파견된 외교부 행정관이 사후에 간단한 내용을 통보하는 형식밖에 하지 못하고 모든 일은 국정원에 있는 TF팀에서 하게 된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10월26일 국회 외통위의 주일본대사관 국감에서는 이정일 주일 공사가 당시 한·일 비공개 협의의 참석 멤버이고 김옥채 주일본 후쿠오카(福岡)총영사가 실무 지원을 했다는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다.
윤병세 전 외교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전 일본 외무상이 2015년 12월 28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자료사진 |
외교부를 배제한 대외 교섭은 정부조직법 위반 소지가 있다. 정부조직법 제30조는 “외교부 장관은 외교, 경제외교 및 국제경제협력외교, 국제관계 업무에 관한 조정, 조약 기타 국제협정, 재외국민의 보호·지원, 재외동포정책의 수립, 국제정세의 조사·분석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고위급 협의는 2015년 2월 1차 협의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28일 합의 발표 직전인 12월23일까지 8차례 협의가 열렸다. 주무 부처인 외교부는 고위급 협의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고위급 협의 결과를 청와대로부터 전달받은 뒤 이를 검토해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하는 보조적인 역할만 했다.
양측이 대부분 쟁점에 잠정 합의한 것은 고위급 협의 개시 약 2개월 만인 2015년 4월11일 제4차 협의에서다. 잠정 합의 직후 외교부가 불가역적 표현의 삭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 11월 2일 청와대에서 한·일 정상회담 직전 기념촬영을 하면서 악수를 청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바라보고 있다. 박 대통령 취임 후 처음 열린 이날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조기에 해결되도록 양국 간 협의를 가속화하는 데 합의했다. 자료사진 |
양국 정상의 추인을 받는 과정에 일본이 제3국(해외) 기림비 설치 움직임을 한국 정부가 지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추가를 희망하고, 이른바 군함도 문제를 비롯한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제로 갈등이 커지면서 협의는 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협상의 돌파구를 다시 연 것도 양국 정상이었다. 2015년 11월2일 서울에서 개최된 한·중·일 정상회의 계기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위안부 문제를 타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박 대통령은 연내 합의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오 위원장은 구체적인 근거에 대해 “두 협의(고위급 및 국장급 협의)에 대해서 핵심적으로 관여했던 부분들은 저희가 다 면담했다”고 말해 관련자 조사 중 관련 발언을 확보했음을 시사했다.
12월28일에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이 양국 협의 결과를 대외적으로 공표했다. 합의를 주도한 청와대는 외교부에 “기본적으로 국제무대에서 위안부 관련 발언을 하지 말라”는 비상식적인 지시를 내린 사실도 이번 검토 과정에서 확인됐다.
TF는 검토 보고서를 통해 “위안부 협상과 관련한 정책의 결정 권한은 지나치게 청와대에 집중돼 있었다”며 “대통령의 핵심 참모들은 대통령의 강경한 자세가 대외관계 전반에 부담을 초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과 연계해 일본을 설득하자는 대통령의 뜻에 순응했다”고 밝혔다. 이어 “더구나 대통령이 소통이 부족한 상황에서 조율되지 않은 지시를 함으로써 협상 관계자의 운신 폭을 제약했다”고 지적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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