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미국의 지적재산권(지재권)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미국 의회가 제정한 법률이 한국에서 시행되는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포털 사이트 같은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의 법적 책임(주로 저작권 침해와 관련된 법적 책임)에 대한 조항은 미국 저작권법 조문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았다. 영화관에서 상영중인 영화의 일부 또는 전부를 녹화장치로 녹화하는 행위를 형사처벌하는 이른바 ‘도촬 규정’ 또는 ‘캠코더 조항’도 미국의 형법 규정과 동일하다. 통상 관료들이 자유무역협정이란 이름으로 협상을 벌여 미국의 사법제도를 직수입하는 꼴인데, 국민에게 위임받은 입법권의 주체인 국회는 이런 점을 검토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경제상생 강조한 국내헌법
미국법에 밀려 무력화 위기
미국법에 밀려 무력화 위기
더 큰 문제는 미국 법률에 비해 지재권 보호만 더 강조한 조항이 많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사이트 폐쇄와 관련된 부속서한이다. 부속서한은 저작권을 침해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아니라, 저작물의 무단 복제·전송을 허용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대상으로 한다. 부속서한에 직접 거명된 웹하드나 피투피(P2P·개인 간 파일 공유) 사이트는 말할 것도 없고,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국내 포털 사이트도 당연히 대상에 포함된다.
저작물의 무단 복제나 전송을 허용한다는 이유로 인터넷 사이트를 폐쇄하겠다는 부속서한은 지금까지 어떤 자유무역협정에도 들어 있지 않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아무리 지재권 보호를 강조한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내용의 부속서한을 협정문에 포함시켰는지 경위가 궁금하다.
더욱이 이런 의무를 한국만의 일방 의무로 했다는 점은 한마디로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문제의 부속서한은 모두 5개 문장으로 돼 있는데, 사이트를 폐쇄하는 목적에 동의한다는 첫 문장만 한·미 양국의 의무로 돼 있고, 나머지 4개 문장은 모두 대한민국만 주어로 돼 있다. 이처럼 한국의 일방 의무로 된 나머지 문장에는 ‘사이트 폐쇄 목적으로 대한민국 내에서 지재권 집행을 강화한다’는 문장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이 부속서한은 한국에는 단순히 어떤 정책 목표를 선언한 것이 아니라 실제 집행 강화로까지 이어지는 행동의 약속인 것이다.
이처럼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지재권 집행’을 강조한다. 지재권 집행이란 지재권의 보호를 위한 민형사 및 행정 조치를 말한다. 그런데 지재권 보호를 위한 집행 조처가 균형을 잃고 지재권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항이 너무 많다. 예컨대 지재권을 침해한 물품을 폐기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지재권 침해에 사용된 재료나 도구까지 폐기하는 조항이 있다. 아무리 지재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더라도 침해에 사용된 재료나 도구를 모조리 폐기하는 것은 지나치다. 돈을 빌린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기 위해 차를 타고 도주했다고 하여 이 차를 폐기 처분하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근 애플이 독일 뒤셀도르프 법원에서 삼성전자의 갤럭시탭 판매 금지 결정을 얻어낼 때, 당사자인 삼성전자는 독일 법원에서 이런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일방구제절차’ 때문인데, 독일 법원은 애플의 신청만으로 결정을 내렸고, 상대방인 삼성전자로부터는 아무런 의견을 듣지 않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이런 일방구제절차를 민사집행의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또한 법정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 지재권자는 자신이 입은 손해 금액을 입증하지 않아도 법에서 정한 일정한 금액을 배상받을 수 있게 했다. 이 제도는 우리나라 민법의 실손해 배상 법리와 맞지 않고, 실제 손해액보다 터무니없이 많은 배상이 인정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특허 연계된 의약품 정책도
복제약 지연등 부작용 가득
복제약 지연등 부작용 가득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따르면 약제비 절감도 어렵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의약품 허가 절차와 특허를 연계한 제도 때문이다. 이 제도는 전세계적으로 미국만 자발적으로 시행하는 비상식적인 제도이다. 가령 자동차나 화장품을 시판하려면 일정한 안전기준을 충족해야 하는데, 이런 안전기준 충족 여부를 판단할 때 타인의 특허권을 침해했는지는 살피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의약품에서만 복제약 품목 허가 과정에서 특허 침해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는 제도가 미국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는 세계 10대 제약사의 절반을 차지하는 미국계 다국적 제약사들의 로비에 미국 의회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수입되면 값싼 복제약 출시가 늦어지고, 이로 인해 약제비 부담이 증가해 건강보험료가 올라갈 위험이 있다.
우리나라 헌법은 시장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고,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이 경제 민주화 조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상생 협력을 도모하기 위한 법률(상생법)이나, 중소 유통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다. 통상교섭본부도 이미 이 점을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런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분쟁을 제기할 동향이 아직 없다는 점을 들어 국회 비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정부의 해명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투자자가 국가를 상대로 중재 절차에 회부할 수 있는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두고 있고, 투자자 범위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넓다. 요컨대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상대방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협정 위반임이 분명한, 그래서 여야가 지난해 말 어렵게 합의한 유통법과 상생법이 당장 무력화될 것이 뻔한데도 아이에스디를 폐기하느냐 마느냐의 단순 이분법으로 논의가 진행된 것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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