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유 전 회장 죽음 둘러싼 의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새로 발견된 메모엔 법적 대응 언급하는 직설 가득
새로 발견된 메모엔 법적 대응 언급하는 직설 가득
‘유병언 일당 탐욕(배 수선, 과적).’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2014년 7월8일에 남긴 메모다. 이 메모는 당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의 지시를 옮겨적은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한 달 전 안전행정부는 세월호를 운행한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일가를 붙잡기 위해 전국 임시 반상회를 추진하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대응에 실패한 정부에 쏠리는 비난을 돌리기 위한 유례없는 공권력 동원이었다.
유병언 죽음 둘러싼 사인 논란
유 전 회장의 죽음은 숱한 의혹에도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한겨레21>이 입수한 인천지방검찰청의 ‘유병언 의심 변사체의 유병언 동일인 여부 확인 및 변사체에 대한 부검 감정서, 사체검안서 사본 첨부보고’(이하 보고서)를 보면, 검찰은 “2014년 6월12일 오전 9시께 전남 순천시 서면의 한 매실밭에서 발견된 주검은 유병언”이라고 결론지었다.
검찰과 경찰은 순천 매실밭에서 변사체가 발견된 지 한 달이 지난 7월21일 이 주검이 유 전 회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서울과학수사연구소는 한 차례 더 감정을 거쳐 8월18일 공식적으로 이 주검이 유 전 회장임을 확증했다.
‘유병언은 죽었다’는 정부의 결론은 법치의학적 감정 결과와 유전자 분석 결과에 따른 것이다. 법치의학적 감정을 통해, 발견된 주검의 ‘성별은 남성, 나이는 72.06~74.63세(오차구간은 ±5.2세), 신장은 159.22cm(오차구간은 ±3.8cm)’로 확인됐다. 유 전 회장의 생전 기록을 보면, 그는 이 오차구간에 포함된다. 유전자 분석은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소주병과 스쿠알렌병, 유 전 회장이 마지막에 머문 것으로 추정되는 순천의 한 별장 침대보, 경기도 안성 금수원의 숙소에서 발견된 빗에서 채취한 유전자와 유 전 회장의 형인 유병일씨의 구강세포에서 검출된 시료 등을 비교한 것이다. 오른쪽 집게손가락 지문 1점을 채취해 확인한 결과, 유 전 회장의 생전 지문 기록과 일치했다.
이 보고서 내용에 대해서는 유족이나 유병언이 교주인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관계자들도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보고서가 유 전 회장임을 입증하는 내용과 다른 증거로 숨진 이가 유 전 회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유 전 회장을 직접 치료했던 치과의가 주검 어금니와 송곳니의 보철치료 흔적을 확인한 뒤 유 전 회장임을 확증한 것이다.
이처럼 명백해 보이는 결론에도 유 전 회장을 둘러싼 의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가장 큰 원인은 사인이다. 인천검찰의 부검 감정서 등을 보면, “유병언(남자, 73세)에 대하여 법의영상의학적 검사, 법치의학적 감정, 마약독성화학적 검사를 실시하였으나 사인은 불명”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를 둘러싸고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것이다.
좌우 뒤집힌 글자의 새 메모
추정 사인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고령을 감안한 자연사다. 당시 검찰 쪽에서는 마지막 피신처인 별장에 유 전 회장이 혼자 있었고, 홀로 도피를 시작했던 점으로 미뤄볼 때 어두운 산속을 헤매다 굶은 상태로 저체온증이 일어나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다음은 타살설, 독살설 등 외력에 의한 타살이다. 유 전 회장이 다른 곳에서 살해된 뒤 순천 매실밭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단 검찰 보고서는 독살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다. 물론 국과수 검사는 맹독을 기준으로 이뤄지는 만큼 일반 약과 독물은 검사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모두 현재 상황에서 입증하기 어려운 주장들이다. 결국 유 전 회장의 죽음은 ‘과학적’으로 입증됐지만, 사인 역시 ‘과학적’으로 불명인 셈이다.
유 전 회장이 사망한 뒤 불거진 의혹 가운데 풀린 내용도 있다. 일부 언론은 주검 부근에 돈, 안경, 시계 등 도피에 필요한 물품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타살 뒤 이동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기독교복음침례회 관계자는 “원래 유 전 회장은 돈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 가방 등 유류품에서 돈이 나왔다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안경이나 시계도 평소 몸에 지니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유 전 회장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사인만이 아니다. 그는 거처가 있었던 경기도 안성시 금수원(기독교복음침례회 본산)을 떠나 순천의 한 별장에 피신하다 검경의 체포 작전이 벌어진 직후 사라진 뒤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가 안성에서 순천으로 이동한 동선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한겨레21>은 세월호 참사 4주년을 맞아 유 전 회장의 사망을 둘러싼 여러 의혹을 취재하다 그가 남긴 새 메모를 발견했다. 유 전 회장이 세월호 참사 직후인 4월24일부터 5월3일까지 금수원 인근 지인의 집에 있으면서 쓴 글이다. 당시 유 전 회장은 두 차례 측근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메모 안에는 김혜경 한국제약 대표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청해진해운 김한식 사장과의 관련성을 부인하는 “청해진 사장 김한식의 전화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는 내용은 이미 언론에 공개됐다)이 담겨 있다. 유 전 회장은 거울에 비춰봐야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글자의 좌우를 반대로 뒤집어 쓰는 습관이 있었다. 이 글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작성됐다.
“한국제약은 세모와 라이벌 관계의 회사일 뿐 김혜경은 오래전 여의도 바지선에 있을 때 세모연구소 직원으로 약사였기에 스콸렌 개발일로 거들었었고 정식 비서가 아니었음”
“그런 터무니없는 얘기에 대해 법적 대응이 꼭 필요할 것임”
형식이나 필체상 유 전 회장이 쓴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내용은 직설적이다. 이전에 등장하는 메모엔 검찰 등 공권력이나 언론에 대한 조롱이나 시적 표현 등이 담겨 있었지만, 이 글엔 구체적인 지시가 나온다.
메모로 내린 지시는 명예훼손 소송?
유 전 회장이 법적 대응까지 언급하며 다소 다급해 보이는 메모를 남긴 이유는 당시 상황을 복기하면 짐작할 수 있다. 그때 검찰은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유병언 일가에 돌리기 위해 이들을 겨냥한 수사를 진행했다. 세월호 참사가 터진 직후 인천지검 특별수사팀은 외국에 체류 중인 아들 유혁기씨와 측근인 김혜경 한국제약 대표, 김필배 전 문진미디어 대표 등을 수사 대상으로 특정하고 소환을 저울질했다. 이는 유 전 회장에 대한 직접 조사가 목전에 있음을 의미했다. 유 전 회장은 무엇보다 김 대표와 자신이 내연관계라는 여론몰이가 이뤄지는 상황에 “악의적인 중상모략”이라는 말을 남겼다.
유 전 회장의 메모는 곧바로 기독복음침례회 실무진에게 전달됐고, 이후 이 내용과 관련해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한 정정보도 요청과 명예훼손 소송이 이뤄졌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1년5개월여가 지난 2015년 9월까지 구원파가 언론중재위에 조정을 신청한 건수는 1만6117건이나 된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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