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0년 7월 대구. 당시 경북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A씨는 조교 B씨를 마음대로 껴안았다. 강제로 키스를 하고, 자신의 성기도 만지게 했다. 이 사건으로 A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A씨는 B씨를 도운 여성 단체 ‘대구여성의전화’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인터넷과 인쇄물 등을 통해 A씨의 범행사실과 실명, 소속을 공개했다는 이유였다.
#2. 2012년 7월 캘리포니아. 미국인 남성 C는 술을 마셔 의식이 없는 미국인 여성 D를 강간했다. 이로 인해 C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선고가 내려진 바로 그날, C는 명예훼손 혐의로 D를 역고소했다. D와 그 가족이 페이스북에서 C를 ‘강간범’이라고 칭했다는 이유였다.
2월1일 오전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흰 장미를 달고 검찰 내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흰 장미는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인 '미투'를 상징한다. © 사진=연합뉴스
성폭력 피해 공개했단 이유로 “벌금 200만원” 판결
두 사례에서 나타난 성폭력 피해자 측은 모두 가해자를 지목하고 범행사실을 공개했다. 이 때문에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판결은 달랐다.
국내에서 일어난 ‘사례1’에서 여성 단체는 원심과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각각 200만원과 1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해진 것. 나중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명예훼손 혐의를 벗기까지는 5년이란 힘든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난 ‘사례2’에서 D씨의 명예훼손 혐의는 15분 만에 없던 것이 됐다. 판사가 “논할 가치가 없는 사건”이라며 원고 측 주장을 기각했기 때문이다. 영국 가디언은 이 사건을 두고 2016년 10월 “성폭행 가해자가 어떻게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할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의문과 공분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형법상 명예훼손죄 자체를 인정않는 나라도 많아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넓게 퍼지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 와중에 국내에서 성립되는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피해자들의 고백을 주춤거리게 만든다는 지적이 최근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 초 ‘사실을 말해도 고소당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폐지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은 3월1일 현재 약 3만9000명의 동의를 받았다. 청원 제기자는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이 참 답답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 형법에 의하면, 공개적으로 사실을 알려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성폭력을 당한 사람이 피해 내용을 폭로하면, 그 내용이 사실이라도 가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가 성립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나라들은 피해자가 공개한 내용이 사실일 경우 죄를 묻지 않는다고 한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서울대 교수 시절 논문을 통해 “OECD 수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범죄화하는 나라는 소수”라고 했다. 심지어 형법상 명예훼손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뉴질랜드, 유럽, 그리고 미국의 각 주정부 등이 그 예다.
일단 미국에선 명예훼손 혐의로 소송을 진행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를 수정헌법 1조로 강력하게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2013년 명예훼손 관련 법조항을 대폭 바꿨다. 사문화 돼있던 명예훼손죄를 형법에서 아예 폐지했고, 민법상 명예훼손죄의 성립 요건도 강화했다.
형법상 명예훼손죄를 인정하지 않는 건 국제적인 흐름이다. 유엔 인권위원회가 2011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에 명예훼손 형사범죄 폐지를 권고한 것도 그래서다.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역시 폐지할 것을 요청했다.
오직 공익 위할 때만 처벌 면하는 사실적시…유엔도 우려 표명
단 누군가에게 불리한 사실을 알렸다고 해서 무조건 명예훼손죄가 성립되는 건 아니다. 형법 310조에 따라 ‘공익성’이 인정되면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즉 사실 공표가 오로지 공익을 위한 행위였다면 예외적으로 처벌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사례1에서 여성 단체에 유죄 판결을 내린 1·2심 재판부는 피고의 공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성 단체가 범행 사실을 드러내 원고 A씨를 비방하려는 다른 의도도 의심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유엔은 공익성에 대한 조건도 완화할 것을 권고했다. 유엔 인권위는 2015년 11월 “공익 목적이 아닐 경우 사실을 말했을 때도 처벌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고 했다. 김성돈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논문을 통해 “우리나라 형법은 명예보호를 ‘원칙적’ 우위에 두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예외적인’ 우위성을 인정하는 형법이 있지만, 자정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명예훼손죄 자체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전략적인 협박 도구로 악용된다”고 했다.이와 같이 주장한 선문숙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3월1일 “성폭력 가해자가 명예훼손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피해자들은 공론화를 주저하며, 소송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입을 닫거나 합의해준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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