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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March 3, 2018

위기 때마다 "간판 바꿔".. 정치 가치는 '실종'

당명의 정치학 / 역대 당이름 270개.. 보·혁 구별없이 3년 쓰고 '개명'
올해 여의도에는 두 개의 정당 간판이 새롭게 등장했다. 야권 정계개편의 결과로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이 지난달 신설 등록을 마쳤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자취를 감췄다. 지난해에도 제1 야당이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개명한 데 이어 진보정당인 민중연합당과 새민중정당이 합친 민중당이 새로 출범했다.
2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중앙당 등록일람표’에 따르면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이후 최근까지 공식 등록절차를 밟은 정당은 총 204개에 이른다. 중복된 당명을 사용한 사례까지 합치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모두 270여개의 당명이 사용됐다. 그러나 우리나라 중앙당의 존속기간은 평균 3년 11일에 불과하다. 중앙당 등록은 그대로 유지한 채 명칭만 개정한 경우도 감안하면 실제 같은 당명을 유지한 기간은 이보다 훨씬 짧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한국에선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가 금세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원내 정당 가운데 최장수 당명을 보유한 곳은 정의당이다. 4년 7개월째 같은 이름이다. 정의당은 2014년 지방선거와 오는 6·13지방선거에서 같은 당명으로 출마하는 유일한 원내 정당이기도 하다.

◆당 간판 바꿔달기는 보수·진보 구별 없어
여당은 2015년말부터 더불어민주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왔다. 1988년 창당한 신한민주당에서 출발해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창당한 평화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등을 거쳐 총 10번이나 이름을 바꾸며 지금에 이르렀다. 민주당(꼬마 민주당 포함)이라는 당명이 세 차례 쓰였고 그 외에도 새천년민주당, 민주통합당, 통합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 등과 같이 대부분 ‘민주’를 포함했다. 백범 김구 선생과 해공 신익희 선생 등 민주계의 적통을 계승하자는 취지다.
보수 정당의 이름 바꾸기도 이에 못지않다. 자유한국당의 뿌리는 1996년 창당한 신한국당이다. 이후 한나라당,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 명칭을 쓰고 있다. 신한국당 역시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의 후신이라는 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시절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시초로 보기도 한다.
보수진영의 핵심 가치로 꼽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연상할 수 있도록 주로 ‘민주’와 ‘자유’를 넣어 당명을 만들었다. 당명은 자주 바뀌었지만 당의 상징색은 민자당 때 채용한 파란색을 고수했다. 자주 바뀌는 당명 탓에 유권자가 겪는 혼란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였다. 파랑은 2012년 새누리당으로 개명할 때 당의 상징색을 빨간색으로 바꿀 때까지 20년 가까이 보수정당을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최근에는 여야 가릴 것 없이 순우리말 당명을 채용하는 추세다.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 바른정당의 ‘바른’, 새누리당의 ‘새누리’ 등이 대표적이다. 한자를 쓰는 것보다 친근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고, 중도파 비중이 높은 젊은 층을 겨냥한 포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외 정치 선진국은 우리나라와 사정이 딴판이다. 특히 원내 다수 의석을 보유한 주요 정당의 경우에는 최소 수십년에서 길게는 200년 가까이 된 당명을 쓰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양당 체제인 미국은 민주당이 1828년, 공화당이 1854년부터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의회 정치의 시조격인 영국에서도 노동당과 보수당이 각각 1906년과 1912년부터 당명을 바꾸지 않았다.
◆일단 위기 모면하자는 문화가 단명 자초
우리나라 정당이 잦은 합당과 자진해산, 당명 변경 등으로 부침을 반복한 것은 아직 성숙한 정치문화가 자리잡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전문가들은 이념정치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고, 정치인 역시 가치보다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 계파정치에 매몰된 결과라고 설명한다. 오랜 기간 누적된 정당정치를 바탕으로 이념과 철학에 대한 논쟁을 거듭해온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단시간에 산업화·민주화를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거물급 정치인이 구심력을 발휘하기 쉬운 구조가 되면서 이합집산을 반복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DJ는 평화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등을 창당할 때마다 세 규합에 성공했고 집권까지 했다. 보수진영에서도 위기국면 때마다 당명 개정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신한국당은 이회창 총재 아들의 병역 비리가 터졌던 1997년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꿨고, 선관위 디도스공격 파문과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 등으로 위기에 몰리자 다시 새누리당으로 개명했다. 지난해에는 국정농단 사태로 지지율이 급락한 상황에서 자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러나 새로운 당명을 바탕으로 한 컨벤션 효과가 항상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20대 국회 원내 3당인 바른미래당은 지난달 창당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오히려 지지율이 하락했다. 민주평화당도 지지율이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어 신당 효과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정인 중심의 정당시스템에서 탈피하고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학 교수는 “정당이 이름을 자주 바꾼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정당이 잘못을 많이 했다는 뜻”이라며 “정당은 일단 이름을 바꿔서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주려고 한 것이고, 여기에 속아서 정치를 시스템이 아닌 인물 중심으로 바라본 유권자들도 문제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정인을 중심으로 한 정당정치에서 탈피하려면,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김민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역대 대통령이 퇴임 후 불행했기 때문에 여당이 이합집산을 한 측면이 있는데, 제왕적 대통령제의 과도한 권력을 분산할 필요가 있다”며 “계파싸움을 막기 위해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도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박세준·김민순 기자 3j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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