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공중에서 촬영한 전남 진도군 사고 해역에서 인양되고 있는 세월호의 모습. 세월호 곳곳에 인양 작업 중 미수습 시신등의 유실방지를 위해 설치된 망이 곳곳에 부착 돼 있다. 연합뉴스
3년 만에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를 지켜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이제서야”라는 반응과 함께 인양이 늦어진 이유를 두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참사 초기 미수습자 수습을 위해 가족들이 인양에 반대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미수습자 수습을 공식 종료한 뒤에도 공식 인양 결정까지 6개월이나 걸린 점, 정부·여당 인사들이 인양에 부정적인 의견을 여러차례 밝힌 점 등 때문에 ‘인양을 미룬 것’이라는 의혹어린 시선이 많다.
■ 초기엔 인양보다 수습 2014년 10월27일 전남 진도에 머물고 있던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은 선체 인양을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무기명투표를 통한 결정이었다. 수중수색을 통해 미수습자를 발견할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 결정 이튿날 295번째 희생자를 수습했다. 하지만 이후 성과가 없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더이상 수색이 힘들어지자 가족들은 수색 종료에 합의했다. 2014년 11월11일이었다.
수색 중단 직후부터 가족들은 ‘조속한 인양’을 요구했다. 정부는 선체 인양을 검토할 ‘세월호 선체 처리 관련 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 하지만 공식 인양 결정은 이듬해 4월22일에 나왔다. 그 사이 보수 언론과 여권에서는 ‘인양 낭비론’이 제기됐다.
‘늑장 결정’의 공식 이유는 ‘기술적 검토’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가 세월호 참사 자체를 언급하려 하지 않았던 분위기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23일 당 연석회의에서 “2년 전 제가 원내대표에 취임하자마자 세월호 문제를 이야기했다. 고위 당·정·청 회의에서 ‘반드시 세월호 선체는 인양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세월호 문제에 대해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꺼렸다”고 말했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참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당시 세월호 참사 사후 수습뿐 아니라 ‘청와대가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든지, ‘7시간 의혹’ 등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판에 시달리며 거의 6개월 동안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다른 시급한 국정과제도 많았기 때문에 청와대나 정부 차원에선 (인양하지 않고) 빨리 일단락을 짓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정치권과 보수단체에서 유족들의 요구를 ‘보상금 요구’로 치부하거나 인양 비용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한몫 했다.
■ 준비 부족으로 우왕좌왕 2015년 4월 공식 인양을 발표하면서 정부는 “업체 선정 뒤 1년~1년 6개월이 걸린다”며 2016년 6월이나 12월 사이를 인양가능 시점으로 짚었다. 당시 예상보다 늦어진 건 정부의 부실한 사전조사와 판단착오 때문으로 지적된다.
인양 작업의 핵심은 인양용 구조물인 ‘리프팅 빔’ 설치였다. 인양업체로 선정된 상하이샐비지는 지난해 3월 본격적으로 인양 작업을 시작해 같은 해 7월 뱃머리(선수)에 리프팅 빔을 끼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배꼬리(선미) 부분에서 리프팅 빔 설치 작업이 계속 지연됐다. 세월호 선미 하부를 굴착한 다음 리프팅 빔을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선미 주변 퇴적층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고 불규칙해 작업이 여의치 않았다. 해수부는 지난해 10월 말 기존 굴착방식 대신 선미를 살짝 들어 올린 뒤 리프팅 빔을 끼우는 ‘선미 들기’로 공정을 변경했고, 지난해 말에야 리프팅 빔 설치를 마쳤다.
나머지 일정도 꼬이기 시작했다. 당초 리프팅 빔 설치 후 와이어를 연결해 해상 크레인으로 들어올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양 시기가 겨울로 연기되면서 바람이 강한 겨울에 위험한 해상 크레인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해수부는 해상 크레인을 ‘잭킹 바지선’으로, 플로팅 독을 ‘반잠수식 선박’으로 각각 변경했다. 바지선과 반잠수식 선박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또 흘러갔다.
특조위 진상규명소위원장(상임위원)을 지낸 권영빈 변호사는 “곧 구성될 선체조사위원회에서 인양 과정에 문제는 없었는지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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