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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August 22, 2016

[전문] 역사학계 원로 성명 “건국절 주장 본질은 ‘역사세탁’”

역사학계 원로학자 및 학회 대표자들이 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건국절 제정 움직임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정지윤기자
역사학계 원로학자 및 학회 대표자들이 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건국절 제정 움직임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정지윤기자
역사학계 원로학자들과 역사학회들이 정부여당의 ‘1948년 8.15 건국절 제정’ 움직임에 대해 “헌법에 명시된 임시정부의 법통성과 선열들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반역자인 친일파를 건국의 주역으로 탈바꿈 하려는 ‘역사세탁’이 바로 건국절 주장의 본질”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들은 2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위기의 대한민국, 현 시국을 바라보는 역사학계의 입장’ 성명을 통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권 차원에서 독립운동 폄훼와 친일·독재 찬양을 노골화하기 시작했으며, 박근혜 정부의 ‘역사쿠데타’로 이어지면서 그 정점을 찍고 있다”고 주장했다. 성명에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 이이화 전 서원대 석좌교수 등 역사학계 원로 20명과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연구회, 한국서양사학회 등 20개 역사학회가 참가했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역사인식”으로 인해 건국절 논란 뿐 아니라 역사교과서 국정화, 한일 ‘위안부’ 합의 같은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현 정세가 100여년 전 국가의 존망이 위협을 받고 있던 때와 유사한 심각한 위기 국면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대한민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현 정권의 탈선을 막아내는데 함께 해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린다”고 했다. 성명이 나온 22일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된 지 106년째 되는 날이다.
성명에 참가한 이만열 명예교수는 따로 모두발언을 통해 “‘건국절’ 주장은 독립운동과 헌법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1948년 정부 출범 당시 이승만 대통령 본인이 1919년 3·1 운동을 대한민국 건립 시점으로 인식했고, 1948년 건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음을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아직도 이승만을 국부 혹은 건국대통령으로 추앙하려는 움직임이 없지 않지만, 그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이승만이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는 역사의식”이라고 지적했다.
기자회견에 참가한 이이화 전 서원대 석좌교수(왼쪽)와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정지윤기자
기자회견에 참가한 이이화 전 서원대 석좌교수(왼쪽)와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정지윤기자
아래는 성명서 전문과 이만열 명예교수의 모두발언 전문.
[성명]위기의 대한민국, 현 시국을 바라보는 역사학계의 입장
8월 22일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10년 대한제국이 주권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강제병합조약이 서명된 날입니다. 그로부터 7일 뒤인 8월 29일 이 조약이 공포되면서 우리는 나라 없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고 있던 기간에 나라 안팎에서 치열한 독립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자주독립을 이루어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민주공화제 국가를 만들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그 결과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제헌 헌법에 명기된 것처럼 3·1독립운동으로 수립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렇듯 8월은 우리에게 뜻 깊은 달입니다. 국권 침탈의 비극이 일어난 것도 8월이고 조국 광복의 기쁨을 누린 것도 8월입니다. 해마다 8월이 되면 우리는 다시는 경술국치와 같은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해방 그 날의 감격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70여 년이 지난 2016년 오늘 대한민국은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역사의 시계바퀴를 한 세기 전으로 되돌리려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독립운동의 정신을 훼손하고 식민지지배와 친일을 정당화 하려는 움직임은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에는 아예 정권 차원에서 독립운동 폄훼와 친일·독재 찬양을 노골화하기 시작했으며, 박근혜정부의 ‘역사쿠데타’로 이어지면서 그 정점을 찍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식민사관에 찌들어 있는 문창극을 국무총리후보로 지명한 데 이어, 그를 두둔한 이인호를 공영방송인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식민지지배에 대한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작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이라는 발언을 하여 뉴라이트의 건국절 주장을 용인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면서도, 올 광복절 경축사에서 또다시 “광복 71주년이자 건국 68주년”이라는 발언을 보란 듯이 하였습니다. 그 며칠 전에 한 원로 독립투사가 대통령 면전에서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을 이어받았으니 건국절 제정 움직임을 멈추어 달라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의 손을 거듭 들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1948년이 대한민국 건국 원년’이라는 주장은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것인 동시에 헌법정신에도 위배됩니다. 헌법 전문(前文)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헌법전문의 이 구절이 “대한민국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의 공헌과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된 것임을 선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결정한 바 있습니다.
박근혜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한 ‘건국’은 ‘건국절’을 염두에 둔 발언입니다. 건국절이란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 건국일’이라고 주장하고, 이날을 광복절 대신 국경일로 지정하여 기려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8월 15일을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기념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여러 차례 국회에 상정한 바 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선열들의 독립운동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건국과 관련 없다고 주장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건국일로 기념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1945년 8월 15일 이후 3년 동안 건국운동에 참여한 사람, 즉 반민족행위자인 친일파라 할지라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면 건국공로자가 되고, 김구 선생처럼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해방 이후 단독정부에 반대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유수한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반국가사범이 되고 맙니다. 헌법에 명시된 임시정부의 법통성과 선열들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반역자인 친일파를 건국의 주역으로 탈바꿈 하려는 ‘역사세탁’이 바로 건국절 주장의 본질인 것입니다.
건국절 주장이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정부는 어떻게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발행제도를 검정제에서 국정제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는 역사교육과정 개정을 고시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었습니다. 급기야 현 초등학교 사회과 6-1교과서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대한민국 수립’ 곧 건국으로 바꿔 서술하였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과서에 ‘건국’을 넣어 이를 근거로 건국절을 제정하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인식이 이러하니, 올 광복절경축사에서 “안중근 의사께서는 차디찬 하얼빈의 감옥에서……유언을 남기셨습니다.”라고 하여,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순국했다’는 취지의 역사적 사실과 다른 발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행사도 아니고 독립운동가의 희생을 기리는 광복절경축사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통령이 대한민국 최고 독립운동가의 순국 장소를 엉터리로 말하였으니, 세계적인 웃음거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행적인 역사인식이 끼치는 폐해는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운영의 중추를 담당하는 고위 공직자들 또한, 대통령의 전도된 역사 인식을 본받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4·19민주이념을” 계승한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의 정체성마저 부정하고 있습니다. 국무조정실 산하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 이정호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은 워크숍에서 일본인들도 경악할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채 지워지기도 전에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 입에서 ‘국민의 99퍼센트의 민중은 개돼지, 신분제 공고화’ 라는 조선시대에도 상상 못할 망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게다가 지난 7월에는 서울 남산에서 열린 일본의 자위대 창설 기념행사에 한국군 관계자를 축하사절로 파견하기까지 했습니다. 과거 동학농민혁명군과 10만 의병을 학살하고, 항일독립군과 교전을 벌이고,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나가 총알받이로 삼은 ‘황군’의 역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재정립하겠다는 아베정권의 자위대 창설 기념식을, 한국 정부가 나서서 축하해 준 것입니다. 통상의 외교관례를 벗어나 남의 영토 서울 도심 한복판, 과거 일제 식민통치기구가 위압적으로 군림하였고 현재 안중근 의사기념관이 있는 남산에서 치루는 ‘황군’의 부활축하식에 정부가 항의는커녕 축하까지 한 것입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일본 침략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 한 안중근 의사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입니다. 대통령을 위시하여 정부 고위 공직자들의 역사에 대한 모독과 망언은 결코 우연한 일탈이라고 볼 수 없는, 구조적이고 연속적인 흐름 속에 있다는 점에서 사태가 심각합니다.
박근혜 정권의 시대착오적인 역사인식은 작년에 발표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교과서 국정화는 주권자로부터 한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집단이, 자신의 해석을 유일한 역사로 판단하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다원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원칙과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주권재민원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민주시민의 양성을 가로막고,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한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기본권 중의 하나인 정신적 자유권을 침해하고, 유엔 등 국제사회가 권장하는 역사교육 지침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부와 여당은 국정화를 강행하기 위해, 역사학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국사학자 90%가 좌파”라고 색깔론을 들이댔으며, 국민들에 대해서는 “국정화를 반대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며 ‘비국민’망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정부가 국민들과 약속한 집필 기준이나 집필진은 밝히지 않은 채, 지금까지 밀실에서 ‘복면집필’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인식이 유신시대에 머물러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이에 야합한 출세지향적인 교육 관료, 그리고 곡학아세하는 극소수 어용학자들이 합작하여 벌인 ‘역사쿠데타’에 다름 아닙니다.
박근혜정권의 전도된 역사 인식은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2015년 12월28일 한국정부는 일본 정부와 밀실 야합해,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10억엔(100억원)으로 재단을 설치하는 대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합의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 간 피해자들이 요구한 ‘일본군 위안부 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보상 그리고 명예 회복과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요구하지 않은 채, 단돈 10억엔에 역사를 팔아넘긴 것입니다. 반인륜적·반인권적 여성범죄인 일본 ‘위안부’ 문제 해결에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견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12.28한일합의’ 이후 가해국인 일본이 오히려 피해자인 우리에게 으름장을 놓는 기이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일본의 요구에 따라 올해 새로 나온 초등학교 6학년 사회과목 교과서에서 ‘위안부’란 단어도 지워버렸습니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일본으로부터 몇 푼의 경제협력자금을 받는 대가로 대일청구권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 추궁이 원천 봉쇄된 잘못된 역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후 피해자들과 일부 뜻있는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위안부’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활동을 끊임없이 벌인 결과, 강제동원의 ‘진상규명과 적절한 배상’이야말로 일제 식민잔재 청산과 과거사 정리의 핵심이라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김대중정부 이후 한국정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는 한일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12.28한일합의’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대한 법적 책임을 추궁하지 못하고 면죄부를 주었던 ‘1965년 한일협정’의 복사판이자, 피해자의 인권을 유린하고 국가로서의 기본책무를 포기한 외교참사입니다. 게다가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일본군위안부 자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마저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19세기말 서세동점이후 동아시아는 강대국의 패권장이었습니다. 19세기 말 강대국의 지역 패권 충돌인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한반도를 주 무대로 전개되면서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의 멸망과 식민지화로 이어졌습니다. 열전과 냉전의 시기였던 20세기가 남긴 역사적 교훈은 국민의 생존과 행복이 중심이 되는 안보, 군사적 안보만이 아니라 외교적·평화적·인권적 안보가 21세기에는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박근혜 정부의 사드(THAAD) 배치 결정은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과 외교 갈등을 증폭시키는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사드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문제이고 외교문제입니다. 중국의 급성장으로 미국의 헤게모니 질서가 도전받고 있는 지금일수록 더더욱 장기적인 전략과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 판단의 기본은, 이 땅에 사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보장되는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국민들과 협의하여 동의를 얻을 수 있는지, 20세기 역사의 미해결과제인 냉전을 종식시키고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정착하고 평화통일을 이루는 방향인지 등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 정부는 새로운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끌어갈 만한 비전과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무책임하기까지 합니다.
박근혜정부의 왜곡된 역사인식의 밑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의 상실과 인간을 국가와 권력의 도구로 인식하는 반인간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박근혜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 창달에 노력”하겠다고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이상이 지난 현재 국민의 복리 증진은커녕, 날로 커져가는 빈부격차와 청년실업 대란, 각종 인권의 후퇴와 유신독재를 방불케 하는 민주주의의 위기, 흙수저와 금수저로 대변되는 신분 세습의 고착화 등으로 대한민국의 위기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생활 욕구라 할 수 있는 주거, 의료, 교육, 양육, 노후, 취업, 결혼 등 7대 부문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가운데 대한민국이 최고 수준의 자살율과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줍니다.
2014년의 세월호참사는 박근혜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부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일 슈피겔은 “한국 박근혜 대통령은 침몰한 세월호 선장을 비판하지만 세월호 승객 가족들은 정부의 위기관리를 훨씬 문제 삼고 있다”며, “정부의 고장 난 위기관리는 덮일 수 없다”고 보도했습니다. 세월호참사는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결여로 빚어진 대표적인 ‘후진국형 인재(人災)’라는 것이 세계 언론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정부는 참사발생 2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월호 피해자와 유족의 진상규명 요구를 외면하고 책임 회피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진상규명 대신 여론조작을 통한 분열과 탄압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세월호 특조위의 예산을 끊어버리고, 진실을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고 책임자를 명백하게 밝힐 수 있는 자료의 전면 공개마저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6년 8월, 세월호의 뒤를 따라 침몰하고 있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호’를 다시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친일, 독재, 분단, 냉전으로 치닫는 지금의 항로를 자주독립, 민주, 인권, 평화통일을 향한 항로로 바꾸어야 합니다. 국권을 상실한 100여 년 전의 뼈아픈 역사와 분단과 전쟁의 20세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한반도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역이 아니라 평화의 완충지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1910년 8월 22일 나라를 잃었던 치욕의 그날을 오늘에 되새기면서, 우리들은 현 정세가 100여 년 전 국가의 존망이 위협을 받고 있던 때와 유사한 심각한 위기 국면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역사학계의 고언을 나라와 미래세대를 위한 충정으로 받아들여 주시고,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대한민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현 정권의 탈선을 막아내는 데 함께 해주시기를 간곡히 요청 드립니다.
2016년 8월 22일
역사학계 원로 :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 권태억(서울대 명예교수), 김정기(서원대 명예교수), 김태영(경희대 명예교수), 박현서(한양대 명예교수), 서중석(성균관대 명예교수), 성대경(성균관대 명예교수), 안병욱(가톨릭대 명예교수), 유승원(가톨릭대 명예교수), 윤경로(한성대 명예교수), 이근수(경기대 명예교수),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이병휴(경북대 명예교수), 이이화(전 서원대 석좌교수), 이지형(성균관대 명예교수), 임병훈(경북대 명예교수), 임세권(안동대 명예교수), 장병인(충남대 명예교수), 전형택(전남대 명예교수), 조 광(고려대 명예교수) 등 20명(가나다순)
학회 및 연구소 : 고려사학회, 독일사학회, 만주학회, 민족문제연구소, 부산경남사학회,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역사교육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연세사학연구회, 전북사학회, 한국고고학회,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사연구회, 한국사학사학회, 한국서양사학회, 한국역사연구회, 호남사학회 등 20개 단체(가나다순)
[모두발언]‘건국절’ 주장은 독립운동과 헌법정신을 모독하는 것입니다(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박근혜 대통령이 올 8.15광복절 경축사에서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하여, 작년에 이어 올해도 보란 듯이 ‘건국’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역사학계는 광복절 경축사에 나타난 ‘건국’ 이란 용어가 부적절하다는 것과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의 전통 위에서 성립 발전한 나라임을 확고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개진합니다.
이른바 ‘건국절’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은 이명박 정권을 전후한 때입니다. 광복 60주년을 맞은 2008년에 취임한 그는 ‘건국60년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고 그 해 8.15경축사를 통해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60년”이라 선언하고, 기념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1948년으로 전제한 것이었습니다. 학계의 반대목소리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던 그가 훈장까지 반납하겠다는 광복회원들의 분노 앞에서는 주춤했습니다. 그 해 8·15기념행사가 ‘광복 63주년 및 건국 60주년’이라는 이름으로 어정쩡하게 치러진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국회에서는 8·15를 종래의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하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었고, ‘건국공로자예우에 관한 법률안’도 제안되었지만 국민 여론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한바탕 일어난 ‘건국절 소동’으로 인해 부각된 것은 대한민국이 언제 건국되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 전에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구분하지 않아 혼효된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소동’을 계기로 역사학계도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수립 문제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거기에 따라 건립한 것이 대한민국이다. 1919년 4월 10일 13도 대표 29명이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모였다. 그들은 그 모임의 이름을 ‘임시의정원’이라 하고 그 이튿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10개조의 임시헌장을 발표했다. 그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이 조항은 임시정부 하에서 다섯 차례의 개헌 때에도 계속되다가 1948년 제헌헌법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계승되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니 그것을 운용하는 정부를 수립해야 했다. 그러나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해외에 임시정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서울(한성)과 블라디보스톡, 상해에서 각각 세워졌으나, 1919년 9월 세 임시정부를 통합, 대통령제의 통합임시정부로 발전시켰다. 이게 대한민국이요, 임시정부(상해임정)의 설립이었다.
상해 임정은 의정원과 정부로 구성되었고, 출발 때부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라는 헌법적 기초 위에 서 있었으며, 뒷날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정당정치에 좌우합작 정부를 형성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임정의 외교적 활동도 괄목할 만하여, 1943년 말 미국, 영국, 중국 세 거두의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을 통해 전후(戰後) 한국독립을 유일하게 약속받는 성과도 거두었다. 중국이라는 외국 영토에서 독자적인 광복군을 예하에 두었던 임정은 미영중 연합국과 항일공동전선을 펴는 한편 국내 정진대 파견을 준비하다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인식에 의거하여 제헌국회는 대한민국의 출발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1948년 5월 총선 후 회집된 제헌국회는 헌법 초안 전문(前文)에 대한민국의 뿌리를 명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헌법기초위원회 초안에는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정도로만 밝혔습니다. 이를 인지한 이승만은 국회 본회의 때 의장석에서 내려와 평의원으로 발언권을 얻어, 새로 수립되는 정부가 임정의 법통계승을 명시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제헌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명시했는데, 이에는 이승만의 노력이 컸습니다. 제헌헌법의 그 정신은 현행헌법에도 계승되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는 것으로 명시되었습니다. 다른 나라 헌법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의 설립근거를 분명히 밝힌 데는 이런 경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출범식 때 청사에 걸린 새 정부 출범 축하 현수막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라는 글자를 새겼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국민축하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연설에서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起算)할 것”이라고 언명한 이승만은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정부의 관보뿐만 아니라 공식문서에도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썼습니다. 이처럼 이승만이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시작된다고 밝힌 것은 뒷날 그를 ‘국부’로 모시겠다는 이들이 혹시라도 대한민국의 근원을 소홀히 할까봐 이렇게 쐐기를 박아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아직도 이승만을 국부 혹은 건국대통령으로 추앙하려는 움직임이 없지 않지만, 그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이승만이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는 역사의식입니다. 그가 “민국이라는 명칭에 표시되는 민주정치제도를……남의 조력으로 수립된 것이 아니라 벌써 30년 전에 기미독립운동으로 민국정부를 수립하여 세계에 선포하였다”고 언급한 대목이나, “기미년 독립을 선언한 것이 미국이 1777(sic)년에 독립을 선언한 것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역사”라고 강조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한국의 민주국가 원년 1919년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역사인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공용 연호를 단군연호로 바꾸려고 한 국회 결의를 존중하여 이를 공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1949) 기미독립운동연호를 재고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즉 기미독립운동연호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광영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요 또 민주국 기초가 이미 그 때에 잡힌 것을 표시할 수 있고 또 무저항주의를 우리가 시작해서 성공된 사적을 표현한 것이며,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남녀선열들의 위대한 공업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탄생이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분명히 했는데, 이러한 역사의식을 공유하는 데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1948년 정부수립에 참여한 이들은 대한민국이 기미년(1919)에 건립되었다는 것과 1948년에 건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국가는 국토·국민·주권이 있어야만 성립한다고. 그러면 이승만과 제헌국회 때의 정치인들이나 국민들은 그걸 모르고 1919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고 했을까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당·정·군을 갖고 좌우합작 정부를 통해 외교활동을 벌이며 국내외의 독립운동과 기맥을 통하면서 그 영도적 성격을 가졌던 임정을 높이 평가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혹자는 또 말합니다. 임정 때의 대한민국은 당시 국제적 승인을 받지 못했으니 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그러나 어떤 국가든 독립선언과 해방, 그리고 정부수립과 독립승인 사이에 시차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이럴 경우 정부수립이나 독립승인이 아니라, 독립선언이나 해방을 독립기념일로 삼곤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독립선언의 해를 독립기념의 해로 삼는 대표적인 나라는 미국입니다. 1776년 독립을 선언한 미국이 국제적 승인을 받은 것은 그 7년 후인 1783년이고 연방정부를 세우게 된 것은 13년 후인 1789년입니다. 미국이 그들의 국가 출발시점을 1776년으로 못 박았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나 중남미의 멕시코와 브라질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도 독립선언의 시점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3·1독립선언을 국가의 출발로 삼는 대한민국 헌법정신이 국제적 사례에도 부합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국가적 자부심을 강조하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 정부가 민족의 독립운동과 국가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인색하게 구는지, 반면에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면서 일제 통치의 연장선상에서 나라가 이뤄졌다고 보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부정, 폄훼하는 뉴라이트의 주장에는 왜 그렇게 쉽게 동조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도 않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수립(건국)’으로 하지 않으면, 그 3주 후인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는 북한에 비해 국격이 떨어진다는 것을 ‘건국절’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북한은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승을 거부하고 1948년에 ‘건국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계승할 수 있는 국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이 있었고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마저 계승했으니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로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남측이 ‘정부’를 수립했고 북측이 ‘국가’를 건립했다고 해서 이를 국격의 문제로 따질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1948년에 정부를 수립했다고 서술하는 것이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의 전통 위에서 1919년에 이미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더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박근혜정부는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국정화로 확정지으면서 ‘1948년=대한민국 수립(건국)’설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인식은 올해 대통령의 광복절경축사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역사교과서에 서술된 ‘1919년=대한민국 수립’, ‘1948년=대한민국 정부수립’ 설을 뒤엎는 충격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나 ‘1948년=대한민국 수립’과 ‘건국절’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고, 헌법정신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국제사회의 사례와도 어긋나므로 폐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21657001&code=940100#csidx09264cfaa4713b084a3ee40672380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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