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미르재단·안종범 수석 내사 상황 재구성
시작은 <조선일보>와 그 계열사인 <티브이(TV)조선>의 보도였다. 조선일보는 7월18일 우병우 민정수석의 처가 땅을 넥슨코리아가 매입한 사실을 보도했다. 9일 뒤인 7월27일 티브이조선은 미르재단이 삼성, 현대 등 16개 그룹으로부터 두 달 만에 486억원을 모았다고 방송했다.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우병우 수석과 별도로 미르재단과 연관된 안종범 수석에 대한 감찰에 들어간 것은 그 보도 직후였다. 여러 가지 정치적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사안이지만 특별감찰관으로서는 본연의 업무이다. 특감법 6조(감찰 개시)는 “비위행위에 관한 정보가 신빙성이 있고 구체적으로 특정되는 경우 감찰에 착수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보도에만 의존한 건 아니다. 특히 안종범 수석의 경우는 별도의 첩보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대기업들의 모금 과정에서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와 경제계와 법조계에서는 어느 정도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고 말했다. 800억원이나 되는 거금을 강제로 거두는 데 ‘범죄 정보’ 하나 생산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이석수 특감은 ‘존재의 근거’가 흔들리고 있었다. 3년 임기의 반이 다 지나가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7월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불려나가서는 야당 의원들로부터 “국민의 세금을 쓰면서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다”는 말까지 들었다. 뭐라도 일거리를 찾아나서야 할 판인데 마침 언론보도가 나와준 것이다. 이때 이 특감이 가만히 있었다면 직무유기에 해당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수석에 대한 감찰은 청와대를 바싹 긴장시켰다. 특감의 조사 내용은 민정수석실을 통해 즉각적으로 파악돼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가 됐다. 특히 어느 기업체 관계자는 미르재단에 출연하게 된 과정을 상당히 자세하게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9일 특감 사무실 압수수색 때는 미르 수사 관련 메모지도 나왔다고 한다.
두 수석 가운데서도 청와대가 진짜 아파한 손가락은 우병우가 아니라 안종범 수석이었다. 우 수석은 개인 문제로 치부할 수 있지만 안 수석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리는 중대 사안이다.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하던 청와대에 반격의 전기를 마련해준 건 언론 보도였다. <문화방송>이 우병우 수석을 화제로 삼은 이석수 특감과 조선일보 기자의 통화 내용을 전하며 “수사기밀을 누설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청와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국기문란’으로 몰고 나갔다.
물론 문화방송의 보도 경위는 이상하기만 하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을 다른 방송사가 어떻게 입수했는지 자체가 의문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방송 직후 도청 가능성을 문제삼기도 했다. 그래도 보도 경위의 문제점은 덮어졌고 청와대의 반격은 주효했다. 이석수 특감은 사표를 제출했고 미르재단에 대한 내사는 중단됐다. 청와대로서는 미르나 케이스포츠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고도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이를 두고 한 검찰 관계자는 “청와대로서는 우병우 수석의 비위 보도가 고마웠을 수 있다. 미르재단에 쏟아질 수 있는 여론의 관심이 우병우 수석 쪽으로 몰려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청와대로서는 미르, 케이스포츠 재단에 대해 감추고 싶은 게 많다는 얘기다. 또 박근혜 대통령에게 우병우 민정수석은 미르재단을 덮어주는 방패이자, 역공을 가해주는 창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셈이다. 우병우 수석을 감싸고도는 이유가 짐작된다.
청와대의 이런 전략은 한동안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비선 실세인 최순실씨가 케이스포츠 재단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던 미르재단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야당은 국정조사와 특검을 거론하며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계속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의겸 선임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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