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하고 노쇠한 정치인과 똑똑하고 젊은 디지털 수퍼스타의 대결.’
승부는 정해져 있었다. 지난 4월 10일, 11일 열린 미국 상·하원의 ‘마크 주커버그 청문회’는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CEO의 ‘완승’으로 끝났다.
의원들은 디지털, 소셜 미디어에 대한 기초적인 질문 조차 어려워했고 30대 초반의 디지털 억만장자는 유창하고 당당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세기의 청문회’는 초강대국의 정치를 주무르는 의원 상당수가 ‘디지털 문맹’임을 폭로했다.
미국 대선을 뒤흔 든 ‘가짜 뉴스',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이 확인된 ‘데이터 스캔들' 등 ‘페이스북 제국’을 최대 위기로 몰아넣은 ‘악재’들은 순식간에 사라진 듯 했다.
월스트리트의 눈치 빠른 투자자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청문회 이전까지 곤두박질 치던 페이스북 주가는 이틀 연속 큰 폭으로 상승했다. 페이스북의 위기는 끝난 것일까?
◆ ‘디지털 망명’ 시작됐나··· 페이스북 탈퇴 운동 확산
주커버그 CEO는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청문회장을 떠났지만 그가 두고 나간 ‘예상 질의 응답 노트’가 뜻하지 않게 공개되면서 ‘각본에 의한 승리’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페이스북은 미국의 자산' ‘중국의 위협’이란 대목은 애국심과 외부 위협을 강조하는 낡은 선전 수법을 연상하게 한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정치인들의 무지가 ‘미국의 시스템이 내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불신을 촉발한 때문일까?
CBS의 페이스북 이용자 설문 조사 결과, “개인 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응답이 63%, ‘페이스북의 개인 정보 보호 능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응답이 60%나 됐다.
이미 브라이런 액턴 왓츠앱 창업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스티브 워즈니악 애플 공동 창업자 등 ‘디지털 혁신의 아이콘’들이 줄줄이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했다. 실리콘밸리 기술 기업 근무자의 3분의 1 이 페이스북 탈퇴 의사를 밝혔다.
정치인들의 제대로 된 추궁 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디지털 수퍼스타', ‘디지털 엘리트’가 ‘페이스북 탈출’을 감행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2600만명의 팔로우어를 가진 ‘플레이보이’가 “페이스북 정보 유출에 연루되고 싶지 않다”며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광고주들의 페이스북 삭제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다.
◆ ‘소나기 뒤에 장마 온다' 페이스북·구글, ‘자율 규제 ‘ 안간힘
소나기 피했다고 위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페이스북 등 기술 기업들이 더 잘 안다. 자율 규제를 강조하며 디지털 규제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청문회 직전 ‘정치광고 실명제' 도입을 선언한 주커버그 CEO는 “외부 앱의 페이스북 이용자 접근을 제한하겠다. 테러 방지를 위해 30개 언어 능력을 가진 테러 대응팀을 운영하고 있고 인공지능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글은 4월12일 아시아 기자들을 싱가포르로 불러 “이용자와 기업 보호”를 역설하며 “악성 광고, 광고주의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전담 직원을 1만명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글은 “작년 32억건의 광고를 삭제하다. 32만명의 악성 광고 게시자의 이용을 정지시키고 32만개의 웹사이트, 70만개의 모바일 앱을 차단했다”며 “강화된 정책으로 매달 200만건 이상의 인터넷 주소(URL)에서 광고를 삭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디지털 기업들이 자율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실태를 밝히면 밝힐 수록 디지털 규제의 필요성을 더 인정하는 딜레머에 직면하고 있다.
◆ 미국, “디지털 기업 책임 강화" 선회··· ‘광고주 공개법’도 상정
‘페이스북 스캔들’, ‘주커버그 청문회'를 계기로 디지털 기업의 책임 경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 등 세계 각국은 사실상 방임에 가까웠던 인터넷과 디지털 산업에 대한 규제 법안을 속속 마련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주커버그 청문회' 직후인 4월 11일부터 성매매 알선 게시물과 광고를 게재한 인터넷 사이트, 포털, 소셜 미디어를 처벌하는 ‘온라인 성매매 전쟁법(FOSTA)’이 시행에 들어갔다.
미국 정부가 테러, 마약, 살인 등 범죄 수사를 위해 디지털 기업들의 해외 데이터 센터 데이터를 영장 없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한 ‘클라우드법(Cloud Act)’도 지난 3월23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디지털 기업의 광고주 신원과 출처를 공개하도록 하는 ‘광고주 공개법(Honest Ad Act)’도 최근 의회에 상정됐다.
독일은 올해부터 소셜미디어 사업자가 차별·혐오 발언이나 가짜뉴스를 방치할 경우 최고 5000만유로(665억원)의 벌금을 물리는 ‘페이스북 규제법'을 시행하고 있다.
인터넷, 디지털 기업들이 불법·음란·범죄 정보를 유통시키고 이용자 정보를 수집해 광고로 떼돈을 버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진단이 나온다.
규제의 명분은 불법, 매춘, 범죄 정보 유통 방지, 수사 필요성 때문이지만 이를 계기로 인터넷과 디지털에 대한 규제는 더 많아지고 더 세분화될 전망이다.
1990년 ‘월드 와이드 웹’ 브라우저 보급을 계기로 촉발된 인터넷 혁명은 ‘자유롭고 열린 인터넷(Free and Open Internet)’을 기치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오픈 인터넷(Open Internet)’의 ‘오픈'이 ‘사생활, 개인 정보의 무분별한 오픈’, ‘자유 인터넷(Free Internet)’의 ‘자유'가 ‘광고주와 정치 세력에게 이용자 정보를 팔아먹을 자유’로 변질되면서 디지털 기술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고 있다.
21세기 인공지능, IoT(사물인터넷) 기술은 더 많은 개인 정보를 더 쉽고, 더 빠르고 더 간편하게 수집하고 분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데이터 스캔들'이 디지털 문명과 개인의 자유, 열린 사회와 사생활 보호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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