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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pril 17, 2018

탈북 리듬체조 코치의 '미투'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다"

[토요판] 커버스토리
'미투' 고발한 리듬체조 코치 이경희


[한겨레]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듬체조 선수였다. 한국 리듬체조가 겨우 첫걸음을 옮길 즈음인 1990년대 초 그는 각종 세계대회를 휩쓸다시피 했다. 지난해 은퇴한 손연재 선수가 거둔 성적보다 나았다. 당시 그의 조국인 북한에서는 최연소 ‘공훈체육인’으로 대접받았다. 선수 은퇴 뒤에도 그의 삶은 꽃길이었다. 친정도 잘나갔지만 북한 노동당 고위 간부 집안이었던 시가는 더 잘살았다. 수십만명이 굶어죽은 것으로 알려진 ‘고난의 행군’조차 모르고 살았다. 북한의 스포츠 스타 이경희(47·대한민국 리듬체조 국가대표 후보선수 전임지도자)씨가 2007년 탈북해 서울에 온 것은 아이를 자유로운 세계에서 키우고 싶어서였다. 뛰어난 실력 덕분에 서울에서도 한국 리듬체조 국가대표 순회코치, 단체팀 코치 등을 맡았다. 남은 꿈은 “내 제자들을 이끌고 국제대회에서 북한 선수들과 경쟁해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요즈음 눈물로 지새울 때가 많다. 자신에 대한 체육회 고위 간부(전직)의 성추행 혐의가 공정하게 처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탈북자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서러워서다. 이경희 코치가 지난 9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의 인터뷰 도중 미투 관련 얘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지난달 초 <제이티비시>(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는 체육계 미투를 다뤘습니다. 리듬체조의 국가대표 후보선수 전임지도자(이경희·47)가 대한체조협회 전직 고위 간부에게 오랫동안 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방송 내용도 충격적이지만 피해자가 세계적인 리듬체조 선수 출신의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점에 눈길이 갔습니다. 남북을 오가면서 얻은 생채기가 눈에 보이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이경희 코치와의 인터뷰는 지난 9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의 한 카페에서 했습니다.
북한에서 리듬체조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공훈체육인’이었다고 하지만, 국제 스포츠계에서 이경희 코치(47·이하 호칭 생략)의 위상이 어땠는지는 감이 잘 안 왔다. 199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4대륙 리듬체조선수권대회에서 개인종합 3위(볼 1위), 1991년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3관왕(개인종합, 공, 곤봉 각 1위)이었다는 경력을 봐도 막연했다. 지난해 2월 은퇴한 우리 시대의 스포츠 영웅 중 한명인 손연재(23)의 화려한 경력과 비교하고 나서야 이경희에 대한 느낌이 왔다. 세계적인 선수였던 손연재는 2015년 유니버시아드대회(광주)에서 3관왕(개인종합, 공, 후프 각 1위)을 차지했으며, 2016년 핀란드 에스포 월드컵대회에서는 개인종합 2위(볼 1위)를 기록했다. 손연재보다 20여년 앞서 국제 리듬체조계의 요정이었던 셈이다.
아직도 세계적으로 이름이 쟁쟁한 인물을 미투 운동의 고발자로 만나야 하는 현실이 참담했다. 미투와 관련된 내용보다 그의 인생 얘기를 먼저 듣고 싶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2007년 남한으로 온 이경희 리듬체조 국가대표 후보선수 전임지도자(코치)는 지난 9일 서울 올림픽공원의 한 카페에서 한 <한겨레> 인터뷰에서 “남쪽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가장 부럽다. 내가 아무리 잘났으면 뭐 하나. 태어난 게 이북이라서 이렇게 힘든데”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호소했다. 최근 공개적으로 미투 피해를 고발했던 이 코치가 인터뷰 도중 설움에 겨운 듯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평양에서 리듬체조를 시작했는데 언제부터인가?
“11살 때인 1982년부터 시작했다. 사실 다른 아이들보다 입문이 한참 늦었다. 그때까지 나는 리듬체조가 뭔지도 몰랐다. 엄마가 주변에서 얘기를 듣고는 학교 리듬체조반에 넣었다. 북한에는 예술체조라고 부른 리듬체조가 당시에 이미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 엄마가 나를 리듬체조반에 데려간 것은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였다.(웃음) 우리 집은 딸만 6명이었다. 아들 하나를 원하다가 딸부잣집이 됐다. 자매들은 모두 두살 터울인데 집에서 장난질치고 싸우면서 시끄럽게 굴었다. 평양은 당시 초등학교 상급반은 오전반, 하급반은 오후반으로 2부제 수업을 했는데 오전반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온 언니들이 ‘엄마, 경희가 방해해서 숙제를 못 하겠어’라고 일러바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6명 딸부잣집의 고집 센 셋째
―처음부터 소질이 뛰어났나?
“내가 어릴 때부터 몸매도 가늘고 팔다리가 유난히 길었다. 게다가 몸이 다른 애들보다 훨씬 유연했다. 선생님이 리듬체조에 맞는 체형이라고 좋아했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나는 출발이 늦다 보니까 초등학교(북한은 4년제) 졸업 때까지는 시합에는 출전하지도 못하고 다른 선수들 심부름만 했다. 그래도 공부를 안 해도 되는 게 좋고, 체조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매일매일 밤늦게까지 열심히 운동했다.”
―아버지는 체조를 안 시키려고 했다고?
“아버지는 딸 여섯 중에 중간인 나만은 무조건 대학에 보내겠다고 늘 말했다. 그래서 점심 먹으러 집에 들어오면 옆에 앉혀놓고 <노동신문> 사설을 읽히고는 모르는 단어를 가르쳤다. 때때로 구두시험도 봤다. 대학에 갈 공부를 일찍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딸이 운동에 시간을 많이 뺏기니까 아버지는 리듬체조 선생님을 찾아가서 ‘얘는 리듬체조에 재주가 없으니 그만두자. 시합도 못 나가지 않느냐’고 몇번을 말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이 ‘아니다. 잘하니까 조금만 더 해보자’면서 아버지를 달랬다.”
이경희의 아버지(2004년 작고)는 대부분의 평양시민처럼 점심을 집에 와서 먹었다. 그는 당의 주요 간부를 재교육하는 ‘김일성고급당학교’의 교원으로 일했다. 빨치산 투쟁 중에 숨진 부모(이경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혁명열사릉에 안치) 덕분에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하는 등 혁명가 후손의 엘리트 교육 코스를 밟았다. 1990년대에 남한에 사촌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황해남도 해주공산대학으로 쫓겨가 일하기도 했다. 이경희의 어머니(2016년 작고)도 평양의 중앙당 공급소, 육류가공공장의 창고지기를 맡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코치들의 쟁탈전 대상이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는데.
“내가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게 되자, 리듬체조 선생님들이 이경희를 서로 자기한테 달라고 부모님한테 졸랐다. 여기도 마찬가지지만 코치들은 제자를 잘 키워야 국제대회에도 나가는 등 자기도 성공한다. 부모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골머리를 앓다가 초등학교 시절의 첫번째 선생님(김득숙)한테 나를 맡겼다. 그 선생님은 결혼을 일찍 하는 바람에 국제대회 메달은 없었지만 나를 더 잘 지도하기 위해 야간대학까지 다니는 등 정말 열심히 했다. 내가 중학교 들어갔을 때는 나 하나만 가르쳤고, 나도 은퇴할 때까지 그 선생님에게만 지도를 받았다.”
북한의 리듬체조 선수 출신
유연성 좋아 일찍부터 두각
1991년 세계U대회 3관왕
최연소 ‘공훈체육인’ 영예
‘평양의 강남’ 동네에서 거주
친정은 혁명엘리트 집안
시가는 노동당 고위간부
“아이 자유롭게 키우려” 탈북
―운동을 하면서 힘들지는 않았나?
“힘든 것은 말로 다 못 한다. 늦게 시작해서 다른 애들을 따라가려다 보니 더 힘들었다. 게다가 우리 선생님은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다. 실수하면 공으로, 리본으로, 곤봉으로 얼굴과 팔 등 닥치는 대로 때렸다.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칭찬도 잘 안 해줬다. 잘한다고 하면 내가 자만할까봐서 그랬다고 나중에 말하시더라. 어쨌든 선생님은 기술이나 열정은 뛰어난데 방법이 잘못됐다. 이다음에 나는 절대로 애들을 때려서 가르치지 않겠다고 뼈에 사무치도록 맹세했을 정도였다.”
―그런 시절을 어떻게 견뎠나?
“무조건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힘들더라도 참았다. 내가 생각해도 착한 아이였다. 물론 선생님은 내가 또박또박 대꾸를 잘한다면서 ‘저년 보통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말이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으면 항상 되묻는 등 아버지에게 <노동신문>에 나오는 단어를 배울 때처럼 운동할 때도 따지긴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따지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고 하더라. 그러다가 선생님이 야간대학에 다니며 과학적인 설명을 해주면서 선생님과의 관계도 나아졌다. 그 전에는 공중에 던진 볼이나 곤봉을 못 잡으면 ‘바보처럼 그것도 못 하느냐’고 야단치면서 반복 훈련만 시켰는데 공중에서 볼이 낙하할 때의 중력 원리 등을 설명해줬다. 그 뒤에는 연습도 재미있어지고 실력도 확 뛰었다.”
북한의 리듬체조 스타였던 이경희 리듬체조 국가대표 후보선수 전임지도자가 지난 9일 서울 올림픽공원을 걷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39호실 대성은행 총재 지낸 시아버지
열다섯살부터 국제대회에 참석한 이경희는 곧 아시아권을 넘어 세계적인 선수로 떠올랐다. 유럽계가 판치던 리듬체조 분야에서 동양인인 그가 1991년 영국 셰필드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3관왕을 차지한 것은 놀라움 자체였다. “국제대회에서 경기를 위해 입장하면 유럽 선수들이 다 쫓아 나와서 쳐다볼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북한에서는 최연소 ‘공화국 공훈체육인’이 됐으며, 최고의 훈장인 ‘김일성청년영예상’까지 받았다. 1992년 북한의 유도 영웅 김창수가 남한으로 넘어간 뒤 북한 당국은 자국 선수의 모든 스포츠대회 참가를 3년간 동결했다. 이에 1994년 아시안게임 출전을 준비하던 이경희는 1993년 1월 은퇴했다.
이경희는 몇년 뒤(1996년) 결혼했다. 친정처럼 시가도 ‘평양의 강남’으로 불리는 보통강구역에 아파트가 있었다. 하지만 훨씬 더 잘살았고, 가문의 힘도 더 셌다. 시아버지는 군이 운영하는 외화벌이 총괄기구인 노동당 39호실의 대성은행 총재 등을 지냈다. 시어머니도 보통강구역 종합식당의 책임자로 일했다. 평양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한 남편도 북한 최고지도자의 통치자금을 관리한 것으로 알려진 노동당 38호실에서 근무했다. 무역일꾼으로 중국에 나간 남편을 따라 이경희는 한동안 중국 창춘과 상하이에서 거주했다.
―북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 같다.
“굶주림을 피해 넘어온 대부분의 탈북자들한테는 정말 미안한 얘기이지만, 나는 어려서나 결혼해서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운동할 때는 부상품으로 받은 초콜릿과 꿀이 늘 넘쳤다. ‘고난의 행군’(1990년대 중·후반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 등으로 북한이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시기로 수십만명이 굶어죽은 것으로 알려짐)도 남한에 와서야 알았다. 결혼생활도 편했다. 시가 어른들은 배려심이 많은 훌륭한 분들이었는데 특히 셋째 며느리인 나를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 <노동신문> 기자인 첫째 며느리보다 나를 더 좋아하면서 ‘너는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아도 된다’고까지 아껴줬다.”
―북한의 최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탈북을 결심했나?
“남편이 2005년에 중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평소 가슴 부근이 답답하다고 했지만, 우리 둘 다 젊어서 그랬는지 건강을 돌봐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건강검진조차 한번 안 받았다. 남편이 숨진 뒤에도 북한에서의 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아이 때문에 남한으로 왔다.”
―무슨 뜻인가?
“내가 어려서부터 세상 구경을 다 하지 않았나. 그렇게 세계를 다 돌다 보니까 우리가 얽매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평양공항에 내리면 밖에서 본 것과 행동한 것을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언니와 동생들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나에게 늘 입단속을 시켰다. 그래서 자매들은 어느 대회에서 메달을 땄다는 신문 기사가 나온 뒤에야 내가 어디에 갔다는 것을 알곤 했다. 그런 게 너무 싫었다. 또 시가에서는 밤에 불을 켜도 커튼을 쳐서 불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하고 살았다.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음식물 쓰레기도 밤에 멀리 가져다 버려야 했다. 음식을 해 먹으면 냄새 때문에 윗집·아랫집과는 나눠 먹지만, 굶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우리만 쓰레기가 나올 정도로 끼니를 챙겨 먹는 게 미안해서였다. 잘 먹고 잘살아도 마음이 안 편했다. 그런 틀에 매여 사는 데 한이 맺혀서인지 하나뿐인 아이만은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게 해주고 싶었다. 세상이 넓다고 말로 하는 것보다 네가 한번 눈 뜨고 몸으로 체험해보라고 하고 싶었다.”
아이가 탈북자란 사실 아무도 몰라
이경희가 천신만고 끝에 2007년 3월 한국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10살이었다. 속상한 일이 없지는 않았으나 올해 21살로 대학생인 아이는 비교적 알아서 잘 컸다. 자신의 출신이 알려질까봐 엄마를 학교에 절대 오지 말라고 했다. 북한이탈주민에게 주어지는 급식이나 교복비 지원 등도 모두 거절했다. 그래서 고교 졸업 때까지 학교에서는 아무도 그가 탈북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경희는 잘 커준 아이에게 고맙기도 하지만,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에 늘 가슴이 아프다. “태릉에서 국가대표팀 코치로 일할 때는 주중에는 거기서 머물러야 해서 주말에만 잠깐 집에 들를 수 있었다. 애가 혼자 지내다 보니 집안은 늘 난장판이었다. 그런데다 학교 결석도 잦았다. 시험 때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잠들면 아침에 시간 맞춰 깨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주말 아침에 여러 개의 자명종이 여기저기에서 우는 것을 들을 때는 정말 마음이 짠했다. 중고등학교 때 그렇게 입고 싶어했던 브랜드 옷도 한번 사주지 못했다. 옷은 주로 성당에서 얻어 입혔다. 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 계신데 여기 와서 저렇게 고생하는구나 싶어 눈물이 날 때가 많았다.”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경희는 남한에서 비교적 빠르고 순조롭게 정착하는 듯 보였다. 2008년 1월부터 체조협회 순회코치로 리듬체조 대표팀을 지도했다. 2011년 3월부터는 국가대표 리듬체조 단체팀 코치가 됐다. 그의 꿈은 “내 제자들을 데리고 국제대회에 나가서 북한 선수들과 시합해 이기는 것”이다. “남이냐 북이냐가 아니라 내가 키운 선수의 성공은 곧 나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려해 보이는 겉과 달리 속은 달랐다. 그의 계좌에 들어온 월급은 2008년에 100만원, 2009년에 150만원이었다. 1급 지도자 자격증을 가지고 단체팀 코치가 된 뒤에도 212만원에 불과했다. 다른 코치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아들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쓰지 않고 먹지 않는 생활을 해야 했다”.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참석한 북한의 리듬체조 대표인 이경희 선수(현재는 한국 국가대표 후보선수 전임지도자)가 북한의 유도팀 지도자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경희씨 제공
돈이 부족한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것은 체조계에서 만난 한 사람이었다. 이경희가 남한 사회를 알아가기 시작할 즈음인 2009년 3월 어느날이었다. 리듬체조 강습회의 중 휴식시간에 맨 뒤쪽 자리에 앉아 있던 체조협회 고위 간부 아무개가 이경희를 불렀다. 그는 이경희에게 명함을 건네준 뒤 자기는 ‘체조계에서 엄청 강한 사람으로 소문났다’고 자랑했다. 체조협회의 실권자인 그는 처음에는 이경희에게 잘해줬다. 훈련장에 와서 ‘한국 선수와 북한 선수들의 차이가 뭐냐’고 묻기도 하고, 이따금 전화해서 “식사했느냐”, “밥 사주려고 전화했다”, “외롭지 않으냐”고 물었다. 이경희는 북한에서 온 자신을 도와주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여겼다.
―언제부터 성적인 괴롭힘을 당했나?
“2011년 초부터 리듬체조 국가대표 단체팀 코치가 됐다. 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시키려면 국제대회 참가가 필수적이다. 북한에서도 일년에 몇차례씩 나간다. 그런데 내가 맡은 뒤에는 국제대회에 전혀 안 내보내줬다. 그래서 권한이 있는 그 간부를 찾아가서 선수들을 국제대회에 내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되지도 않을 선수를 위해 왜 고생하느냐. 쉬엄쉬엄하라’라며 신체 접촉을 했다. 내가 놀라서 피하면 ‘한국에 와서 아직 몰라서 그런다. 여기는 북한과 달라 자유가 많은 나라라서 좋다’고 하면서 추근댔다.”
이경희가 경찰에 제출한 고소장(2017년 5월10일)에 따르면, 2011년 여름 이경희 집 앞으로 찾아온 그는 “대표팀 코치는 선수들 가르치는 것보다 내 말 잘 들어야 오래 할 수 있다”면서 차 안에서 강제 추행했다. 이후에도 이경희가 2012년 2월5일 급여 인상을 요구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 2012년 8월과 2013년 1월 그가 근무하던 한 학교의 체육관 사무실로 불러서 갔을 때 등 여러 차례 성폭행을 시도했다. 이경희가 반항하면서 거부하자, “독한 여자다. 체조계에서 내가 30년 동안 맘먹은 대로 못 한 게 없다”고 협박했다. 적은 월급과 대표선수 한명의 이탈 사건 등으로 2014년 3월30일 사표를 내기 위해 이경희가 그의 집 근처에 찾아갔을 때도 그는 차 안에서 성폭력을 행사했다.
“그 간부의 전화가 오는 것도 무섭고 얼굴 보는 자체가 공포”였으나 이경희는 “치욕스러운 마음의 상처를 여자라서 참아야 했고, 북한에서 왔기에 참아야 했으며, 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꾹꾹 참아야 했다”. 대신 “혼자 긍정적 마인드로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면서 살았다”.(2014년 4월, 대한체육회에 제출한 탄원서)
“남의 밥그릇 뺏지 마라”는 말에 고소 안해
뒤늦게 대한체육회에 탄원서를 내게 된 계기는 뭔가?
“나는 참아야 되는 줄 알고 참았는데 그는 자신의 성적인 요구를 내가 안 들어준다는 이유로 교묘하고 유치한 방법으로 나를 코치에서 자르려고 했다. 나한테 손해가 있더라도 공개해서 다른 피해자들이 생기는 것이라도 막자는 생각이 들었다.”
―탄원서 낸 뒤에는 어떻게 진행됐나?
“대한체육회가 감사에 나섰다. 나를 불러 얘기를 들은 뒤에 그를 조사했다. 공식적인 조사가 시작된 지 며칠 뒤 그는 체조협회에 사표를 제출(2014년 5월22일)했다. 그가 사표를 내자 감사 등 징계 절차도 끝나더라. 그런데 그는 감사를 받을 즈음부터 내가 자신의 연인이었다느니 내가 다른 이와 동거를 했다느니 하는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내가 대표팀 코치에서 잘릴 것 같으니까 자기를 음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너무 화가 나서 체조협회장한테 탄원서(2014년 6월9일)를 다시 냈다.”
이경희는 2차 탄원서에서 “저는 ○○○과 사랑과 결혼에 대해 한마디 말조차 섞은 적이 없으며 동거했다는 것은 범죄”라며 그의 거짓말로 인해 “저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있으며 저의 계속적인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 이경희는 진상 규명을 해서 그를 중징계할 것을 체조협회에 요구했다. 하지만 체조협회도 그는 이제 민간인이라며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억압 벗었지만 또다른 고난
남쪽 코치 절반 불과한 급여에
“고위간부에게 성추행당해”
고소 이어 공개 ‘미투’ 나서
민사재판에선 “성추행한 듯”
검찰은 두차례 “무혐의” 기각
법원의 재정신청 결과 기다려
“‘정의 승리’는 옛말 되나” 눈물
―그때 경찰이나 검찰에 성폭력 혐의로 고소를 왜 안 했나?
“내가 그 사람한테 성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주변 사람들은 거의 다 알았다. 그에게 당할 때마다 친한 사람들에게 내가 상담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법정에서도 증언해줬던 그들은 탄원서를 두번 낼 때 나한테 경찰에 고소하라고 권유했다. 경찰에서도 나의 피해 사실을 알고는 도움을 주겠다고 연락해왔다. 그러나 체육계의 고위 인사 등 다른 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남의 밥그릇을 뺏으면 제일 큰 원한을 산다. 그가 사표를 냈으니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떠냐’고 말렸다. 나도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을 다시 상기해야 하는 게 너무 창피하고 싫어서 고소를 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면 다 잊히고 괜찮아지겠지,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그와 연인인 적이 없으니 나만 떳떳하면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고위 간부는 사표 낼 즈음부터 다시 체조협회의 고위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변에 큰소리쳤다.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일반의 예상과 달리 그는 2016년 여름, 2년 전 떠날 때보다 더 높은 체조협회 고위직에 선임됐다. 그러나 상위 기관인 대한체육회는 그가 2년 전에 성추행 혐의로 감사받은 사실을 들어 인준을 거부했다. 그러자 그는 대한체육회의 인준 거부가 위법·부당하다면서 서울동부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오랜 재판 끝에 1심 법원은 지난 2월 선고에서 대한체육회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경희의 일관된 진술과 거기에 부합하는 여러 증거 등을 들어 “원고는 이경희의 주장과 같이 이경희를 여러 차례 성추행한 것으로 보인다”며 성추행을 인정했다.
북한의 리듬체조 국가대표 시절 이경희(현 한국 리듬체조 국가대표 후보선수 전임지도자)씨가 1991년 후프 동작을 선보이고 있다. 이 사진은 당시 북한의 스포츠 명장면을 담은 달력에 실렸다. 이경희씨 제공
전직 간부는 여전히 “우린 연인” 주장
―재판 과정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던데.
“지난해 4월 증인으로 법정에 나갔다가 기절하다시피 했다. 그쪽 변호사들이 나를 방탕하고 꽃뱀 같은 여자라고 몰고 가는 것도 분통 터졌지만, 그가 증거라면서 법정에 낸 서류는 나를 미치게 했다. 몇몇 코치들이 ‘나와 그가 연인이었다’는 식으로 얘기한 진술서가 있었고, 그와 내가 펜션에서 자고 갔다는 펜션 사장의 확인서도 있었다. 물론 이것들은 다 고위 간부의 주문에 의해 만든 것이라는 점이 나중에 드러났지만, 그때는 억장이 무너져서 법정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고위 간부는 지금도 이경희의 말을 전면 부인하면서 연인설을 주장하고 있다. 지난 12일 저녁 통화가 된 그는 “체육회 감사와 경찰 및 검찰 수사 때 대답한 것처럼 이경희씨와는 2011년 이전부터 성관계를 가졌고, 그와 결혼할 생각까지 혼자 했을 정도로 가까웠던 연인 관계였다. 그러니 강제로 추행하거나 성관계를 시도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방송 이후 나야말로 정신과 약을 먹는 등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다”고 덧붙였다.
―경찰에 고소한 것은 재판에서의 증언 직후인가?
“그렇다. 그때서야 어떤 헛소문이 떠돌든지 간에 나만 떳떳하면 괜찮을 거라는 내 생각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 처박아뒀던 서류들을 찾아서 안고 무작정 경찰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고는 고소장을 작성(2017년 5월10일)해서 냈다.”
서울지방경찰청에서는 6개월 이상 꼼꼼하게 수사했다. 경찰은 이경희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인 점, 재판 진술서 등이 그 간부의 요청에 따라 준비된 문구대로 작성됐다는 점 등을 들어 검찰에 구속영장 신청을 했다. 하지만 서울지검 검사는 영장신청을 기각하고 두차례에 걸쳐 담당 경찰관에게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하라’고 지휘했다. 경찰은 결국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넘겼고, 검찰은 공소시효를 들어 공소권이 없다거나 어떤 사례(2014년 3월3일 피해)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어 무혐의”라고 결론내렸다. 이에 이경희는 서울고등검찰청에 곧바로 항고했으나, 고검도 지난 2월2일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
―검찰의 두차례 불기소 처분에 불복해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낸 것으로 안다. 법적으로는 마지막 처분을 앞두고 있는데.
“곧 나올 법원의 재정신청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법원도 증거 없다면서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닐까 싶어 두렵기조차 하다. 변호사나 전문가들은 이 정도 진술이나 정황이면 성범죄에서는 증거가 충분하다고 하는데도 자꾸 검찰이 무혐의를 내리니까 무전유죄 유전무죄에 걸린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북한에서 온 힘없는 사람이라고 내 말에는 귀를 안 기울이는 것 같다. 그래서 요새 나는 남쪽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가장 부럽다. 내가 아무리 잘났으면 뭐 하나. 태어난 게 이북이라서 이렇게 힘든데.”
―지난달에는 공개적으로 미투 고발(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3월1일 방송)도 했다. 얼굴 내놓고 싸우겠다는 결심이 쉽지 않았을 텐데.
“다 포기하고 했다. 설령 모든 걸 잃더라도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에는 서울시교육청에도 탄원서를 냈다. 성추행 사실이 인정돼 대한체조협회 부회장 취임이 승인이 안 된 사람인데 아직도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런데 교육청에서는 법적인 판단이 있어야 조처를 취할 수 있다고 답하더라. 체육회는 사표만 내면 끝이고, 검찰은 무혐의 처분하고, 교육청은 성추행한 사람을 교단에 그대로 두는 게 이 나라의 정의냐. 정말이지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다.”
2017년 6월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리듬체조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석한 이경희 리듬체조 국가대표 후보선수 전임지도자가 대회를 알리는 표지판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경희씨 제공
“착한 끝이 정말 있는지 보고파”
―방송에 나오고 달라진 것은 없나?
“달라진 것도 바뀐 것도 없다. 잘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나만 괜히 창피하게 됐다는 생각도 든다.”
―혹시라도 동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보거나 하지는 않나?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내가 비굴하게 살지 않고 늘 당당하게 살아온 것을 안다. 또 말은 안 해도 내가 그 간부한테 당한 것을 안다. 그가 나한테만 그랬겠나. 그의 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더럽고 힘드니까 떠났지만, 나는 그럴 처지가 못 된다. 그래서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 착한 끝은 있다니까 진짜 그런가 보려고 한다. 나는 그가 감옥 가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죄가 인정돼서 단돈 만원, 아니 천원의 벌금형이라도 받는 걸 원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정의가 있는 것 아니냐. 체조계가 다 아는 성추행에 대해 무혐의라는 게 말이 되나.”
인터뷰 중간쯤 북한에서 고생하던 얘기를 할 즈음부터 이경희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남한에 내려와서 차별받던 얘기를 하면서부터 뺨을 구르기 시작한 눈물은 3시간 동안의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마르지 않았다. 그는 “정의가 이긴다는 건 옛말인 거 같다. 그런 것을 믿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한 채 참으면서 세상을 살아왔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 말은 꼭 써달라”는 부탁을 남기고는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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