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지난 21일 오후 해양수산부 공무원 A씨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기사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선주들과의 용선료(선박 임대료) 협상이 잘 안 되면 현대상선(011200)은 법정관리로 갈 수밖에 없다. 정부의 추가 지원은 없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해운업은 도로나 철도 같은 기간 산업이나 마찬가지이고 협상이 진행 중인데 한 나라의 경제부총리가 저렇게 말해도 되나 싶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해운업 구조조정 해법을 놓고 정부 부처 사이에 미묘한 온도 차가 나타나고 있다. 정부 부처 내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중심에 선 것은 유일호 경제부총리다.
유 부총리는 지난 15일 미국 워싱턴DC에서 “기업 구조조정을 더는 미룰 수 없다. 직접 챙기겠다”며 현대상선을 직접 거론한 이후 연일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 21일에는 “국적 선사는 사정이 변하면 줄일 수도 있고 늘릴 수도 있다”고 하더니 이틀 후인 23일에는 “채권단 중심의 정리가 원활치 못하면 정부가 개입할 수도 있다”며 구조조정 속도를 높일 것을 강하게 암시했다.
이 같은 발언에 당황한 것은 금융위원회·해양수산부 등 해운업 구조조정을 직접 다뤄왔던 다른 이해 당사자들이다. 금융위는 그동안 기업을 정상화한 후 회생하는 쪽에 구조조정의 무게를 실어왔다. 금융당국 고위관계자는 “기업을 자꾸 죽이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산업은행이 주채권은행인 기업은 국민의 기업”이라며 “혈세를 투입한 기업을 죽이는 것은 국가 경제에 미칠 악영향이 더 크므로 회생 기회를 주면서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해운 산업 주무부처인 해수부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다. 현대상선과 한진해운(117930) 구조조정 문제를 개별 기업 이슈가 아닌 국익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해수부의 견해다. “일단 살려놓고 보자”는 이야기다.
한국은 수출 물량의 99%를 배로 운반하고, 국내 최대 항만인 부산항 물동량의 절반 이상은 부산에서 배만 갈아타고 타국으로 향하는 환적 화물이다. 이런 마당에 국적 선사가 줄면 호황기 운임 인상을 통제하기 어렵고 부산항의 교통 요충지 기능 약화, 국가 전략 화물의 운송 어려움 등도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해수부 관계자는 “올해 5~6월까지 세계 항로 대부분을 점유한 4대 해운 동맹이 재편 중”이라며 “만약 현대나 한진이 법정관리에 들어간다면 동맹에서 떨어져 나가 사실상 재기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구조조정 정책을 진두지휘할 정부 컨트롤타워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경제 정책 ‘코디네이터’를 자처하는 기재부는 정작 부총리 발언에 선을 긋고 있다. 금융위(재무)·해수부(산업)·고용부(실업) 등 부처별로 맡은 업무를 하고 범부처 협의체에서 입장을 조율하면 될 일이지 추가로 총괄 조직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기재부는 별도의 전담팀 구성없이 경제정책국 중심으로 구조조정 기업의 세제·금융 지원 방안 등을 우선해 마련하고 있다. 기재부 고위관계자는 “해운기업 구조조정에서 정부가 출자 전환을 할 것인지 법정관리로 갈 것인지 내부적으로 방향을 정한 것도 없다”며 “정부가 제시한 원칙에 기업이 얼마나 잘 따라오는지 보고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과거 대우조선해양(042660)에 정부가 4조원대 혈세를 쏟아붓고도 이를 웃도는 손실을 초래한 원죄가 있다”면서 “부총리의 경고성 발언은 경제를 총괄하는 기재부가 책임을 떠안지 않으면서 용선료 협상 중인 선사들에게 ‘요금을 낮추지 않으면 돈을 떼일 수 있다’고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24일 청와대에서 개최한 경제현안회의 결과에 관심이 모인다. 이날 회의에는 유 부총리와 각 부처 장관이 참석해 구조조정 진행 상황과 대응 방안, 실업 대책 등을 논의했다. 결과는 오는 26일 금융위가 구조조정협의체 개최 후 직접 발표할 계획이다.
당사자인 기업은 정부 부처 간 입장 차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부총리께서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정확한 의사를 모르겠다”며 “약간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하소연했다.
전문가들은 정부 안에서조차 한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경우 해당 기업과 채권단 모두 우왕좌왕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구조조정은 정부가 방향성을 정확히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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