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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pril 30, 2016

어버이연합 관제데모 진짜 배후는 '박근혜와 십상시' 청와대 심어놓고 ‘以夷制夷’ 병법으로 관제데모 주도

어버이연합의 관제데모 의혹과 눈물겨운 박근혜의 변명
주요사안 때마다 정권 편들기 데모 고소 고발

청와대가 어버이연합을 관리하며 각종 사안마다 데모를 지시했다는 이른바 ‘어버이연합 관제데모’ 의혹이 갈수록 그 파장이 커지고 있다. 본국의 한 주간지가 어버이연합 일당 알바 사건을 최초 보도하며 커지기 시작한 관제 데모 의혹은 이후 종합편성채널 JTBC가 전국경제인연합의 자금 지원 내역을 공개하면서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파장이 큰 이유는 그 동안 어버이연합을 비롯한 극우단체들이 주요 사안마다 정권의 일방적 편들기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편을 드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극우단체 고발 ⇒ 검찰의 신속한 수사’는 일종의 법칙이었다. 이제 관심은 어버이연합을 비롯한 극우단체들의 데모 배후의 마지막에 누가 있느냐로 모아지고 있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인물은 청와대 정무수석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의 허현준 행정관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도 보았듯이 전경련과 전경련 산하 기업들, 탈북자 단체 등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것을 보면 일개 행정관 혼자서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목소리다. 결국 허 행정관은 사실상의 메신저 역할일 뿐 몸통은 따로 있다고 할 수 있다. 60~70년대 유신정권에서나 있을법한 관제 데모 의혹의 배후를 <선데이저널>이 추적했다. <리차드 윤 취재부 기자>

운동권 출신 전향인물-朴 비밀조직 핵심측근


본국 언론이 거론한 관제데모의 배후는 청와대 허현준 행정관이다. 그는 정무수석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에서 일하고 있다. 허 행정관은 대학시절 주사파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인물로서, 2012년 대선 직전까지는 <시대정신>이라는 잡지에서 일했다. 전북대 88학번인 허 행정관은 1994년 전북대 총학생회장과 전북총련 의장을 지냈다. 범청학련 남측본부 부의장로 활동하면서 ‘남·북·해외 공동연석회의’를 성사시켰던 그는 범청학련사건과 서울대 범민족대회사건으로 두 차례 구속됐다. 특히 그는 1996년 한총련 연세대 사건 때 한총련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2년간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허 행정관은 98년 (주)다우스마트라는 정보통신회사를 설립하고 2003년 4월에는 인터넷 생선회 쇼핑몰(피시팔팔)을 열면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통일운동과 장애인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03년 민화협과 통일맞이,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탈북자동지회 등에 활어횟감을 무료로 배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신지호 전 의원 등과 가깝게 지내며, 젊은 보수층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종북 타파를 부르짖던 그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에 들어가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됐다.

누가 그를 청와대로?

하지만 일개 행정관 하나가 극우단체를 관리하고, 전경련을 동원해 극우단체를 지원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전경련은 본국 대기업 500개가 참여한 최대 경제 단체로 행정관이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서 선뜻 돈을 지원하고 하는 곳이 아니다. 전경련은 어버이연합에 몇 차례에 걸쳐 수 억원이 넘는 돈을 지시했고, 이 돈이 삼성과 현대차 등에서 지원한 돈이라는 소문도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전경련과 기업 등이 움직였을 때는 일개 행정관이 아니라 결국 행정관이 메신저가 되어, 청와대 차원의 뜻을 전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허 행정관의 보고 라인을 따라 올라가보면 그의 배후에는 당연히 십상시 3인방과 박근혜 대통령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현재 허 행정관이 속해 있는 곳은 청와대 정무수석 산하의 국민소통비서관실이다. 국민소통비서관실은 이명박 정부 시절에 만들어졌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지자 청와대가 국민의 목소리를 듣겠다며 신설한 것이다. 첫 국민소통비서관은 현재 소셜커머스 업체인 쿠팡의 부사장인 김철균 전 다음 부사장이 맡았다. 그 뒤로 이명박 대통령의 팬클럽인 ‘MB연대’ 대표로 활동한 박명환 변호사 등이 국민소통비서관으로 활동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을 맡았던 신동철씨가 첫 국민소통비서관으로 임명되는 등 주로 여론 동향 파악에 밝은 인물이 이 자리를 맡아왔다.

현재 비서관 자리는 친박계 지자체장인 유정복 인천시장 보좌관 출신 오도성 비서관이 맡고 있지만, 관제 데모가 한창이던 2013년과 2014년에는 신동철 전 정무비서관이 맡고 있었다. 당시 정무수석은 이정현 의원이 맡다가 2013년 6월 홍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김선동 정무비서관이 사실상의 수석 역할을 해왔다. 신 전 비서관은 박근혜 정부 출범과 동시에 국민소통비서관으로 임명됐다가 2014년 6월 같은 정무수석 산하 정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인사에 따르면 이 시기 현재의 어버이연합 등이 본격적으로 데모에 지원이 되는 등 지금의 관제데모가 세팅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즉 이 시기 허 행정관의 보고라인에 신동철 전 정무비서관이 있었던 셈이다. 특히 정무수석 자리가 공석이어서 사실상 대통령과 비서실장을 제외하고는 신 전 비서관이 허 행정관을 실질적으로 핸들링하는 위치에 있었다.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십상시

여기서 재밌는 것이 신 전 비서관의 이력이다. 신 전 비서관은 2007년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도운 측근 인사다.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을 지낸 신동철 전 비서관은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캠프 여론조사단장을 지냈고,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2013년부터는 청와대에서 정부비서관으로 일해 왔다. 그는 지난 2014년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 논란 당시 이른바 ‘십상시’ 중 한 명으로 지목된 인물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 중 한명이기도 하다. 본지도 이미 십상시가 논란이 되던 시절 신동철 전 비서관의 이름을 거론한 바 있다.

2014년 말 세계일보가 정윤회 문건을 보도할 당시 문건은 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비서관 등 핵심 3인을 포함한 비서진 10명을 ‘십상시’로 표현하면서, 이들이 정씨와 서울 강남의 중식당 등에서 지난해 10월부터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고 김기춘 비서실장 교체 등을 논의했다는 내용이 적시돼 논란이 됐다. 청와대는 당일 이재만 총무비서관 등 8명 명의로 세계일보 사장과 편집국장, 기자 등 6명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고소인 중에는 핵심 3인 외에 신동철 정무비서관, 조인근 연설기록비서관 등 오랫동안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한 참모들과 음종환 홍보기획비서관실 행정관, 김춘식 행정관, 이창근 제2부속실 행정관 등이 포함돼 있다.

결국 허현준 행정관이 아니라 신동철 전 비서관을 비롯한 청와대 핵심 보좌관들이 이 사실을 지시 또는 적어도 인지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 청와대 사정에 밝은 인사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다. 신 전 비서관은 총선 직전 정무비서관직을 그만두고, 1년 넘게 공석인 KB 감사에 거론될 정도로 현 정권에서 극진하게 챙기고 있다. 결국 이런 일련의 보고 과정은 검찰 수사에서 밝혀져야 하지만 검찰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윤회 사건 때처럼 ‘행정관 혼자서 한 일이다’라는 식으로 수사의 가이드라인을 정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4년에도 세계일보가 ‘정윤회 문건’을 터트리자 이재만 총무비서관 등 청와대 관계자들은 세계일보 기자와 편집국장, 사장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가 유야무야됐다. 정윤회 문건 사태 때나 어버이 게이트 때나 똑같이 보도에 대해 해명하기보다 언론사를 압박하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朴 혼자만 레임덕 없다?

박 대통령의 독불장군식 상황인식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으로 박근혜 정부의 권력 유지 기반 중 하나였던 극우단체와 정부 간 연결고리가 드러남에 따라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 동력에 치명타를 입게 됐다. 원내1당이 된 더민주는 진상조사 TF를 꾸렸고 관련 상임위 개최와 국정조사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청와대 배후설의 출처가 그간 친정권 시위에 앞장서 왔던 어버이연합 관계자, 탈북단체 대표 등이라는 점도 권력 균열의 한 단면이다. 총선 패배로 새누리당 내 친박이 힘을 잃었다는 점도 권력 균열을 부추기는 요소다.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새누리당 지도부가 총 사퇴한 이후 원유철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맡기로 했으나 비박계 의원들은 원 원내대표에게도 총선 참패가 있다며 퇴진 공세를 벌였다. 이에 원 원내대표는 빠른 시일 내 새 원내대표를 선출하고 비대위원장직을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비박계는 나아가 선거 참패의 책임이 있는 친박계가 향후 당권을 장악해선 안 된다면서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바뀌지 않는 것은 대통령 혼자다. 박 대통령은 4월 26일 열린 본국 45개 중앙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과 함께 한 오찬간담회에서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국민과 국가에 대해서 무한한 책임을 지는 자리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지난 시절을 보면 대통령 중심제라고는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의 ‘관심법안’을 처리하지 않는 국회를 민심이 심판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4·13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에 대해 “국회가 양당 체제로 되어 있는데 서로 밀고 당기고 이러면서 되는 것도 없고 그런 식으로 쭉 가다 보니까 국민들 입장에서는 변화와 개혁이 있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들을 하신 것 같다”며 “양당 체제에서 3당 체제를 민의가 만들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집권여당의 총선 참패 원인을 자신의 국정운영 방식이 아닌 양당 체제 탓으로 돌린 것이니 참으로 후안무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총선에 나타난 민심은 대통령의 안하무인격 불통과 독불장군식 국정운영에 대한 심판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별로 없는데, 대통령의 인식이 이렇다면 이후 행보 역시 종전과 다를 것 같지 않아 조기 레임덕 현상이 발 빠르게 찾아올 것이 자명한 노릇이다. 소통의 전제는 나도 변하는 것인데 박대통령은 혼자 그대로인 채 상대방에게만 타협하자면 될 일이 없다. 결국 2017년 대선까지 대통령은 혼자만 레임덕이 아니라며 부인하다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주지 않아 이 모양이 됐다며 임기를 끝낼 것이 분명해 보인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행차’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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