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서 개막식 보고 미국으로.. 나의 '평화올림픽' 관람법
[오마이뉴스 글:최현정, 편집:홍현진]
먼저 말하지만 난 동계올림픽을 반대하던 사람이다. 메달권은 언감생심이고 자연파괴만 명약관화한데 어느 누가 좋다고 할 수 있겠나.(관련 기사 : 이 사진 한 장에 평창올림픽 '성공 열쇠' 담겼다)
그러나 경기는 시작됐고 우리가 만든 새 정부는 성공을 위해 애쓰고 있다. 덕분에 살얼음판 같던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고 있다. 마음을 돌려먹었다. 이왕이면 잘 치르고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18대 대통령 선거 후 당선자 박근혜가 TV를 장식하고 있던 2013년 1월 미국에 들어갔으니 꼭 5년 만에 다시 찾은 대한민국서 아흐레를 보냈다. 건강검진, 적성검사, 은행업무 등 짧은 일정 속에 꼭 해야 할 것을 죽 적어왔는데 그 중 굵은 글씨로 별 세 개를 표시한 것이 있다. 바로 평창 동계 올림픽 직관!
역사적인 순간
▲ 강릉역 앞 오륜동상 앞에서 강릉을 찾은 외국인 한국인 관광객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 최현정 |
▲ 개막식 아흔 한번째 국가로 코리아 팀이 입장하고 있다. |
ⓒ 최현정 |
▲ 개막식 행사중 |
ⓒ 최현정 |
낮에 강릉에서 만났던 한 기사님은 '한여름에도 밤엔 파카를 입어야 하는 곳'이라며 평창을 정의하셨다. 한 번 더 목도리와 모자를 여미며 평창 스타디움이 보이는 주차장에 내려선다. 유명한 황태 덕장이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바람이 매섭다. 오뎅과 컵밥으로 후다닥 요기한 후 입장권에 적힌 번호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아, 생각보다 춥지 않다. 촘촘히 둘러선 사람들의 기운인 듯도 했고 설렘 탓도 있는 듯하다. 좌석마다 놓여진 두툼한 평창 5종세트 가방 안엔 방석에 핫팩, 담요 등이 들어 있다. 정 추우면 뒤집어 쓸 수 있는 튼튼한 비옷까지 방한복으론 충분해 보였다.
오후 8시 정각, 성덕대왕 신종이 울리며 시작된 개막식. 세련된 식전 공연 후 선수 입장이 시작됐다. 한국어보다 더 많이 들리던 주변 낯선 언어 사람들의 국적이 확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저 사람은 스위스, 러시아? 아 프랑스 사람이구나. 선수단을 위해 비워뒀던 자리가 거의 찰 무렵, 아흔 한 번째 나라의 깃발이 모습을 드러낸다. 장내가 파도처럼 술렁거린다.
"꼬레"
"코리아"
"코.리.아"
"코리아"
"코.리.아"
일행 없이 혼자 조용히 앉아있던 나도, 잠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던 뒷자리 외국인도,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총 출동한 앞자리 대가족도 아기를 안고 온 옆의 젊은 부부도…. 다들 우와아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난 내가 이렇게까지 환호성을 지를 줄 몰랐다. 그건 얌전하던 옆 사람들도 마찬가지. 백의 민족을 상징하는 하얀 패딩의 남북 단일팀이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짧지 않은 시간 내내 감동과 흥분과 뭔지 모를 울컥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출렁댔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내가 지금 역사적인 순간에 있구나. 참 잘 왔다!'
대통령의 개막 선언과 화려한 후반 행사 내내 코리아 팀이 앉아 있는 자리에 자꾸 눈이 간다. 도대체 누가 남이고 누가 북인지 모르게 섞여 있는 그들 모두가 비현실적이고 신기하다. 멋진 두 시간의 개막 행사가 끝나고 나오는데, 같은 층에 앉아 있던 북한 응원단이 궁금해졌다. 출입구를 찾던 다른 관객들도 길을 만들어 그녀들을 먼저 보내며 인사한다.
"반갑습니다."
"참 고우세요."
"우리 자주 만나요."
"참 고우세요."
"우리 자주 만나요."
▲ 개막식장에서 퇴장하는 북한 응원단 |
ⓒ 최현정 |
갈 길을 재촉하던 북에서 온 그녀들도 우리처럼 볼이 빨갛게 상기돼 종종 걸음으로 객석을 빠져나간다.
누구보다 북한에 감사해야 할 이들, NBC
개막식 며칠 후 예정된 일정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TV를 켜 채널4의 NBC을 누른다. 앞으로 한 달간은 이 채널만 고정일 것 같다.
한국과 다르게 미국에선 NBC만이 올림픽을 중계한다. 소치 때보다 24%p 증가한 963만 달러의 금액을 IOC에 지불하고 독점 중계권을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작년말까지만 해도 도핑 파문으로 인한 러시아의 불참과 23년 터줏대감 앵커 매트 라우어의 성 추문 해고, 미 정가의 올림픽 보이콧 발언 등이 겹쳐 암울했던 분위기가 분명했다.
그러다 올 초 기사회생했다. 북한 참가가 결정된 이후다. 그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지난달 초, NBC의 저녁 뉴스 간판 앵커와 사장이 직접 북한을 방문해 마식령 스키장을 비롯한 북한 현지에서 방송을 내보내 미국인들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시차 탓에 일찍 눈이 떠진 월요일 아침 NBC Today Show를 켜니 클로이 김(Chole Kim) 특집을 한다. 17살 재기 발랄한 한국계 미국인인 그녀가 부모님의 헌신적인 지원 속에 스노보드 국가대표가 되어 오늘 밤(한국시간으론 다음날 아침) 금메달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다각도로 보여준다.
"난 클로이 아버지의 이 말이 너무 울컥했어요. '내 딸은 나의 아메리카 드림이다'."
공동 진행자 호다가 목소리까지 젖어가며 앵커 사반나에게 클로이 김 가족의 스토리를 소개한다. 기상캐스터 알은 매번 미국 날씨를 전하기에 앞서 평창, 강릉, 진부 등 강원도 날씨부터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NBC <투데이쇼>의 간판 앵커들이 모두 평창 현지에서 방송하며 아침 방송 2시간 중 절반 이상을 올림픽과 평창, 한국에 관해 직접 취재해 보여준다. 한국의 A-Z까지가 매일 매일 미국 공중파를 타고 있는 게 마치 강원도 시골집에 앉아 한국 방송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이들에겐 한국의 거리 음식이며 목욕탕 문화, 손가락 하트까지 모든 것이 취재 대상이다.
역시 한국에서 생방송 중인 저녁 뉴스 진행자 레스터 홀트의 <나이틀리 뉴스>가 끝나는 7시부턴 새로운 편성이 들어간다. 마감뉴스 시간인 11시까진 미국 선수가 나오는 올림픽 경기가 미 전역에 생방송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같은 공중파인 CBS, ABC, FOX-TV와는 비교 불가의 시청률이 나오고 있는 상태다. 더불어 올림픽을 통한 한반도 긴장 완화와 북미 대화의 가능성은 스포츠뿐 아니라 정치.사회 뉴스의 헤드라인으로도 손색이 없다.
이렇듯 올림픽 흥행을 통해 NBC 중계가 힘을 받는 데는 북한의 역할이 엄청나다. 신기록도 경쟁자도 없는 맥없는 대회였을 수 있던 올림픽이 '북한 참가'라는 호재 하나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부분의 뜨거운 뉴스로 등장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다. 누구보다 북한의 열린 행보에 감사해야 하는 이들은 바로 미국 NBC방송이 아닐까.
절약 올림픽 '그레윗~'
▲ 미국 시간 2/15 NBC 아침 방송 Today show에서 캡쳐. 메인 앵커인 사반나, 호다, 알이 평창에서 올림픽과 한국에 관한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
ⓒ NBC 화면 갈무리 |
▲ 미국 시간 2/15 NBC 아침 방송 Today show에서 캡쳐. 메인 앵커인 사반나, 호다, 알이 평창에서 올림픽과 한국에 관한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
ⓒ NBC 화면 갈무리 |
"개막식장에 지붕이 없는데 괜찮을까?"
"문화 행사장이 다 임시 건물이네요."
"주경기장 미닫이 문은 비닐로 만든 건가 봐?"
"문화 행사장이 다 임시 건물이네요."
"주경기장 미닫이 문은 비닐로 만든 건가 봐?"
평창에 있을 때 비싼 표 구입해 왔는데 생각보다 시설이 열악하다 느낄 때마다, 난 솔직히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은 쌍팔년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88 서울 올림픽에선 매스게임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호주 현지 취재(관련 기사 : 매일 경고받는 한국 '공식' 응원단)를 하며, 2002년 월드컵도 공중파 라디오 방송 스태프로 행사를 가까이서 지켜봤다.
외국의 시선을 의식해 살림 집을 철거하고 과도한 시설과 허례허식 서비스를 남발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대회인지 화를 돋우는 행태들을 수두룩하게 보아왔던 터다. 그래서 저렴하게 준비했다는 이번 올림픽이 맘에 든다.
러시아 소치의1/5라는 소리에 잘한다 싶고 중국 베이징의 1/10이라니 더 좋다.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내 돈 아니라고, 눈 먼 돈이라고 펑펑 쓰는 게 아닌 것 같아서다. 좀 불편하지만 다리 품 좀 팔고 조금 더 추위에 떠는 고생쯤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뭔가 불편을 얘기하는 외국인에게 설명을 자원했다.
"지붕 없이 안전을 감안하고 만들었는데도 무려 84억짜리 경기장이야. 관리 비용 때문에 경기 끝나면 모두 철거할 건물인데, 이 정도면 훌륭한 거 아니야? 안 그래?"
"셔틀을 너무 자주, 촘촘하게 배치하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들겠니? 그러면 납세자인 한국인들이 올림픽을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관광객인 우리가 좀 불편하더라도 올림픽파크에서 주차장 가는 셔틀을 타서 거기서 다시 갈아타 경기장 가면 돼. 안 어려워."
"맞아, 활강 경기장 슬로프를 남녀가 같이 이용하는 건 처음이라고 하더라구. 아름다운 가리왕산 훼손을 최소로 하려는 묘책이라니까, 이해해 줄 수 있지?"
이렇게 얘기하면 정상의 사고를 가진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오히려 환경 올림픽에 동참하고 현지 주민들의 삶을 방해하지 않게 돼서 기쁘다고 한다. '평화와 착한' 올림픽에 참여한 '착한' 관광객의 자부심을 심어주기 충분하다. 그리고 말한다. 조금 불편해도 괜찮다고.
그냥 내가 품 좀 들여서 알뜰히 설명해주면 그게 다 우리 세금 굳는 일이다 싶다. 더불어 말이 안 통해 겪을 쓸데없는 오해를 메울 수 있겠다 생각할 뿐이다. 성심껏 설명하면 중학생 정도의 영어로도 충분하다. 목은 좀 아프지만 덕분에 나도 조금 힘 보탰다는 자부심 같을 걸 얻을 수 있다.
내 인생 마지막 동계 올림픽?!
일정 때문에 올림픽 초반에 뉴욕으로 돌아오게 돼 너무 아쉽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경기를 저렴하고 편하게 직관할 좋은 기회를 놓치니 말이다. 션 화이트, 클로이 김 등 한 자리에서 보드 천재들의 세계 최고의 연기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다.
특히나 동계 스포츠는 10대들의 무대다. 미국에 첫 금메달을 안긴 레드먼드 제라드, 한국말도 유창하게 하는 클로이 김은 모두 2000년생 17살이다. 그들의 솔직하고 서글서글한 매력까지 더해져 미국에서 만나는 틴에이저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평창을 동경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에게 강원도는 화성만큼이나 너무 멀고 비싸다. 그래서 한국 어디에서건 두세 시간만 움직이면 직관할 수 있다는 말에 부러움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친구들에게 마구 권하고 있다. 인생 두 번 다시 없는 이번 기회를 위해 하루 이틀 투자해 보라고 말이다.
개인 페북에 사진과 함께 개막식 현장 포스팅을 했더니 다들 깜짝 놀란다. 인터넷에선 벌써 매진된 그 귀한 표를 어떻게 구했냐고, 암표냐고, 아는 사람이 있냐고 난리다. 방법은 단순하다. 평창 티켓 판매소에 가 현장 판매분을 문의했을 뿐이다.
굳이 강원도 경기장이 아니어도 된다. 서울시청 지하도 있고 강릉 시청에도 있다. 인천 공항을 비롯해 청량리역, 서울역에서도 구할 수 있다. 그렇게 구해서 꼭 한번이라도 이 역사적인 현장의 주인공이 되셨으면 좋겠다.
긴 설 연휴에 외국에 나가는 것보다 더 귀한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개막식밖에 못 보고 한국을 떠나 온 사람 입장에선 너무 부러운 기회들이 아직 여러분에겐 많이 남아 있다.
창을 녹여서 보습을 만드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 올림픽이 바로 우리 땅 '평창', 그 곳에서 열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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