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차명계좌 이대로 묻히나… 양심제보자·조준웅 특검 증언 확보
[미디어오늘 노지민 기자]
현재까지 확인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는 1400여개다. 약 5조원 규모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최근 27개 차명계좌, 30억원에 대한 과징금만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차명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하고 누락된 세금을 납부하겠다던 이건희 회장의 약속은 증발해버렸다. 수조 원대 차명계좌가 적발된 삼성은 어떻게 약속을 어기고도 건재할 수 있었던 걸까.
지난해 8월 제작거부로 중단됐던 KBS ‘추적60분’이 27주 만에 ‘삼성공화국’의 민낯을 고발한다. 오는 7일 밤 11시10분 방영될 ‘삼성공화국 2부작-1편, D-64 이건희 차명계좌 이대로 묻히나’ 편은 면죄부 논란 속에 이건희 비자금 수사를 마친 조준웅 특별검사를 만나 삼성 특검 이면을 추적한다. 조준웅 특검이 밝히지 못했던 추가 차명계좌를 둘러싼 의혹이 다시 조명되는 것이다.
추적60분은 지난해 5월 ‘한남동 수표의 비밀’ 편을 통해 삼성 총수 일가의 자택 공사에 사용된 수표가 이건희 차명계좌에서 나왔을 정황을 보도했다. 삼성 일가 집을 공사할 때 세탁을 거친 수표로 무자료 거래가 이뤄졌으며 이 수표들 출처가 감춰진 차명계좌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방송 이후 경찰은 문제의 계좌가 삼성 전·현직 임원 소유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260개 4000억원 규모의 추가 차명계좌를 발견했다.
당시 추가 차명계좌 발견으로 이어진 제보자의 증언도 공개된다. 재벌가의 인테리어 공사 비리를 폭로했던 양심 제보자는 지난해 추적60분 방송 이후 자신이 일했던 회사로부터 100억원대 소송을 당했다. 삼성과의 ‘부당 거래’를 무마하려 허위 자료를 내세웠던 업체가 일개 직원에게 횡령죄를 뒤집어씌웠다는 것이다. 추적60분 제작진과 만난 제보자는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 거냐”며 “내 통장에 검은 돈이 들어온 뒤 빠져나가고 다시 들어왔다”고 토로했다.
정범수 추적60분 PD는 “삼성이라는 막강한 힘이 없었다면 이 일이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겠느냐”며 “100억원대 소송을 감수하며 용기를 낸 양심 제보자가 아니었다면 진실이 밝혀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 PD는 “파업 현장에 있는 동안 재빨리 취재하고 이슈를 만드는 역할을 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도 했다. 142일 총파업 이후 첫 방송을 앞둔 정 PD를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만났다.
-오랜 파업을 끝내고 방송하게 된 소감은?
“파업을 해서 감회가 새롭다기보다 추적60분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파업 의미에 맞게 공정한 방송, 시청자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방송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지 근본적으로 고민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잘 다루지 못하고 관심을 갖지 못한 것들을 돌아봤다. 첫 편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부담감과 책임감을 상당히 느꼈다.”
-왜 첫 방송 주제로 이건희 차명계좌를 선택했나?
“지난해 5월31일 ‘한남동 수표의 비밀’을 방송한 뒤 처음으로 한진 조양호 회장이 개인 주택에 필요한 집기·인테리어 비용을 회사의 공사비용으로 얹어 결제한 혐의로 검찰에 소환됐다. 또 삼성 차명계좌가 드러나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슈가 됐다. 조준웅 특검이 2008년 4월17일 수사 결과를 내놓고 같은 해 삼성이 이에 대해 책임지겠다며 쇄신안을 내놨다. 그러나 그 뒤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었다. 그때 우리는 파업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만 봤다. 파업이 끝나면서 우리가 취재했던 내용이 얼마나 사실로 입증됐는지 확인해보자는 논의가 있었다.”
-양심 제보자 이야기가 담긴다고 들었다.
“지난해에는 제보자를 (방송에서) 숨기기로 결정하고 어떻게든 지켜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특정이 된 것 같다. 인테리어 회사에서 그분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아무런 자료가 없다는 점을 역이용해 제보자가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아 횡령했다며 100억원대 소송을 걸었다. 우리 사회에서 양심 제보를 하는 분들에게 가해지는 ‘2차 피해’를 다뤄야겠다는 생각에 첫 아이템으로 다루게 됐다.”
-어떤 점에 집중했나?
“금융실명제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다시 살펴봤다. 삼성의 차명거래 자체가 불법이고 처벌 받을 수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았는데 금융실명제법에 해석의 문제가 있었다. 국회 법제처가 비실명 자산에 대해 차등과세나 세금을 정확히 매겨야 한다는 해석을 내놨다는 성과는 있었다. 또 하나는 2008년 조준웅 특검 결과다. 2007년 말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이 막대한 비자금을 만들어 이를 차명으로 보유하며 부정한 곳에 쓰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후 조준웅 삼성 특검이 1197개 차명계좌를 밝혔지만 삼성가 선대 자산이라는 점을 인정해준 결과로 이어졌다. 차명 거래라는 구습을 타파하는 기회로 삼지 못하고 그것을 오히려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만든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당시 왜 이런 결과를 내놨는지 조준웅 특검을 만나 굉장히 오랜만에 입장을 들었다.”
-‘D-64’라고 명명한 이유는?
“사기 및 부정에 의한 차명 거래가 밝혀질 경우 차등 과세를 할 수 있고 과징금을 물릴 수도 있다는 것이 법제처 해석이다. 기산일을 조준웅 특검 결과 발표 시점으로 잡으면 과세 제척기간은 2018년 4월17일까지고, 실제로 벌금을 부과하는 날은 그다음달 11일이다. 차명계좌 1197건에 대해 놓치지 않고 세금을 제대로 받으려면 (과징금 부과 등의 조치를) 64일 안에 실행해야 한다.”
-‘삼성공화국 2부작’을 기획하게 된 의도는?
“이건희 차명계좌 관리와 관련된 사람만 해도 500명이 넘는다. 금액은 수조 원에 달한다. 그런데 과거 김용철이라는 내부 고발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두 비밀을 지키는 데 동조하거나 최소 묵인했다. 금융당국과 과세당국, 심지어 조준웅 특검, 사법당국도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 만약 100억원대 소송에 걸리면서까지 용기를 내준 양심 제보자가 아니었더라면 그것이 밝혀졌을까. 금융실명제법은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삼성처럼 이 문제에 직접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거대 권력이 없었다면 이 법은 이처럼 오랫동안 해석의 여지를 남길 문제가 아니었다. 삼성이라는 힘, 그에 따라 작동되는 나라를 ‘삼성공화국’으로 명명한 것이다.”
-앞으로 ‘추적60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지난 9년 동안 삼성이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많은 언론사와 프로그램이 감시를 하지 못한 결과다. 문제를 바로잡는 데 ‘탐사 보도’가 도구로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프로그램에서 한 마디 견해를 통해 쉽게 정의를 내리는 것이 쉬울 수 있지만 지금은 탐사 프로그램의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다. 트렌디(trendy)하게만 갈 수 없다. 사건에 경주마처럼 뛰어드는 대신 오랜 시간 관찰해 진실을 밝혀내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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