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출신으로 박정희 세딸을 낳고 스님으로 변신, 28년동안 숨어 살아온 문병옥 여인이 끝내 밝히지 못했던 "박대통령과 나와 우리의 세딸들"
"그분과의 관계를 감추기 위해 정신병자처럼 행세했던 한 많은 28년 세월이었습니다"
<내용증명...
제목: 문병옥 가족에 대한 기사화 중지 통보
귀하께서 본인 문병옥 가족에 대하여 기사화하려는 것은 본인은 물론 가족에 대해 명예훼손할 소지가 다분하므로 본인에게 직접 대담이나 취재도 하지 않고 Y기자 임의로 취재하여 기사화하지 못함을 통보함과 아울러 자녀의 아빠가 누구냐는 등 불필요한 질문과 불필요한 취재는 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만일 사실 무근한 취재를 하여 기사화한다면 민주국가에서 엄격한 사생활 침해임을 명심하시고 본인 자녀의 아빠가 공인이 아님을 분명히 통보하오며 Y기자께서 공인이라는 제보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증거자료와 함께 답신 바랍니다. 만약 터무니없는 기사로 인하여 성직자인 본인의 종교 사회생활 및 자녀들의 교욱 및 결혼문제 등 막대한 정신적 인격적인 명예 실추시엔 민형사상 모든 책임을 지시길 바랍니다.
1988.7
발신인 문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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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낳은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입니다"
영화배우로서 예명은 문일봉, 스님으로서의 법명은 영선, 본명 문병옥씨가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잡지사로 보낸 내용증명의 전문이다.
1962년 4월20일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최고의장을 만나면서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그의 딸을 세명 낳았다는 문여인의 고백은 놀라움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동대문 근처에 박대통령의 딸을 낳은 여인이 살고 있다;라는 소문의 주인공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문여인은 그 같은 고백을 하기까지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에 대한 취재를 하지 말아 달라'고 기자에게 보낸 위의 내용 증명도 그 같은 노력의 하나였다.
문여인은 그래도 자신의 신분에 대한 추적이 심해지자 정신병자 시늉을 내기도 했다. '나는 한때 정신병을 앓은 병역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고백한 것은 예전에 앓았던 정신병이 도져서 한 말이다.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하며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을 숨기려 하는 그녀의 노력은 첫딸이 태어날 때부터였다.
첫딸이 태어나자 문여인은 그 아이의 아버지 신분이 탄로나면 위해가 있을것 같아 집을 옮기고 숨었으나 끈질긴 청와대 경호실의 추적에 의해 살고 있는 집이 밝혀지기도 했다. 세딸을 모두 외국인 학교에 보낸 것도 철저히 신분을 감추려는 시도였다. 외국인 학교에서 문여인의 세딸 모두 호적에 오른 이름 대신 가명을 사용하면서 학교에 다닌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때문에 외국인학교에 같이 다닌 학생들은 문여인 달의 인상착의를 기억하면서도 이름을 대면 모른다고 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28년의 노력은 한계에 다다랐고 문여인의 과거는 공개되고 말았다. 문여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과거가 공개된 사실에 대해 당사자의 속마음은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제가 이제까지 그 사실을 감추고 살았던 것은 그분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이들을 낳은 사실도 모르셨습니다. 큰 애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어 딸들이 있다는 것을 아셨으니 아이들을 낳은 건 전적인 내 책임입니다. 그러니 그 사실이 밝혀지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었던 그분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승복을 입고 있는 몸이 구설수에 올라 종단에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 점도 엎드려 사죄를 드릴만한 일입니다."
1962년 4월20일 산업박람회 만찬식장에서의 첫 만남
(중략)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본격 영화배우의 길로 들어서나 그리 신통한 반응은 얻지 못한다. '얼굴은 최은희나 김지미보다 나은데 너무 몸이 굳는다'라는 말들을 감독들은 자주했다. "이상하게도 촬영만 시작되면 몸이 굳었습니다.외웠던 대사도 잊어버리기 일쑤였어요. 그러니 연기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지요."
부분 꿈을 안고 상경했으나 기대에 훨씬 못미친 배우활동이었다. 대신 연기가 필요없는 사진모델로서는 차츰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다. 62년 4월 그녀는 경복궁에서 당시 유행하던 개량한복인 아리랑드레스를 입고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 경복궁은 곧 벌어질 '5.16혁명 제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의 개막식 준비로 관계자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고 한다.
촬영을 마칠 즈음 낯선 남자가 찾아와서 '며칠 뒤에 행사가 있는데 옷이 너무 예뻐 빌리고 싶으니 괜찮으면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아무런 의혹없이 연락처를 가르쳐주었더니 며칠이 지나자 연락이 왔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드레스를 빌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문여인에게 중요한 인사들이 참여하는 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의 설득에 마지 못해 참석해서야 최고 권력자 박정희씨가 왔다는 것을 문여인은 알 수 있었다. 박람회 기념식은 오전에 열렸고 오후에 열린 기념 만찬에 그녀가 초대된 것이다. 그해 가을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경찰의 날' 기념식에도 그녀는 초대되어 참석했다.
"그후에도 몇번 연락이 왔었는데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하들이 술수를 썼습니다."
어느 영화감독 동생으로부터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영화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그를 만났으나 그가 안내된 곳은 어느 가정집이었다. 이른바 안전가옥인 셈이엇다. 그곳, 양옥집 2층에서 그녀는 박정희 의장과 관계를 맺는다.
사실을 숨기기 위해 위장결혼식을 치르기도
안가에서 첫 만남 이후 문여인은 박정희씨를 수차례 만나면서도 영화에 출연했다. 예명 문일봉으로서 그녀가 마지막 출연한 영화는 '사위소동'. 김희갑,구봉서 등이 공연한 영화이다. 임신한 사실을 안 이후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녀는 믿기지 않을 만큼 특이한 체질이었다. 임신 7개월만에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나는 배가 부르지 않아요. 오죽하면 임신 7~8개월이 되어도 감독들이 함께 작업하자고 그러겠어요. 제가 워낙 양이 적엇어요. 잘 모르면서 7개월씩이나 간 거죠. 63년 여름 양수가 좀 나와서 산부인과에 갔더니, 임신이라고 했어요."
그녀는 첫딸을 63년 7월4일 낳았다. 65년,71년에 태어난 둘재, 셋재도 임신 사실을 임신 6개월이 돼서야 알았다고 한다. 문여인은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점과 아기의 아빠가 범상한 사람이 아니기에 출산 당일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필동에 살았던 문여인은 바로 장충동으로 이사하여 자신의 존재를 일절 외부에 알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의외의 인연으로 문여인은 다시 박종규 실장을 만나게 된다.
"어떻게 알았는지 박종규씨의 친구이자 부하인 C씨가 나를 찾아왔어요. 어렵게 집을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는 구분과 저의 사이에서 채홍사 노릇을 했다고 알려져 육여사가 해직을 시켰나봐요. 나에게 자신의 구명을 부탁하러 온 것이지요. 그대 그 사람이 아기를 보았어요.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그에게 부탁을 했지요."
그리고 그녀는 C씨의 구명을 위해 박종규씨를 찾아갔다. C씨가 말했는지 박종규씨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씨는 '아기는 우리가 맡아 잘 기를테니 넘겨달라'고 제안했다. 문여인의 반대가 워낙 심했다. 문여인은 '이 아이는 그분의 아이가 아니다'라고 우겨대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자 박씨는 '남의 집에 살지 말고 좀더 좋은곳으로 이사하라'고 강권했다. 그래서 옮긴 집이 한남동의 유엔빌리지.
1백평이 넘는 그 집에서 문여인은 가정부,유모,운전기사,보일러기사의 시중을 받으며 보냈다.
이 당시 소아과의원을 개업했던 P씨는 문여인이 첫딸이 아파 찾아왔을 때 지프차를 타고 경호원이 둘씩이나 대동되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호강이었으나 문여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가정부, 운전기사들이 모두 감시자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항상 그런 신경을 쓰고 살아야 하니 소화불량이 걸리기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 속에 독이 들어 있지 않을가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문여인은 박종규씨에게 부탁하여 유연빌리지를 나와 옛 철도청 관사였던 순화동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도 문여인은 박대통령의 부름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면서 65년과 71년에 두 딸을 더 낳았다. 세번재 임신중이었을때 그녀는 첫 결혼식을 치른다. 처녀가 아이를 셋씩이나 낳았고 또 그 아이가 고위층의 핏줄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갈까봐 문여인은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위장 결혼식.
"셋째를 낳은 직후에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나를 누님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는 남자가 있었어요. 꽤나 똑똑하고 미남이었죠. 나이는 저보다 두살이 아래고, 유뷰남인데 이혼했으니 저와 결혼하겠다는 겁니다. 뒷조사를 해보니 공직에서 쫓겨날 처지에 있었어요. 그를 설득했죠. 내가 면사포를 쓸 기회를 만들어 주면 당신의 자리는 내가 보장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문여인은 그 결혼식을 자신의 비밀유지에 이용했다. 영화계에 '일봉이가 결혼했다'는 소문도 나게 만들엇다. 그 해프닝으로 문여인과 박대통령과의 관계를 알던 사람들도 '첫째는 박대통령의 아이일수 있으나 나머지 두명은 다른 남자의 아이다' 라는 말을 했었다.
박대통령은 보통 점퍼 차림으로 문여인을 만나
문여인은 박대통령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으나 큰 애가 중학교를 졸업할 대는 절박한 문제가 발생하여 알라지 않을 수 없엇다고 한다.
" 그 당시 국회의원이엇던 신도환씨가 국적있는 교육을 이야기하면서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한국학생들은 한국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큰애를 이곳 한국에서가 아니고 유학을 보내 공부를 시키려 했는데, 한국학교로 전학을 하면 유학을 가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문여인은 세딸의 사진을 동봉한 편지를 청와대로 보냈다. 1차 수신인은 박종규 경호실장이었다.
이처럼 문여인은 박대통령에게 급하게 부탁할 일이 잇는 경우 등 약 10차레 편지를 보냈다. 박대통령으로부터 3통의 답신을 받았다고 한다.
"그분께서는 큰애는 외교관이 되도록 교육을 시키고, 작은애는 의사로 키웠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막내는 어린 탓인지 언급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문여인이 워낙 미모이기도 하지만 박대통령은 문여인의 발랄함과 당돌한 언행을 좋아했던 것 같다. 박대통령을 만나는 초반, 그녀는 화장도 안하고 바지차람에 운동화를 신고 박대통령을 만났었다고 한다. 만남이 잦아지면서는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당돌할 정도로 했다고. 그대 박대통령은 별 거부감없이 그녀의 말을 들엇다고 한다.
"연락이 와서 그 분을 만나러가면 그분은 언제나 먼저 와 있었어요. 주로 토요일이었는데, 유엔빌리지 부근의 안가였습니다. 정장 차림은 드물고 잠바를 입고 계실 때는 어떤 편안한 모임이 끝난 뒤로 여겨졌어요."
같이 있었을 때, 박대통령은 TV뉴스 프로그램은 빼놓지 않고 꼭 시청했다고 한다. 뉴스를 보면서는 언론에 대한 깊은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박대통령이 사망한 궁정동 안가에서도 그녀는 박대통령을 만났다.
"그곳은 딱 한번가보았습니다. 궁정동 안가는 욕조가 바닥 밑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10.26 이 난 후 신문에 난 사진을 보니가 내가 한번 갔던 그곳이었어요."
10.26 박대통령 살해사건을 겪은 그녀의 마음은 어느 여자가 지아비를 잃은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지만 이제와서 박대통령이 그렇게 사망한 것을 보면 차라리 잘 되었다고 문여인은 생각하고 있다.
"정상적인 퇴임을 하고 시골에 내려가 있었으면 그분 성격으로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난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돌아가신 게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딸들에게 아버지가 누군지 비밀로 붙여오고 살던 문여인은 참으로 묘한 인연으로 큰딸에게 "네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이다"라고 털어놓게 된다.
(중략)
출처 - 우먼센스 (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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