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더스 돌풍의 최대지지층이 청춘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그래서 투표하지 않았던 청춘들을 열광시킬 공약들을 제시했고, 44년을 한결같았던 그의 진정성에 청춘들이 민주당 예비경선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은퇴자들을 위한 복지는 대단히 발달한 미국에서 (인종을 통틀어) 청춘을 위한 복지는 매우 빈약합니다. 미국에서 진정한 경제적 약자들은 청춘(+여성+인종)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이 나옵니다. 샌더스 돌풍은, 앞세대가 남긴 욕망과 탐욕의 폐해 때문에 가난과 위험, 차별 등에 시달리는 청춘들에게 '정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면 현실정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건국 때의 미국 민주주의에 비하면 현재의 미국 민주주의는 아이비리그 출신의 지배엘리트가 독식하는 사실상의 금권·과두정치로 전락했습니다.
최근에는 세습자본주의까지 뚜렷하게 드러나는 등 미국은 적극적 자유가 작동하지 않는 허울 뿐인 민주주의국가로 전락했습니다. 미국의 이상을 모조리 부정하는 트럼프(제2의 맥카시)가 예비경선에서 독주하는 것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말해줍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자들은 맥카시처럼 파시즘을 휘둘러서라도 이민자를 몰아내고, 인종차별이 강화되더라도 지금보다 잘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흐름에 샌더스는 정면으로 맞섰고, 지나칠 정도로 과대포장된 주류경제학자들이 샌더스의 공약들을 그들의 오류로 가득한 모델을 처넣어 실현불가능성 없다고 비난하지만, 청춘들에게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주겠다는 공약과 비전을 내세워 청춘(과 고학력자, 이주민들)의 정치혁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친새누리 매체들이 자막으로 처리했지만, 슈퍼화요일에서 선전했던 샌더스가 오늘의 경선(메인주)에서 힐러리를 누를 수 있었던 것도 청춘의 힘입니다.
마찬가지로 미국보다 더 미국스러운 한국에서 진보적 정치혁명에 성공하려면 청춘들에게 신명나는 약속들과 비전들이 제시돼야 합니다. 국정원의 집요한 압박 속에서도 이재명 시장이 하나하나 실현하고 있는 것들, 박원순 시장이 뒤를 이어 실현하고 있는 청년배당을 비롯해 각종 복지확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반값등록금이 아닌 무상교육을, 서민증세가 아닌 부자증세를,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을, 의무급식과 의무보육을 약속하면 청춘들이 돌아옵니다.
기본소득제 도입을 위한 진지한 토론과 다양한 형태의 실험을 거쳐, 그 결과에 따른 정치사회적 의제로의 승격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복지 혜택을 주면 곧바로 표로 연결되는 노인복지만 늘리지 말고, 진정한 사회경제적 약자인 청춘을 위한 복지를 늘리고, 장기적인 비전도 제시해야 합니다. 인류의 문명발전사는 후세대가 앞세대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살고,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산산조각난 지금, 청춘에게 모든 짊을 지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준하는 최악의 반인륜적 범죄입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정확히는 2008년 이후의 10년)'을 똑같이 따라가고 있는 대한민국이 최악의 경제대불황에서 벗어나 다시 웃음과 소통, 배려와 공존이 넘치는 나라가 되려면 청춘이 미래를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세대가 자신의 앞세대가 남겨준 것들로 더 많은 문명의 혜택를 누렸다면,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최초의 세대인 청춘이 포기할 것들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지 않도록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줘야 합니다.
청춘이 'N'이라는 절망의 카트에 담아야 할 것들로 '포기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N'이라는 희망의 카트에 담아야 할 것들로 '성취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도록 신명나는 정치판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최소한이 의미있는 수준의 청년배당입니다. 부와 권력의 불평등과 차별을 극한까지 끌고가는 '승자독식의 고용없는 성장'의 반대편에는 '착한 성장과 공존의 풍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청년배당, 즉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세운 진보정당에 한 표를 행사할 생각입니다. 그럴 때만이 대한민국은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청춘이 미래를 꿈꾸고 얘기할 수 있는 신명나는 정치혁명이 가능합니다. 샌더스처럼, 이재명처럼, 박원순처럼, 청춘이 능력과 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무대만 마련해주면 그 다음의 정치혁명은 그들이 알아서 합니다.
굴욕적인 위안부협상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엄동설한 속에서도 소녀상을 지켰던 청춘들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길거리에 나섰던 청춘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엇보다도 250명의 단원고 학생들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아직도 9명의 실종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해서 옷과 가방, 팔목과 스마트폰에 노란 리본을 달고다니며 세월호의 조속한 인양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촉구해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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