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선후보 공약집 중 일부. | |
ⓒ 새누리당 |
박근혜 대통령 집권 3년, '창조경제'에 쏟아부은 예산이 22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경제민주화와 복지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문화예술 분야의 '공약 기억상실증' 증세는 심각한 수준이다.
의례적 수준인 '문화예술진흥법 및 공연법' 개정은 논외로 치자. 대선 핵심 공약이었던 '문화예술창작 지원 및 문화 콘텐츠 공정거래 환경 조성' 관련 공약은 비웃지 않고서야 버틸 재간이 없다. 특히나 '5대 글로벌 킬러콘텐츠(게임·음악·캐릭터·영화·뮤지컬) 집중 육성'이나 '독립·예술·다양성영화 제작지원 및 전용관 확대'라는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당시 박근혜 캠프가 자신들이 무슨 공약을 내걸고 있는 것인지 알고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문화 융성을 국정의 4대 정책기조로 꼽은 이 정부 들어 변화를 맞이한 부분이 있다고 우긴다면, 그래도 몇 가지 눈에 띄는 '활약'을 꼽아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게 공약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전시행정일 뿐이거나 오히려 역행하는 방향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문화융성을 내건 정부의 3년간 문화 분야 활약상
▲ 지난 2월 25일 열린 2016 부산국제영화제(BIFF) 정기총회 사진. 서병수 부산시장과 이용관 BIFF 집행위원장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 |
ⓒ 정민규 |
먼저, '문화가 있는 날'. 문화체육관광부는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지정, '영화·스포츠·공연 및 박물관·미술관·고궁 등 주요 문화시설 무료 또는 할인'을 해주는 제도를 운영 중이다. 그러나 할인만 있지 지원은 없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공연의 경우, 안 그래도 빈곤한 창작자들이나 민간에 부담을 가중시킨 꼴이다.
시립이나 국립으로 운영되는 전시관이나 고궁의 경우, 세금으로 보전하는 혜택 아닌 혜택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지금도 관련 공공단체와 민간단체들이 홍보 전선에 나서고 있지만, 딱히 수용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시행한지 벌써 만으로 2년을 꼬박 채웠음에도 그 수준이다. 보통 전형적인 전시행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두 번째로, 끊이지 않는 정치검열 논란이다. 설정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현 정권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심사 과정에서 논란이 일었던 박근형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연극 <개구리>를 둘러싼 파열이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서 정치적인 압박을 이유로 전시를 철회한 <세월오월>의 홍성담 작가 등 정치검열의 예는 차고 넘친다.
세 번째로, 낙하산 인사 논란이다. 공금 유용 등 갖가지 의혹으로 사임한 방석호 전 아리랑TV 사장은 빙산의 일각이다. 친박 인사로 분류됐던 고학찬 예술의 전당 사장 임명은 '낙하산 1호'라는 불명예와 함께 인사 논란의 신호탄이었다.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취임 후 영화, 오페라, 미술, 연극 등 문체부 산하 기관장 인사가 있을 때마다 밀실 인사, 코드 인사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대미는 부산국제영화제 사태다. 지난 2014년 19회 영화제 당시 <다이빙벨> 상영으로 촉발된 부산국제영화제와 서병수 시장 이하 부산시와의 갈등은 20회 영화제의 성공적인 개최와 함께 봉합되는 듯 보였으나, 최근 21회 영화제의 성사 여부까지 우려스러울 만큼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논란의 한복판에 서병수 부산시장이 자리하고 있지만, 보다 윗선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청와대에서 하는 거예요. 그 직원들이 저한테 다 이야기했어요. 저는 그 사람들이 불쌍해요. 공무원들. 문화예술 공무원들."
'수첩공주'를 대통령으로, '시험 컨닝'을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빗댄 연극 <개구리>를 연출한 박근형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립극단이 기획했으나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심사에서 논란이 일자 공무원들이 자신을 직접 찾아왔다는 것이다. 비단 박 교수 사건에서만 그랬을까? 굳이 서병수 시장 혼자 그토록 국내외 영화인과 관객들, 그리고 언론의 비판을 받으며 십자가를 지고 고군분투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어른거리는 박심(朴心)
▲ 부산 지역에 나돌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관련 전단지. | |
ⓒ 페이스북 갈무리 |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시민 모두의 재산입니다."
최근 부산지역에 나돌고 있는 정체 모를 컬러 '찌라시'의 제목이다. 요는, 일부 영화인들이 의사결정 구조를 비롯해 영화제를 파행으로 운영하고 있고, 이를 위해 "시민, 양식있는 영화인,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영화팬들이 (영화제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동안 서병수 시장이 해왔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부산시와 서병수 시장은 언론 플레이, 여론전, 민간단체, 시의회를 통한 압박 등 쓸 수 있는 카드는 죄다 동원하고 있다. 지난 2일 급작스레 기자회견을 연 서병수 부산시장은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좌지우지한다"며 언론플레이를 펼쳤다. 지난달 25일 자신이 자리를 뜨면서 결국 파행으로 끝난 부산국제영화제 정기총회의 책임을 자문위원 등 일부 영화인에게 돌린 것이다. 이에 맞춰 일부 지역 언론들도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에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또 지난 7일 (사)부산영화영상산업협회, (사)부산정보기술협회, (사)부산영상포럼 등 총 20개 민간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자문위원 68명 신규 위촉"과 관련해 부산시의 편을 들고 나섰다. 이 단체들 중에는 실제 활동이 미비한 이름뿐인 단체도 다수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일엔 새누리당 소속 부산시의회 경제문화위원회 강성태 의원이 시정질문을 통해 "집행위원장이 부산시와 사전 논의 없이 신규 자문위원 68명을 대거 위촉한 것은 권한을 남용한 것으로 원천 무효"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 8일 서병수 시장을 비롯해 당연직 조직위원들이 주도한 임원 회의에서는 신규 자문위원 해촉과 임시 총회 연기, 다양한 의견 수렴을 위한 라운드 테이블 구성 등을 골자로 한 결의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측은 이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나섰다. 9일 강수연 집행위원장을 대표자로 한 입장 표명을 통해 영화제 측은 "자문 위원 위촉은 정관에 따라 집행위원장의 권한과 책임 아래 이루어졌으며 해촉할 정관이나 법률 상 근거가 사실상 없다"며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또 새로운 정관을 통해 "당연직 임원회 구성도 바꿔서 영화제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서병수 시장과 부산시 관련 임원들의 퇴진을 간접적으로 요구했다. 라운드테이블 역시 불특정 다수가 정관 개정에 관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 의사를 확실히 했다.
이렇게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전면전에 나선 부산시에 대항해 영화제 측이 결사항전에 임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제 그만 하시라
▲ 7일 오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박근혜 대통령 | |
ⓒ 청와대 |
지난 7일(현지시간)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2회 창조산업 포럼에서 존 위팅데일 영국 문화미디어체육부 장관과 함께 문화창조산업 분야에서 민관 협력을 다질 것을 결의했다. 또 2017년 2월부터 1년 간 '한·영 상호교류의 해'(가칭)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분란만 일으켰던 문화체육관광부가 영국에 콘텐츠 기업 육성기관인 '문화창조벤처단지'를 조성한다니. 그 이름이 하도 거창하고 '창조경제'스러워 더 웃기지만, 세계 문화예술계가 주목하고 있는 자국의 국제영화제 사태는 방관한 채 해외로, 유럽으로 달려나간 김종덕 장관이 한심하다 못해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2014년 12월 부산이 아시아 최초로 '유네스코 영화 창의 도시'로 지정됐던 사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20여년 간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영화제이자 국내 영화산업 육성은 물론 해외 영화계와의 교류 창으로 발돋움한 부산국제영화제의 후광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성과다. 지금 정권 차원에서 치졸하고 조직적이며 집요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는 그런 자리다.
청와대는 부산시와 서병수 시장의 행위가 '박심(朴心)'이라는 시선이 억울한가? '정권 차원의 흔들기'라는 서술이 오해인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세계 유수 영화제와 영화인들, 그리고 국내 영화인들이 한 목소리로 중단을 요구하는 '부산국제영화제 죽이기'를 거둬야 한다는 말이다.
시대착오적인 '정치검열'에 대한 논란을 잠재울 수 기회다. 서병수 시장 이하 공무원들의 과잉충성이라 핑계를 대면 될 일이다. 그리도 불쾌해했던 <다이빙벨>이란 영화의 파급력도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정관 개정 등 부산국제영화제 측과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영화제와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 줄 때다. 한마디로 하던 대로 하게 놔두면 된다.
반어로 듣든, 고언으로 듣든 상관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박 대통령이 그리도 중시하는 '역사'과 '국정교과서'에 이렇게 기록될지 모를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 재임 당시 문화예술분야의 최대 치적 - 세계적으로 사랑받던 부산국제영화제를 망쳐 놓다"라고.
청와대 전화로 서병수 시장과 통화 한 번 하시라. "이제 그만 해도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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