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에 공직선거법 적용 갈등
수사지휘권 발동 대비 퇴임사 써놔
원칙 어겼으면 국정 농단 공범 될 뻔
항명 파동 윤석열은 진짜 칼잡이
좌선·그림·걷기에 미친 듯 올인
미국서 '더스틴 채'로 화가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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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동욱 전 검찰총장, 국정원 댓글 수사 비화 첫 토로 박근혜가 ‘비운의 대통령’이라면 채동욱은 ‘비운의 검찰총장’이다.
박근혜 정부 초대 검찰총장에 발탁됐으나 박 대통령 당선의 정통성에 흠집을 낸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 지휘를 하다가 정권의 눈 밖에 났다. 이후 세상을 뒤흔든 혼외자 사건이 터지면서 취임 5개월여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당시 국정원 수사와 혼외자 사건 간 연관성은 있는 걸까. 청와대와 법무부·대검에선 어떤 갈등이 있었던 걸까. 세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던 3년8개월간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의 변호사 사무실로 인터뷰하러 가는 도중 갖가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사무실엔 ‘더스틴 채(Dustin Chae)’라는 가명으로 국제미술전람회에 출품했던 ‘생명의 나무’ 연작 중 팔려나간 여름·겨울 편을 제외하고 봄·가을 편이 걸려 있었다. 막상 얼굴을 마주한 채 전 총장은 격동의 시간은 까맣게 잊은 듯 편안해 보였다. 검찰 개혁에 대한 소신을 밝힐 때는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3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댓글 사건에 개입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구속까지는 안 한다 해도 흑(黑)을 백(白)이라 할 수는 없었다”고 토로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해선 “사필귀정”이라고 답했다.
Q : 최근 대한변호사협회의 개업신고 승인으로 퇴임 3년여 만에 변호사로 개업해 일하고 있다. 감회가 남다르겠다.
A : “2013년 9월 초 혼외자 보도가 있었고 일주일 뒤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감찰 조사를 지시해 사표를 제출했다. 그달 30일 퇴임식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다. 그 뒤로 참 힘든 세월을 보냈다. 제일 힘들었던 건 일신상의 사유로 그만둔 후 검찰 조직이 권력에 장악돼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 후배들에게 미안하고 국민에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만감이 교차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제가 권력자의 입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불법 사찰까지 하면서 일을 꼭 그렇게 난폭하게 처리했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Q :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가 사퇴 원인 중 하나라고 보나.
A : “그 사건의 가장 큰 쟁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지 여부였다. BH(청와대)나 법무부 장관 쪽에서 적용에 굉장히 난색을 표명했다. 두 사람의 구속 문제를 놓고도 물밑에서 갈등이 있었다. 그런 흐름이 있었지만 총장 재직 중 일이라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건 적절치 않다. 다만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과 대검에서 난상토론과 회의를 거듭한 결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최종 결론을 내리고 둘을 구속하겠다며 법무부에 보고했다. 국가정보기관이 대선에 개입했다는 것은 가장 중한 국기 문란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역시 권력에 부딪혔고, 일촉즉발의 상황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사팀 검사 한 명이 사표를 내 내가 직접 설득해 반려하기도 했다.”
Q : 총장 입장에서 곤혹스러웠겠다.
A : “내 입장에서는 (그 문제를) 소리 안 나게 처리해야 했다. 큰 원칙에 어긋나서도 안 되지만 정무적인 판단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원칙은 법과 원칙은 지켜야 하고 흑백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고육지책으로 공선법 위반 혐의는 적용하되 총장 직권으로 원 전 원장 등을 불구속 기소하겠다는 안을 냈다. 수사팀이 받아들여 법무부에 보고했는데 일주일(5월 하순~6월 초) 이상 답이 없었다. 그때 신병 처리 문제보다 공선법 위반을 아프게 생각하는구나 싶었다. 긴장되고 긴박한 분위기였다.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에 대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는 상황을 예상하고 대검 참모들과 대안을 숙의했다. 그 당시 이미 퇴임사까지 써놓고 대기했다. 공소시효 만료일(6월 18일)이 얼마 안 남은 상태에서 보고대로 처리하라는 지휘가 내려와 일사천리로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재판에 넘겼다.”
Q : 그럼 해피엔딩이 된 건가.
A : “아니다. 그 뒤부터 청와대 쪽, 법무부 장관 쪽과 상당히 관계가 불편해졌다. 그런 기운이 감지됐다. 그러다가 8월 초 박근혜 대통령이 휴가를 다녀와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김기춘, 민정수석을 홍경식으로 바꾸는 인선을 했다. 깜짝 놀랐다. 좀 이상했다. 그 며칠 뒤부터 검찰청 앞으로 극우단체 회원 수십 명이 몰려온다. 플래카드를 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형 확성기로 음악을 틀어대고 ‘종북좌파 총장 물러가라’고 소리친다. 기소한 지 50여 일이나 지난 다음에 갑자기 왜 저러지 싶었다. 그러다 9월 초 혼외자식 보도 건이 터지고 희한하게도 바로 극우단체가 사라졌다. 그래서 최초 대응 때 ‘절차와 저의가 의심스러워 상황 파악 중에 있다’는 워딩이 나간 것이다.”
Q : 검찰총장 취임 직후 특수부와 공안부 검사들로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을 구성하고 대대적 수사에 나선 배경이 있나.
A : “내가 총장에 내정되고 가장 먼저 보고받고 신경을 많이 쓴 사안이 당시 경찰이 수사하던 이 댓글 사건이었다. 그 즈음 곽상도 민정수석(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전화통화에서 ‘원세훈 사건을 원칙대로 처리해 달라십니다’고 전했다. 그 말을 듣고 ‘이게 무슨 말이지?’ 했다. 좀 뜬금없어서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누구 워딩이야?’라고 물었더니 ‘대통령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고 하네. 직감적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관여가 안 됐구나, 몰랐구나…. 청문회에서 취할 스탠스가 정해지니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고 공정하게 수사하겠다는 태도에서 한 걸음 더 나가 검찰 내에 태스크포스팀을 설치해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하겠다고 세게 간 거다.”
Q : 이상한 낌새를 챈 건 언제인가.
A : “5월께에 국정원 압수수색을 나갔는데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이 완강히 거부해 불발에 그쳤다. 그때부터 이상했다. 법무부의 승인을 받고 법원에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갔는데 그동안 아무 제지가 없다가 막상 압수수색을 거부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당시 청와대 쪽에 국정원이 압수수색을 받아들이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안 됐다. 왜 처음에 ‘법과 원칙대로 하라’고 했을까? 아직도 그 이유가 궁금하다.”
Q : 댓글 사건의 교훈은.
A : “당시 수사 지휘 때 내가 마음먹은 건 흑백을 있는 그대로 밝혀 흑은 흑대로 백은 백대로, 원칙대로 처리하겠다는 딱 그거였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게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대통령 당선 자체가 부정되는 최악의 정치적 상황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총장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그 문제에 관련이 없다면 정확하게 진상을 규명토록 하고 차후에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국정원이든 경찰이든 개혁하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봤다. 그런데 청와대는 거꾸로 갔다. 결과적으로 나를 찍어내고 윤석열 수사팀장(현 서울중앙지검장)을 찍어냈다. 그때 박 대통령과 참모들이 정도로 갔다면 국정이 안정되고 검찰은 검찰대로 권력자들의 부정을 감시하고, 경찰·국정원도 갈 길을 제대로 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라가 국정 농단 사태에 이르지도 않았고 박 대통령에게도 이런 불행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이 아쉽다.”
Q : 그때 수사를 거꾸로 대충 했다면 어땠을까.
A : “반면교사를 해보면, 그 당시는 편했을 것이다. 검찰총장 자리에서 안 쫓겨났을 것이고 불법 사찰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얼마나 후회를 할 것인가. 그때 거꾸로 갔다면 지금 고개를 들고 다닐 수나 있겠나. 경우에 따라서는 국정 농단의 공범으로 전락해 스스로 수사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상상하면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두 달 전 윤석열과 소주 한잔하는데 내가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 시켜서 4년이나 검찰에서 물먹고 인간관계 끊어져 마음고생 하고…미안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윤 검사가 ‘나는 그런 생각 안 한다. 그때 총장이 (수사 외압에) 버텨 주다가 쫓겨나는 바람에 오히려 수사 검사들이 강해질 수 있었다.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해 울컥하고 짠했다.”
Q : 원세훈 전 원장에 대한 법원 판결이 들쭉날쭉했다. 정권이 교체됐으니 달라질까.
A : “사법부도 이번에는 제대로 갈 것이다. 이 또한 자연의 흐름이고 사필귀정이다. 몇 십 년 전 잘못도 다 밝혀진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다. 그런데 그 역사의 시계가 이전에 비해 점점 빨라지고 있다. IT(정보기술) 발전에 따라 정보 전달의 속도가 빨라지고 SNS에서 정보가 실시간 소통되면서 이젠 무엇을 감추려고 해도 안 된다. 술수가 안 통하는 시대가 왔다.”
Q : 박 대통령과 인연은
A : “개인적으로 본 적도 없고 전화 통화한 적도 없다. 검찰총장 임명장 받으러 부부 동반으로 청와대 갔을 때 다른 장관 임명자들과 함께 50분가량 차 마시며 환담한 것 말고는 없다. 지난 촛불, 탄핵 정국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다.”
Q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끼친 폐해는 뭔가.
A : “가장 큰 잘못은 법과 원칙을 권력으로 유린해 힘없는 국민을 눈물 흘리게 했다는 것이다. 권력자와 주변 세력이 법과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마치 질병처럼 사회 전체가 서서히 병들어 간다. 권력자가 정의롭지 않으면 고통받는 사람은 권력 없고 돈 없는 국민이다. 두 사람은 합당한 법적·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지 않겠나.”
Q : 검찰 개혁은 대세다. 전직 총장으로서 견해는.
A : “크게 보면 인사 혁파와 제도 개혁 두 가지다. 인적 쇄신을 통해 조직 분위기를 일신할 때 중요한 건 옥석을 가릴 명확한 기준을 설정해 공개하고 예외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누구는 친하다고 봐주고, 누구는 선(線) 있다고 봐주면 그 인사는 반드시 실패한다. 제도 개혁의 측면에서 볼 때 문재인 대통령의 대표적 공약은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이다. 이건 해방 이후 70년가량 이어져 온 수사 체제 변혁의 문제다. 현재 우리가 기대하는 순기능보다도 더 큰 폐해와 부작용이 예상된다. 검찰을 편들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검찰이 잘못하고 힘이 너무 세다고 해서 검찰의 수사 기능을 빼서 공수처나 경찰에 준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싶다.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 경찰 비대화 문제의 해결과 통제 방안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간 국가기관 간의 수사 권력 재배치에 불과할 수 있다. 풍선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검찰 개혁의 본질은 정권이나 힘 있는 자들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Q : 부작용을 줄일 복안이 있나.
A : “국정원·검찰·경찰의 수사권을 재조정할 바에는 국가 수사 체제를 전면 재편하는 것도 방법이다. 미국의 연방수사국(FBI) 같은 국가수사청(가칭)이라는 큰 지붕을 만들고 산하에 특별수사국·보안수사국·경제수사국 등을 신설하자는 취지다. 여러 기관에 분산돼 있는 전문 수사 인력과 예산, 장비 등을 재배치하면 비용도 적게 든다. 기관 간 영역 다툼도 사라진다. 조직 비대화에 대비해 통제 장치를 둬야 한다. 위원회 제도를 활용하면 중립성 확보가 가능하다.”
Q : 검찰과 경찰의 역할 재정비는.
A : “검찰엔 검찰 본연의 지위와 기능을 돌려줘야 한다. 직접 수사하는 기능 대신 수사 지휘권, 영장 청구권 등을 보장해 준사법적 통제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즉 형사사법 정의의 실현 기관, 인권 옹호 기관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무소불위 권한의 분산이라는 검찰 개혁의 목적은 100% 달성된다. 검찰과 국가수사청 간 견제와 균형이 자리 잡힌다. 경찰은 치안 유지가 본연의 기능이다. 따라서 치안 범죄 수사는 경찰이 맡는 게 당연하다.”
Q : 총장 퇴임 후 어떻게 지냈나.
A : “막상 나오니까 오갈 데가 없었다. 후배들이나 지인들을 만나면 혹시라도 그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지방으로 잠적해 산속에서 주로 지냈다. 처음엔 인간적 상처가 깊었다. 황교안·김기춘 등 내가 다 아는 분들이 일을 이렇게 처리하나 원망스러웠다. 신문을 안 보고 속세 일을 다 잊어버리려 했다. 국정감사 때 윤석열 수사팀장이 항명 사건을 일으켜 징계받고 좌천됐다는 소식도 며칠 뒤에야 알았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2014년 6월 전주 모악산에 내려가 40만원짜리 월세방에서 지냈다. 전주지검장 근무 때 인연을 맺은 유휴열 화백에게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그리라고 해서 시작했다. 내가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절하고 그림이다. 김제에 ‘귀신사(歸信寺)’라는 고려시대 고찰이 있다. 그 절을 매일 가서 백팔배 하고 좌선하고 돌아와서는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하루에 17시간 정도씩 미친 듯이 그렸다. 그릴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그렇게 1년 동안 그린 유화가 80여 점이다.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50여 점을 더 그렸다. 그때 지인 넷이 한 달에 두 번, 1박2일 또는 2박3일 일정으로 해안길 따라 걷기를 시작했다. 강화도~ 서해안~ 남해안~ 동해안~ 고성을 4년에 걸쳐 일주하기로 계획을 세웠고 전남 강진·보성까지 걸었다. 배낭 하나 메고 하루에 25~27㎞씩 걷고 또 걷는다. 즐겁기도 하고 그림의 소재도 얻는다. 국토에 대한 애착도 생겼다. 우리나라 구석구석 아름다운 데가 정말 많다. 농어촌의 따스한 인심도 느낄 수 있었다.”
Q : 좌선 때 화두가 있나.
A : “금강경 종장 4구계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꿈·환상·물거품·그림자·이슬·번개처럼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것이 현상계라는 의미다.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현상이 무(無)와 무상(無常)이라는 것이다. 그걸 30분가량 화두로 두면 마음이 비워진다. 공(空)이란 것을 느끼고 알게 되고 만사에 감사하게 되고, 미움과 집착이 없어진다. 지금 아무 미련·원망·아쉬움·집착도 없다. 지난 세월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Q : 법무법인 서평은 어떻게 운영할 건가.
A : “절친 이재순 변호사 등과 일단 개업했고 조만간 5~6명의 변호사가 합류할 것이다. 실력파 후배들과 함께 정교한 변호를 하는 법인으로 인정받으면서 공익적 차원의 무료변론도 병행할 계획이다. 개인적인 소망은 로스쿨·대학이나 기업 같은 데 강연을 다니고 싶다. 주로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소위 갑을관계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나 인지·기획 등 특수수사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 억울함이 덜한 세상을 만드는 데 약간의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 말미에 망설이다가 혼외자 건의 진전 상황이 있는지 묻고 말았다. 지극히 사적인 문제라 질문 자체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 잘 정리되고 있다. 언젠가 책으로든, 말로든 소상히 밝힐 날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동욱(58·사법연수원 14기)은 … 「 1995년 12·12 사건과 5·18 사건의 수사에 참여해 검찰 논고문을 작성했다. 2003년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검사로 일하며 굿모닝시티 분양 비리 사건을 수사, 당시 정대철 민주당 대표를 구속했다. 2006년 대검찰청 수사기획관 시절엔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을 수사해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구속했다.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로비 사건,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사건 등도 지휘했다.
검찰 내 특수통으로 분류되며 서울고검장으로 있다가 박근혜 정부 초대 검찰총장에 발탁돼 2013년 4월 취임했다. 취임하자마자 이명박 정부 때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 2명을 공직선거법 및 국정원법 위반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이후 혼외자 사건이 터지면서 ‘찍어내기’ 논란과 함께 그해 9월 사퇴했다.
사퇴 3년4개월 만인 올해 1월 서울지방변호사회에 변호사 등록신청서와 개업신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하창우 전 회장이 이끌던 대한변협은 2월 변호사 등록 신청만 수리하고 개업신고는 자진 철회하라며 반려했다.
최근 취임한 김현 신임 회장이 개업신고서를 수리하면서 법무법인 서평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국정원 댓글 사건 때 윤석열 수사팀장과 박형철 부팀장이 각각 서울중앙지검장과 청와대 민정수석실 반부패비서관에 임명되면서 채 전 총장이 어떤 역할을 할지도 주목받고 있다. 」
조강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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