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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ugust 26, 2017

[영어의 몰락] 저무는 영어 권력, 길 잃은 영어 교육 대학 안 갈 아이들을 위한 영어교육 대안 마련해야

대입 수능 절대평가에

공공기관 등 블라인드 채용까지

입시 입사 시험서 위상 흔들려

수능 난이도 높아 부담 여전

문법 위주 입시교육 병폐 심화

학생 영어 격차 되레 확대 우려도

대학 입시와 취업 시장에서 영어의 위력이 줄어들며 조기교육 광풍은 한풀 꺾이는 분위기다. 그러나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기 위한 영어교육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한국의 영어교육, 이대로 좋은 걸까. 홍인기 기자
“남편은 수능 영어도 절대평가 됐는데, 뭐 하러 영어학원을 보내냐고 해요. 당장 끊고 그 돈으로 수학학원에 보내라는데, 영어를 이렇게 등한시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변별력은 수학이랑 국어에서 갈린다고 하지만, 막상 안 시키려니 찜찜하네요.”(서울 구로구 중3 학부모 A씨)
“수능 절대평가로 영어에 힘이 덜 들어가게 된 건 사실이죠. 하지만 내신이 상대평가인데, 영어학원을 안 보낼 수는 없어요. 대치동은 내신 영어 만점이 수두룩해서 한 문제만 틀려도 2등급으로 내려간다고요. 수능은 절대평가, 내신은 상대평가로 어정쩡하게 해 놓으니, 결국 아이들만 피눈물 나는 겁니다.”(서울 강남구 중3 학부모 B씨)
“영어를 꼭 입시 때문에 공부하나요? 세상의 모든 읽을 만한 텍스트는 영어로 씌어 있고, 중요한 정보도 모두 영어로 유통되는데, 아이 손에 영어라는 마스터 키를 쥐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죠. 유튜브에서 요리 레시피 하나를 보려 해도 영어가 필요한 걸요. 훗날 세상에 나가 어떤 일을 하든 그 분야에서 만족할 만한 성취를 이루려면 어느 정도의 영어실력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서울 송파구 초4 학부모 C씨)
해가 지지 않는 제국과도 같았던 한국사회의 ‘영어패권’에 마침내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영어권력’ 마침내 해가 지는가

올 치러지는 2018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영어 절대평가가 시행되고, 문재인 정부가 외국어고와 국제고 폐지를 공언하면서 영어 사교육을 둘러싼 학부모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입시에서의 중요성 감소로 영어교육의 비중을 줄이는 것과 국경 없는 IT시대 세계공용어로서 영어의 위상이 강화되고 있는 현실 사이에서 방황 중이다. 입시뿐 아니다. 취업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토익, 토플 등 국제 공인 영어능력평가시험도 공공기관을 필두로 한 블라인드 채용의 여파로 등등했던 위세가 전만 같지 않다.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영어실력과 이렇다 할 상관관계를 보여주지 못했던 각종 영어능력 지표들이 힘을 잃으며 그 지위가 격하되는 추세다. 도무지 질 줄 모르던 ‘영어권력’에 마침내 그늘이 드리는 조짐이다.
영어 몰입교육(영어로 다른 과목들을 가르치는 것) 도입으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영어교육 열풍의 정점을 찍었던 이명박 정부 이래, 영어교육 정책의 무게중심은 외고 입시 지필고사 폐지(2010), 수능 영어 절대평가 도입(2014) 등 사교육 부담 경감으로 옮겨졌다. 초등생이 수능 영어와 토플 시험을 치르고, 원어민 같은 영어발음을 위해 유치원생에게 혀 설소대 제거수술을 받게 했던 10여 년 전의 풍경을 떠올리면 지독했던 한국 사회의 영어패권에 균열이 가고 있는 건 반색할 만한 현상이다.
영어 사교육 억제정책은 영어학원 폐업률에서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25일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유ㆍ초ㆍ중ㆍ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회화와 토플 등 영어 공인시험 준비 교육을 하는 어학원은 2009년 1,213개였던 것이 올 7월 현재 837개로 7년 반 사이 476곳이 문을 닫았다. 반면 국어 영어 수학 등 교과과목을 가르치는 서울시내 입시, 검정 및 보습학원은 2009년 7,538개에서 2017년 7월 현재 7,906로 362곳이 늘어났다. 교과 영어를 가르치는 입시학원은 늘어나고 다른 어학원들은 대거 줄어든 것이다.
증가하는 학원 폐업률의 원인으로는 학령기 인구 감소가 흔히 지적된다. 서울시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서울시내 학령인구는 2010~2016년 사이 초등학생 21%, 중학생 30.4%, 고등학생 22.4% 줄어들었다. 하지만 입시 보습학원이 1.6% 늘어난 것은 인구 요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 내용이 바뀌었을 뿐 입시용 사교육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수능 영어 절대평가로 영어 공부의 부담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1점 차이로 등급이 달라지는 ‘절대점수제’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서울의 한 일반고 학생들이 영어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시험만 준비하다가… ‘영어는 언제 잘하나’

“수능 영어는 이제 90점을 넘기는 게 지상과제예요. 100점과 90점의 10점 차보다 90점과 89점의 1점 차가 훨씬 중요해지는 거죠. 영어가 늘 100점인 극소수의 최상위권 말고는 절대평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어요.” 서울 서초구의 고1 학부모 D씨는 “분위기만 어수선할 뿐이지 입시 영어에 목을 매야 하는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교육 억제가 정책목표인 만큼 절대평가 수능 영어가 어렵게 출제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출제 형식과 내용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고, 아직은 실행되기 전이라 모두가 관망하고 있는 상태다. 조자룡 한성과학고 영어 교사는 “절대평가라고 해서 학습 부담이 줄어드는 게 아니다. 절대평가에 걸맞은 내용과 형식의 변화가 논의돼야 하는데, 점수 반영 방식만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수능 영어는 학교 교육과정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불가능한 높은 난이도로 이미 악명 높다. 물수능이든 불수능이든 학교 교과과정과 시험 난이도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고, 이 격차는 사교육으로밖에 메울 수 없는 구조다.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가 ‘당신의 영어는 왜 실패하는가’(우리학교 발행)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50분간 풀어야 하는 수능 영어 읽기 지문에는 통상 4,000단어 내외의 단어가 등장한다. 이는 미국 일간지 USA투데이 수준의 글을 분당 130~200단어의 속도로 읽어야 하는 수준으로, 미국 고교생들이 읽는 교재와 비슷한 난이도다.
그러나 초ㆍ중ㆍ고교 10년간 영어수업 시수는 총 970여 시간으로, 이는 모국어가 완성되는 시기의 만 4세 아이가 듣고 말하기에 노출되는 1만1,680시간의 8.3%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영어보다 한국어 노출량이 많다. 읽기에서는 중ㆍ고교 6년간 배우는 영어 교과서를 합친 게 페이지 당 100단어씩 200쪽짜리 영어 원서 두 권(총 432쪽)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정규교육으로 미국 고교생이 USA투데이를 읽는 수준의 수능 시험을 치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조자룡 교사는 “고교에서 3년간 영어를 배우면 익히게 되는 단어수가 3,500개 정도인데, 수능은 2만~3만 단어를 알아야 풀 수 있는 수준에서 출제된다”며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질의하면 검정 교과서 15종을 모두 합쳐 문제를 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온다”고 답답해 했다.
“가장 시급한 건 영어 교육과정을 다듬는 겁니다. 수능과 교육과정 사이의 이 막대한 격차를 줄이지 않으면 절대평가든 상대평가든 큰 의미가 없어요. 교육과정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평가해야 하는지부터 정리하고, 사교육 없이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지금은 학교교육만으로 수능 수준에 도달할 수가 없어요.”

영어가 입시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즐겁고 재미있게 실전 영어 배우기란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게티이미지뱅크

너무도 획일적인 한국의 영어교육

영어가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이고, 국제경쟁력의 핵심적 역량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영어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나쁠 것 없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수능 영어와 토익을 만점 맞아도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며, 이는 수십 년째 한국 영어교육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돼 왔다. 영어실력과 정비례하지 않는 정답 맞히기 기계들만 양산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전일제 유아 영어학원(일명 영어유치원)부터 각종 놀이식 영어학원과 회화학원들이 등장, 새로운 영어 사교육의 트렌드를 만들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이것과도 작별이다.
“중학교 1학년이 되는 순간 일사불란하게 신속, 정확한 문제풀이 영어라는 입시 체제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요.” 교육문제에 매우 개방적인 학부모 E(서울 종로구)씨는 “아이들을 꼭 대학에 보내겠다는 생각이 없어서 즐겁게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는 학원에 보내려고 했는데, 중고생이 갈 수 있는 회화학원은 한 군데도 못 찾았다”고 혀를 찼다. “입시 영어가 아니라 직업의 기술로서, 미래의 방편으로서 영어가 필요한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영어를 배우라는 말인가요? 종로에 있는 대형 회화학원에 문의했더니 성인만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유치원 시절 즐겁게 영어를 배우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는 순간부터 왜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는 입시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모두가 문제풀이식 영어시험의 문제점을 비판하지만, 평가의 편의성 때문에 이 제도는 사라질 기미가 없다. 영어 사교육 억제책이 강력히 시행돼도 끝까지 살아남는다. 중3 학부모 B씨는 “영어유치원에서 말하고 듣는 영어 즐겁게 배우고 잘 하던 아이가 입시와 마주하면서 흥미를 잃고 영어를 짐처럼 여기게 됐다”며 “정규교육 시스템을 싹 바꾸지 않으면 답이 안 나온다”고 말했다.
한국의 영어교육과정은 분명히 읽기와 쓰기, 듣기와 말하기를 교육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평가와 연루되면 오직 읽는 영어만 위세를 떨친다. 문제는 읽고 쓰는 영어(아카데믹 영어)와 듣고 말하는 영어(실용 영어)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학습이라는 것. 이병민 교수는 “영어 중 읽고 쓰는 영역은 수학이나 과학처럼 지식을 배우는 공부지만, 듣고 말하기 영역은 피아노 연주나 수영처럼 반드시 직접 몸으로 행동하고 익혀야 하는 학습분야”라고 지적한다. 장시간의 지속적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고로 ‘명문대씩이나 나와서 영어로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당연한 현실인 것이다.
의사소통을 위한 세계공용어로서의 영어의 위상은 날로 강화되고 있지만, 한국은 사교육 억제에 집중한 나머지 영어능력 향상을 위한 실질적 대안 마련에는 소홀하다. 게티이미지뱅크

다시 쉽고 유용한 말하기 영어로

최근 수년 새 영어교육 업체들의 매출성장은 이 시대 한국에서 영어교육의 현주소를 명시한다. 25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초ㆍ중등 대상 영어교육 1위 기업 청담러닝의 매출액은 2014년 1,305억원에서 201년 1,355억원, 2016년 1,410억원으로 보합세를 보였다. 2위 기업 정상제이엘에스도 같은 기간 782억원, 803억원, 834억원으로 횡보세였다. 성인 영어교육의 전통적 강자인 YBM에듀와 파고다 아카데미는 2014년 각각 766억원, 575억원에서 2016년 709억원, 506억원으로 매출이 감소했다.
성장엔진이 꺼진 영어교육 업체들이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린 사이 신규시장을 창출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시원스쿨, 야나두, 뇌새김 등이 이끄는 성인 대상 온라인 기초영어 시장. 이중 업계 1위인 시원스쿨은 2015년 매출액 480억원에서 2016년 1,287억원으로 168% 성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간단한 단어들의 조합으로 입을 떼주는 일명 ‘단어연결법’으로 쉬운 영어회화 시장을 열어젖히며, 최근 회원수 120만명을 넘겼다. 십 수 년간 읽어왔지만 말은 한마디도 못하는 3040세대의 억눌렸던 영어 수요를 제대로 타격한 것. 연령별로는 30대가 가장 많고, 40대, 20대, 50대가 뒤를 잇는다.
“회원들 대부분이 직장인이고, 고연령층에서는 가정주부도 꽤 많아요. 영어를 공부해서 취업이나 이직을 하겠다는 것보다는 해외여행 가서 음식 주문 정도는 하고 싶다는 정도의 확실한 목표가 있는 분들이죠. 이런 수요가 많아 여행영어 상품도 만들었고요.” 정주희 시원스쿨 홍보과장은 “기초영어라고 하면 영어 수준이 낮은 분들이 배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는 않다”며 “문법과 독해 위주로만 영어공부를 해온 분들이 직장생활과 해외교류 경험 등을 통해 실전 영어에 대한 필요를 뼈저리게 느끼고 다시 기초 영어회화로 되돌아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영어교육은 입시 제도에 묶여 읽기 일색의 교육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수하지 않는 정답 고르기 능력과 의사소통을 위한 자기표현 능력 사이에는 이렇다 할 상관관계가 없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같은 영어교육 시장의 급격한 변화는 한국 영어 공교육의 문제점을 여실히 노출한다. 영어교육의 목적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정도는 해야지’, 더 나아가 ‘반 총장 영어도 발음은 별로더라’ 정도로 맹목적이었던 과거의 광풍은 정부의 강력한 사교육 억제책으로 인해 잦아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의 중요성이 날로 강화되고 있는 세계적인 추세에서 한국만 외딴 섬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한국의 아이들에게 어떤 영어를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가르칠 것인가, 사교육을 최소화하며 이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교육 시스템을 바꿀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전무하다.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은 감행하고 있지만, 체력을 강화할 대안은 부재한 상태다.
학부모 E씨는 일찌감치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한 고3 아들과 지난해 방학을 말레이시아에서 보냈다. 여행 겸 한국에서는 배울 수 없는 영어회화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반에서 10등 바깥에 있는 아이들은 아마도 대학을 못 가거나 안 갈 거잖아요. 이 아이들은 끝없이 문제만 풀어대는 영어시간이 정말 괴롭습니다. 그렇다고 엎드려 잠이나 자면 되느냐, 그렇지는 않아요. 이 아이들이야말로 앞으로 직업세계에 나가면 실전 영어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대학에 가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교실은 이 아이들을 방치하죠?”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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