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노키아는 핀란드의 상징이었다. 노키아는 1994년 이후 휴대전화 제조업체로 변신해 핀란드 역사상 최초로 초일류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1995년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1.1%였던 노키아의 부가가치 생산액 비중(GDP 점유율)은 2000년 4%로 훌쩍 커졌다. 노키아의 매출액은 한때 핀란드 GDP의 3.8%에 달했다. 세계는 핀란드를 두고 '단일 기업 경제(one firm economy)' 체제라고 불렀다.
이런 노키아가 망했다. 애플의 스마트폰 패러다임 혁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방황하던 노키아는 결국, 2013년 그룹의 핵심인 휴대폰사업부를 37억9000만 유로로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했다.
핀란드 경제는 어떻게 됐을까.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을까. 아니다.
2012년 이후 핀란드의 경제 성장률이 유럽연합(EU) 평균보다 낮고, 마이크로소프트가 결국 노키아로부터 인수한 휴대폰 사업 부문을 지난해 폐쇄함에 따라 앞으로 새로운 실업 대란이 일어날 위험이 상존한 건 맞다. 따라서 일부에서 나오는 '노키아가 무너진 후 핀란드 경제가 오히려 살아났다'는 주장은 거짓에 가깝다.
하지만, 생각만큼 핀란드 경제가 당장 큰 충격을 입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로비오(휴대전화 게임 앵그리버드 제작사)와 같은 스타트업 창업 붐이 핀란드에 일어났다. 300명이 노키아 전직 직원이 '이노베이션 밀'이라는 상생 프로그램을 통해 창업에 성공했다. 2013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노키아가 수준 높은 엔지니어 1만 명을 사회로 내보냄에 따라 핀란드의 창업 활동이 활발해졌음을 조명했다. 노키아 쇠퇴가 시작한 2008년 이후 핀란드의 실업률은 소폭 상승했으나, 2011년 이후에는 오히려 안정화됐다. 특히 EU의 다른 나라에 비해 청년 실업률은 오히려 낮다.
우리는 노키아처럼 절대적 규모를 가진 기업이 망한다면 국가 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려야 할 것이라 믿기 쉽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기업 지배 구조의 차이 때문이다. 노키아는 재벌 기업 집단이 아니었다.
<삼성전자가 몰락해도 한국이 사는 길>(미래를소유한사람들 펴냄)은 재벌 개혁론자인 박상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가 노키아 사례를 통해 한국의 초일류 기업인 삼성전자가 무너질 경우,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하고, 미리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함을 촉구하는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을 술술 따라가려면 우선 이 책은 '삼성 망하라는 소리'라는 편견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도 의문은 생기리라. '노키아는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지만, 삼성이라고 그러라는 법은 없잖은가'라는 식의 물음이다. 이 의문은 틀렸다.
박상인 교수는 기업이 망하는 건 노화와 같다고 단언한다.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소리다. 사람의 노화를 방지할 수 없는데, 노화를 막는 방법을 연구하자는 건 헛소리다. 노화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책은 노키아 사례를 다시 언급하며 논리를 보강한다. 노키아는 하이테크 산업에서 기술 혁신이 시장 질서를 바꿀 것이며, 이에 선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키아는 일찌감치 기술 혁신에 과감히 투자했다. 심지어 (우리의 편견과 달리) 스마트폰 시장을 가장 앞서 개척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노키아는 어느 제조업체보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무너졌다. (노키아가 무너진 자세한 이유는 책을 보면 충실히 설명된다.)
박상인 교수는 대형화한 기업은 반드시 관료 체제의 부작용에 시달리게 되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진정한 혁신이 불가능한 조직이 된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삼성 역시 다를 바 없다. 관료적 관리 체계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삼성그룹 특유의 조직 문화다. 삼성이 무너질 상황에 국가적 대비가 필요한 이유다.
왜 그렇다면 굳이 삼성의 몰락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하는가. 일단 삼성전자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2012년 세계 스마트폰 시장 최정상에 오른 삼성은 불과 2년 후, 추락을 시작했다. 지난해 1월 공시를 보면, 삼성전자의 2014년 매출액은 206조6100억 원으로 전년보다 9.83%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무려 31.97% 급감했다. 삼성전자가 신성장 동력을 찾는데 힘겨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경제 뉴스의 단골 소재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한국 경제가 삼성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데 있다. 한국의 삼성 의존도를 보면, 노키아 사례는 약과다. 2014년 말 기준 삼성그룹의 총매출액은 약 303조 원이며, 자산총액은 623조 원이다. 같은 해 한국의 GDP는 1485조 원이었다. 삼성그룹의 매출액은 GDP 대비 20.4%이고, 자산총액은 GDP 대비 42.0%다. 삼성그룹 18개 상장 계열사의 시가총액은 2015년 8월 말 기준 전체 시가총액의 20.4%에 달한다. 2013년 삼성그룹의 GDP 점유율은 4.7%에 달했다. 이는 최전성기 노키아의 점유율(4.0%)보다 크다. 한국이야말로 진정한 '단일 기업 경제' 체제인 셈이다. '삼성 공화국'은 결코 정치적 수사이거나, 과장된 헛말이 아니다.
박상인 교수는 삼성전자가 휴대폰 사업 경쟁력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면 일어나는 일을 시뮬레이션해 책에서 보여준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한국은 핀란드와 달랐다.
휴대폰 판매 부진 등으로 인해 삼성전자 주가가 최전성기 대비 70% 하락할 경우, 삼성그룹 지배 체제의 핵심 고리인 삼성생명과 삼성물산 주가도 각각 70%, 63% 급락한다. 이 영향으로 인해 삼성전자 주가는 추가 하락해 최후에는 87%까지 하락한다. 이는 사실상 삼성그룹 핵심 상장사의 파산을 의미한다.
삼성그룹만의 파산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선, 하청업체가 줄도산한다. 박상인 교수는 역시 대략적인 통계 추정을 통해 우리나라의 삼성그룹 하청기업 노동자 수를 약 152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들 기업이 모두 도산한다면,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약 7.1%포인트 급증하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로 이어지는 금융 계열사 몰락은 국내 보험 산업 전체의 몰락으로 퍼진다. 총보험료 규모로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각각 생명보험 보험료의 23%, 손해보험 보험료의 25%를 차지한다.
파문은 여기서 끝나지도 않는다. 삼성전자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무너진다. 예상되는 기금 손실 규모는 약 19조 원이다. 이 손해는 정부 재정으로 메워야 한다. 법인세수도 무너진다. 삼성그룹이 법인세를 납부하지 않을 경우, 법인세수는 약 20%포인트 줄어들게 된다.
은행 부실도 필연적이다. 주식 시장 전체가 무너지는 것 역시 불을 보듯 뻔하다. 삼성전자의 몰락은 곧 삼성그룹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국가 경제 마비로 연결된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전개된다.
왜 핀란드와 한국은 다른가. 박상인 교수는 명쾌히 단언한다. 우리나라의 재벌 지배 구조 체제 때문이다. 총수 가문의 그룹 지배를 위해 누더기처럼 정비된 그룹 핵심 계열사 간 순환 출자 체계와 무늬뿐인 지주회사 체계로 인해 개별 기업 리스크는 순식간에 그룹 전체로 퍼진다. 삼성그룹처럼 막강한 글로벌 기업의 위기로 인한 피해는 자연히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책은 후반부에 이르러 확신에 찬 대안을 제시한다. 재벌 기업에 대한 경제력 집중을 과감히 금지해야 한국 경제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단언한다. 구체적 사례로 박상인 교수는 2013년 만장일치로 의회를 통과한 이스라엘의 '경제력 집중법(Concentration Law)'을 든다.
이 법은 크게 3가지 개혁 내용을 담고 있다. 기업 소유 지배 구조 개선, 금산 분리, 경제력 집중 우려 기업의 참여 자격 위원회 설립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법이 통과됨에 따라 앞으로 이스라엘 기업은 '지주회사-자회사' 2층 구조의 지주회사 체제 지배 구조만 가질 수 있다. 한국처럼 손자회사의 존재까지 모조리 인정하는 느슨한 지주회사법과는 차원이 다르게 엄격하다. 또 자산이 400억 세켈(약 13조6100억 원)을 초과하는 은행, 보험사,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의 금융기관과 비금융회사를 동시 보유하는 것을 금했다.
아울러 경제력 집중 우려 기업으로 지정된 대기업이 공기업의 민영화, 주요 공공 입찰, 라이센스 획득 등에 참여하려 할 경우, 허용 여부를 권고하는 독립적인 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도록 시장 참여까지 제한했다.
박상인 교수는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개혁 조치와 미국의 역대 강력한 규제 정책을 예로 들며, 지금이라도 '삼성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과감한 재벌 규제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삼성 리스크가 현실화한다면 한국 경제와 사회는 1997년의 경제 위기 당시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겪을 수 있다"며 최악의 경우 "경제위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남미형 사이클로 전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경영학 관련 서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본 이라면 누구나 안다. 기업은 영속 가능하지 않다. 기업의 수명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짧다. 기껏해야 사람의 중년 수준에 불과한 평균 수명을 가진 기업이 이토록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면, 그 기업이 무너질 경우를 대비한 국가적 대응 체계를 마련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스라엘 여야가 합심해 재벌 규제 관련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게 상식적 일이다.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 삼성 망하지 않게 규제 완화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앞서 보았듯, 노화는 필연적이며, 기업은 영속 가능하지 않다. 국회가,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규제 완화가 아니며, 재벌 규제다. 제2의 외환 위기는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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