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안학살’의 생존자 응우옌떤런씨. 사진 조우혜 프리랜서 사진가
[토요판] 커버스토리 / 베트남 평화기행
50년만에 한국정부 책임 촉구한 생존자 런
1004명 죽은 베트남 빈안학살 위령제 기행
50년만에 한국정부 책임 촉구한 생존자 런
1004명 죽은 베트남 빈안학살 위령제 기행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80여건, 9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최대 규모인 ‘빈안학살’의 생존자 응우옌떤런(65)씨는 지난달 26일 베트남 중부지방인 빈딘성 떠이빈사(옛 빈안사) 고자이마을에서 열린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 연설에서 “한국 정부가 이 일에 대해 책임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50년 전 2월 이곳 떠이빈사에선 3주에 걸쳐 한국군에 의해 10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빈안학살’로 불린 그 과정에서 런씨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다. 그의 나이 열다섯살이었다. 런씨는 지난해 4월 평화박물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참전군인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그들은 런씨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했고 런씨는 그날 이후 “더 이상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떠이빈사를 시작으로 올해 베트남 중부지방 곳곳에선 당시 학살된 영령들을 위무하는 50주년 위령제가 열린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1966년에 집중됐던 탓이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진실은 감춰지고 학살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에 참배하기 위해 베트남을 찾은 한국의 평화기행단을 따라가보았다. ‘파이 찌우 짝 니엠’은 베트남 말로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다.
▶ 지난해 4월 한국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방한 기간인 일주일 동안 조용히 그를 따라다녔다. 방한 기간 동안 그는 참전군인들과 만났다. 그에게 방한의 경험은 새롭게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숨진 지 50년. 빈안학살의 생존자 응우옌떤런씨는 고향 마을에서 한국 정부의 책임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들의 위령제를 찾은 한국의 참배단은 그와 베트남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한국인들의 진심은 이들에게 어떻게 전해졌을까.
한국에서 야당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한창이던 지난달 26일 오후. 베트남 중부지방인 빈딘성 떠이빈사(xa·한국의 읍면 단위) 고자이마을 내에 있는 ‘빈안학살 위령제단’으로 향하는 길엔 오토바이 수십대가 주차돼 있었다. 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을 기리는 ‘따이한 제사’가 바로 전날 열렸던 곳이다. 제단 주변엔 전날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족히 기백은 돼 보였다. 50주년 같은 특별한 날은 평소와 달리 성(한국의 시·도 단위)에서 위령제를 주관한다고, 인솔자 구수정(50) ‘아맙’ 본부장이 설명했다. 제단 입구엔 거대한 천막이 세워졌고 무대가 설치됐다. 식전 행사인 노래와 군무 공연이 한창이었다. 군가나 ‘투쟁가요’를 연상케 하는 비장한 풍의 곡들이 무대 양옆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모인 곳은 으레 그렇듯, 군것질거리나 아이들 장난감을 파는 이들이 주변을 배회했다.
바닥에 엎드려 절하다
지난달 24일부터 6일간의 일정으로 베트남을 찾은 ‘평화기행단’은 모두 32명이었다. ‘한-베평화재단 추진위원회’가 중심이지만,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베트남과 인연을 맺은 이들이었다. 베트남의 사회적기업 아맙이 이끈 기행단은 타고 온 45인승 대형버스에서 내려 한국의 여러 단체와 개인이 보낸 15개의 화환을 들고 제단으로 향했다. ‘광주 지혜학교’, ‘아이쿱 한밭생협’, ‘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모임’, ‘호아빈의 리본’ 등의 이름이 화환에 매인 리본에 적혀 있었다. 전날처럼, 한국인 기행단이 가까이 다가가자 모두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시선을 의식하며 제단 근처에 화환을 내려놓고 행사장 천막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객석의 중간쯤이었다. 온통 베트남 사람들뿐인 식장 한복판에 한국인 32명이 섬처럼 박혔다. 정확히 50년 전 이 일대에서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이 민간인 1004명을 학살했다. 그 영령들을 위무하기 위한 자리였다. 학살의 직접 가해자는 아니지만, 동족이었다. 환영받을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주변 많은 표정들 중 유독 슬픈 표정의 눈과는 마주하기 힘들었다. 스스로 가해자인 양 느껴졌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남조선 군인들이 이곳 주민들을 모아놓고….” 공식 위령제가 시작됐다. 주변 베트남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사회자의 말 중 극히 일부만 통역돼 조심스레 전해졌다. 이들은 한국을 남조선이라 부르고 있었다. 내빈 소개와 빈딘성 인민위원회 부주석의 기념사가 이어졌다. 잠시 뒤 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65)씨가 무대로 나왔다. 런씨는 1966년 2월15일 빈안사(현 떠이빈사) 내 깐븜마을 학살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다. 당시 열다섯살. 런씨는 여동생과 어머니가 차례로 숨지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의식을 잃고 난 뒤 눈을 떴을 때 런은 세상에 혼자였다. 그는 “그 순간 눈앞이 캄캄해져 하염없이 엄마를 부르며 울었다”고 했다. 청중은 숙연해졌다. 주변 표정들은 어두웠다. 곳곳에서 눈물이 흘렀다. 연신 콧물을 들이켜는 소리가 등 바로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진 못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 눈을 마주하는 일이 두려웠다. 런씨는 뜻밖에도 “한국 정부가 이 일에 대해 책임지기를 원한다”는 말로 증언을 마무리했다. 베트남 정부는 그간 ‘인민’들에게 ‘과거를 닫고 미래를 열자’고 역설해왔다. 베트남전에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한국군의 과오는 ‘닫아야 할 과거’였다. 오는 5월 미국 대통령으로선 사상 두번째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한다. 정부가 열어야 할 미래가 산적해 있다. 런씨의 바람은 정부 방침과 달랐다. 한국 정부가 런씨의 바람을 전해 들을 수 있을까.
런씨의 증언에 이어 빈딘성 청년대표가 연설했다. 이후 노화욱(63) 평화기행단 단장(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 이사장)이 호명됐다. 노 단장은 떠이빈사 정부 관계자와 주민들이 바라보는 무대 앞으로 나가 추모사를 읽어 나갔다. “존경하는 대표자 여러분! 그리고 주민 여러분!” 구절마다 통역이 뒤따르는, 다른 나라 말이었다. 일순 주변이 조용해졌다. “‘씬 로이!’(베트남어로 ‘미안하다’) 미안합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야 사죄의 꽃 한 송이 들고 이곳에 왔습니다.” 팔짱을 낀, 심각한 표정의 시선들이 무대에 꽂혔다. “한국도 식민 지배와 분단, 전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또한 미국에 의한, 동족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이 베트남에 똑같은 고통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중략) 억울한 죽음 앞에 엎드려 사죄드립니다.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연설이 끝났다. 단장은 무대 한가운데로 가 바닥에 엎드려 절했다. 청중은 말이 없었다. 자기들끼리 돌아보며 웃기도, 무표정이기도, 심각한 얼굴이기도 했다. 런씨의 연설 때부터 훌쩍이던 이는 계속 눈물만 흘렸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들 속에서 조용히 박수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장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긴장된 순간이 지나갔다.
50년 전 한국군에 의해 3주간
1004명 희생된 빈딘성 떠이빈사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를
한국 참배기행단 32명이 찾았다
노화욱 단장은 사죄의 절을 했다
지난해 한국을 찾았다가
참전군인들과 맞닥뜨리기도 했던
생존자 런씨는 공식연설에서
“용서는 결코 망각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책임지길 원한다”
갑자기 나타난 남성
단장의 사과는 다음날 베트남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베트남 대표 일간지 <뚜오이째>는 이날 밤 인터넷판으로 ‘한국 대표, 빈안 학살에 대해 사죄하다’란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역시 베트남 주요 일간지인 <라오동>도 한국의 한 대학 석좌교수이기도 한 노 단장을 들어 ‘한국인 교수, 무릎 꿇고 빈안의 학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다’라고 다음날 보도했다. <띠엔퐁>, <전찌>, <덧비엣> 등 다른 주요 언론들도 비슷한 보도를 내놨다. 구 본부장은 “이례적인 일”이라 했다. 한국의 정부 인사가 아닌, 한낱 민간인의 사과에 베트남 여론이 흔들린 걸까. 이후 거리에선 한국의 평화기행단을 알아보는 이들이 생겨났다. 50주년 위령제가 열린 고자이마을을 포함해 모두 다섯 곳의 학살 현장을 찾기로 돼 있던 기행단으로선 뜻밖의 일이었다. 위령제 이틀 뒤인 28일 꽝응아이성의 한 꽃집 종업원은 “‘50주년 위령제 참배단’ 아니냐”며 헌화에 쓸 꽃다발을 몇 개 더 얹어줬다. 29일 꽝남성 호이안시의 한 택시기사는 “진작에 들어 알고 있다. 위령제에 다녀간 한국 사람들의 소식이 꽤 유명하다”고 했다.
버스에 찾아와 “우리 마을에도 와달라”고 호소한 이도 있었다. 위령제를 지낸 다음날 베트남 빈딘성 깟띠엔사의 쯔엉타인마을 위령관을 방문한 뒤였다.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오른 기행단에게 한 베트남 남성이 찾아왔다. 출발을 잠시 미룬 버스에 올라 그는 “한국 사람들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할 말이 있어 왔다”고 했다. 그는 1966년생, 이름은 판딘라인이었다. 그의 마을은 인근 깟흥사에 있었다. 태어난 지 3일째 되던 날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날 방공호 안에서 그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잃었다. 왜 한국 사람들이 쯔엉타인마을에는 오면서 자신의 마을에 오지 않는지, 속상하고 억울해서 달려왔다고 했다. 그는 “난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지금까지 굉장히 어렵게 살아왔다. 여긴 위령비가 있어 한국 사람들이 와서 향도 피우고 참배도 하지만, 우리 마을엔 아직 위령비도 없다. 우리 집에 좀 와달라. 서로 위로가 필요하지 않나. 이 말 한마디 하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평화기행단은 숙연해졌다. 마침 쯔엉타인 위령관에서 학살 때 5명의 가족을 잃고 홀로 산다는 후옌티다오(87) 할머니를 만나고 온 길이었다. 연신 불편한 몸을 떨며 할머니는 한국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라인씨의 말이 이어지자 버스 안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끝내 울먹였다. “한국 사람들이 와서 참배했다는 소식에 감동받았습니다. 예전엔 적이었지만 이젠 친구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오시면 충분히 받아주고 용서할 마음이 있습니다. 제발 우리 마을을 찾아와주세요.” 위령비를 세우려면 베트남 정부 차원의 조사와 허가가 필요하다. 그의 마을에서 정부 조사가 있었는지, 있었지만 마무리되지 않은 것인지, 조사를 끝내고도 돈이 없어 위령비를 세우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돌아간 뒤 구 본부장은 “이렇게 베트남 사람들이 직접 기행단을 찾아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평화기행단 이름으로 베트남 내 한국군 민간인 학살지를 다녀간 한국인들은 그간 수백명에 이른다. 1999년 구 본부장이 <한겨레21>을 통해 처음 관련 문제를 국내에 알린 뒤 시민사회 인사들이 모인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결성됐고, 그로부터 전쟁의 진상을 알리고 피해자들을 위무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졌다. 일본군 ‘위안부’ 고 문명금 할머니와 김옥주 할머니가 기부한 7000만원이 전쟁과 폭력을 성찰하기 위한 평화박물관 건립의 종잣돈으로 쓰이기도 했다. 17년간 이어져온 한국인들의 진심이 이제 베트남인들에게 폭넓게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보자인, 그것은 무명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 하루 전날 있었던 따이한 제사에 한국인들이 참석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베트남 지방정부가 여는 위령제와 달리, 제사는 유가족들이 중심이 돼 진행한다. ‘과거를 닫자’는 정부와 달리, 직접 피해자인 유가족들은 그간 한국인의 제사 참석을 꺼려왔다. 제사가 해마다 열리지 못하기도 했다. 이곳 전통상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음복을 해야 하는 제사를, 형편이 넉넉지 않은 유가족들이 해마다 지내긴 어려웠다. 50년 전 380명의 마을 주민 모두가 한 시간 만에 숨졌다는 고자이마을의 따이한 제사는 지난해와 그 전해엔 열리지 못했다. 제사가 열린 지난달 25일 평화기행단은 ‘침략 적군에 대한 복수심을 영원토록 가슴 깊이 새기리라’라고 쓰인 고자이마을 위령비 앞에서 영령들에게 참배했다. 위령비 바로 뒤편이 50년 전 그 학살의 장소였다. 피리와 북, 현악기들의 어지러운 연주를 배경으로 제사장은 “원귀여, 망령이여, 영혼이여”를 반복하며 향을 피웠다. 베트남 제사에선 원래 망자의 이름을 부르는데, 이곳은 망자가 너무 많기 때문인 듯하다고 구 본부장이 설명했다. 어른 키 높이의 제단엔 익히지 않은 돼지갈비와 과일, 닭, 죽, 투명 비닐포장을 한 과일바구니 등 갖은 음식이 놓였다. 위령비 주변으론 색색 깃발이 나부꼈고, 붉은색이 바랜 낡은 천막은 갑자기 내린 비를 온전히 막지 못했다. 제단 주변을 돌며 연신 사진을 찍던 한 베트남인은 자신이 찍은 한국인 기행단의 사진을 보여주며 필담으로 이름을 물어왔다. 밝은 표정이었다. 그는 그 표정으로, 기행단에 속한 다큐영화 제작팀에게 다가가 제단 뒤 위령비에 새겨진 이름을 가리키며 그곳을 찍으라 손짓했다. 380명의 이름 중 적지 않은 수가 ‘보자인’(vo danh)이었다. 우리말로 ‘무명’이란 뜻이다.
제사가 끝난 뒤 열린 평화기행단과 마을 주민들의 음복연은 화기애애했다. 음복연에서 만난 마을 주민 당까오롱씨는 “학살의 기억이 있느냐”는 물음에 “주변에 많다. 친척들, 이웃들 일일이 셀 수 없다”고 했다. 학살 1년 뒤인 1967년에 태어났다는 그는 “처음 인민위에서 한국 사람들을 (위령제에) 받아준다 했을 때 주민들 마음이 정말 힘들었다. 근데 이렇게 꾸준히 오니까, 이젠 우리도 반긴다. 괜찮다. 부담 갖지 말고 편히 먹고 마시자”며 웃었다. 380명의 희생자 이름이 적힌 위령비 앞에서 열린 이날 술자리 이곳저곳에선 베트남식 건배 ‘못, 하이, 바, 요!’(하나, 둘, 셋, 마시자!)가 늦도록 이어졌다.
기행단은 다음날 위령제에 가기 앞서 빈안학살의 대표적 생존자 런씨를 그의 집에서 미리 만났다. 베트남어를 모르는 기행단이 런씨의 위령제 증언을 먼저 들어두기 위해서였다. 런씨는 학살 당시 살던 곳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 기행단은 대형버스에서 승합차로 갈아타고 깐븜마을의 강변 좁은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 고즈넉한 고샅에 이르러 차에서 내려 걸었다. 런씨의 집은 짙은 녹색 논이 드넓게 펼쳐진 들녘 한편에 있었다. 50년 전 이곳 인근 어딘가에서 런씨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숨졌다. 런씨는 “그날 새벽부터 포격과 총소리가 이어졌다”고 했다. 잠에서 깬 런씨는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집 근처 방공호에 숨었다. 아버지는 그가 3살 때 이미 집을 떠났고, 3살 위의 형도 남베트남군의 징집을 피해 산악지대로 들어간 뒤였다. 한때 집을 비켜 멀어진 총소리는 오후 4시쯤 다시 집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런씨네는 결국 한국 군인들에 의해 발각돼 끌려나갔다. 마을의 한 들판에 런씨네처럼 끌려온 20여가구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한국군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인 채 엎드리게 했다. 한 시간가량 지난 뒤 어떤 외침 소리가 들렸고, 그 직후 발포가 시작됐다. 들판은 아수라장이 됐다. 가득한 포연 사이로 사람들의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갔고, 몸이 산산조각 났다. 런씨의 엄마는 그 순간 남매를 끌어안았다. 수류탄 하나가 런씨의 발뒤꿈치에 맞고 땅에 떨어졌다. 런씨는 서너 발 뛰어가 엎어졌고 수류탄이 터졌다. 온몸에 파편을 맞은 런씨는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캄캄한 저녁이었다. 어둠이 내려 보이지 않는 주변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한참 뒤 시신을 수습하러 사람들이 왔다. 런씨도 옮겨졌다. 숙부의 집에서 런씨는 겨우 다시 의식을 되찾았다. 런씨와 함께 옮겨진 어머니는 하반신이 거의 없었다. 여동생은 머리가 심하게 깨져 있었다. 내내 광란적인 비명과 신음을 내지르던 여동생이 먼저 숨을 거뒀다. 마을 사람들이 여동생을 묻고 돌아오자 어머니도 숨졌다. 어머니가 숨진 뒤 런씨는 또 의식을 잃었다.
런, 참전군인을 만난 경험
빈안학살은 1966년 1월23일부터 2월26일(양력)까지 주월(주베트남의 옛 표현) 한국군의 맹호부대 3개 중대에 의해 빈안사의 총 15개 지점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이른다. 모두 1004명의 주민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는 728명. 그 가운데 어린이가 166명, 여성이 231명, 60살 이상의 노인이 88명이었다. 런씨의 어머니와 여동생도 이들 가운데 하나다. 자신의 집에서 평화기행단을 맞은 런씨는 “이번 50주년 위령제를 앞두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며 미리 준비한 편지를 읽었다. 런씨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날 내 몸에 새겨진 상처를 물끄러미 볼 수 있을 만큼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젠 나도 지난 기억들과 화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무덤도 말끔히 손질했습니다. 벌초를 마치고 어머니의 무덤가에 오래도록 머물렀습니다. 용서라는 단어가 목젖에서 맴돌다 삼켜집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대신해 용서할 수 있는 것인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습니다.” 런씨가 편지를 읽는 동안 이따금 들녘을 훑고 온 선선한 바람이 집 안으로 불어들었다. 2월말 베트남 중부지방의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닭과 개가 울었고, 실내엔 나무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 훌쩍임, 헛기침,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런씨와 통역을 맡은 구 본부장의 목소리 사이로 흘러들었다. 런씨는 베트남전 종전 40년을 맞아 한국의 평화박물관 초청으로 지난해 4월 한국을 찾았다. 편지에서 런씨는 그때 한국에서 만난 참전군인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군인들을 지켜봤던 그는 “그 순간 더 이상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제 어머니의 죽음을, 제 누이의 죽음을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자는 있는데, 죽인 자는 없으니 누구를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앞에서 부모와 배우자가, 형제와 자식이 살해됐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 어떤 논리와 이성이 당신을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런씨의 편지는 조금씩 강한 어조를 띠어갔다. ‘복수’와 ‘책임’, ‘진실’ 같은 단어들에 힘이 실렸다. “저는 이 순간까지도 복수에 앞장서는 미친 짓을 하지 않기 위해 제 몸의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 나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박정희의 군인들은 범죄자임과 동시에 희생자입니다. 저는 이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그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자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는 결코 망각이 아닙니다. 진실이 덮여 있는 한 저는 용서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는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책임질 수 있을 때 비로소 과거는 극복됩니다.”
런씨는 읽고 난 편지를 노 단장에게 전했다. “용서를 미루겠다”던 런씨는 몇 시간 뒤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 공식 연설에서 “한국 정부가 이 일에 대해 책임지기를 원한다”고 힘줘 말했다. ‘망각이 아닌 진실’, ‘잘못이 반복되지 않는 책임’이 진정 그가 바라는 것이었다.
런씨가 사는 깐븜마을이 속한 이곳 ‘사’는 원래 이름이 빈안(Binh An·平安)이었다. 우리말로 ‘평안’이란 뜻이다. 참혹한 학살을 겪은 마을 사람들은 더이상 그 이름을 쓸 수 없었다. 학살의 폐허 위에 마을을 재건한 사람들이 ‘서쪽의 영광’이란 뜻의 떠이빈(Tay Vinh·西榮)으로 이름을 바꿨다. 런씨의 집을 찾기 전, 빈안박물관에서 만난 박물관 직원 응우옌티년(34)씨는 “한국군은 1966년 2월께 3주에 걸친 소탕작전을 벌였는데, 그들이 거쳐간 마을마다 잔인한 학살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고자이학살”이라 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한국군은 여러 잔혹한 방법을 동원해 주민들을 집단학살했다. 여성의 음부에 칼을 꽂고, 아이들을 산 채로 태웠다. 방공호 안의 사람들도 산 채로 태워졌다. 어머니가 젖먹이를 품고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보름 뒤 도망간 이들이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땐 짐승들이 시신을 흩어 놓아 악취가 진동했다고 한다. 생존자들은 전쟁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이곳이 다시 ‘빈안’이라 불리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학살이 1966년 집중됐던 탓에
올해 곳곳에서 50주년 위령제
첫 위령제가 열린 고자이마을은
소녀상 만든 김서경·김운성 작가의
‘베트남 피에타’ 설치 후보지
베트남 언론들 대대적 보도
태도와 논조에 미묘한 변화
‘뚜오이째’는 “과거를 잠시
제쳐놓는 것이 결코 과거를
닫는다는 의미 아니다”라고 써
벽화에 새겨진 맹호부대 마크
마을 사람들은 학살이 일어난 지점마다 위령비를 세웠다. 빈안학살 중 대표적 학살로 불리는 고자이마을의 학살 터엔 거대한 위령비와 추모제단, 공원이 들어섰다. 희생자 추모비 뒤편 벽화엔 한국군 맹호부대 마크가 그려진 군복을 입은 군인의 모습이 있다. 마을 주민들의 기억을 통해 재생된 그림이다. 그 그림 앞에서 해마다 2월26일 위령제가 열린다.
기행단은 지난달 24일 호찌민에 도착해 전쟁증적(증거와 흔적)박물관 등을 돌아본 뒤 중부지방으로 이동했다. 고자이마을에서 열린 빈안학살 따이한 제사와 위령제에 참석한 뒤 29일까지 빈딘성의 고자이마을과 쯔엉타인마을, 꽝응아이성의 빈호아마을, 꽝남성의 하미마을과 퐁니마을을 둘러봤다. 모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학살이 1966년에 집중됐던 탓에 올해 베트남 중부지방 곳곳에선 50주년 위령제가 열린다. 가장 먼저 50주년 위령제가 열린 빈딘성 고자이마을은 ‘베트남 피에타’(엄마와 무명아가상, 베트남어론 ‘마지막 자장가’)의 설치 후보지 중 하나다. 한-베평화재단 추진위가 민간인 학살을 사과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51), 김운성(52) 작가와 함께 추진중인 사업이다.
평화기행 5일차인 28일 꽝응아이성의 빈호아마을로 가는 버스 안에서 구 본부장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한 초기 과정을 들려줬다. 1998년 한국인 작가 몇이 일본 식민지배의 아픔을 알리기 위해 일본 평화단체인 ‘피스보트’에 합류했다. 배를 타고 여러 나라를 돌며 세계 각국의 참상과 기아, 빈곤의 문제를 둘러보는 여행이기도 했다. 첫 기착지는 베트남 중부 다낭. 그곳에서 작가들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를 처음 접했다. 주민들 얘기를 듣고 난 일본 활동가가 ‘너희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고 했고, 작가들은 그길로 피스보트에서 내려버렸다. 이듬해 이들을 주축으로 시민단체 ‘나와우리’가 결성됐고, 당시 그 작가들과 만난 구 본부장이 선물로 쓸 인삼차를 한가득 트럭에 싣고 45일 동안 하루 3곳의 마을을 다니는 일정을 소화했다. 구 본부장은 그해 9월2일치 <한겨레21> 기사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를 통해 국내에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를 처음으로 알렸다. 빈호아마을 사람들도 그때 학살 이후 처음 한국인을 만났다고 했다.
1960년에 시작된 베트남 전쟁은 1964년 ‘통킹 만 사건’ 이후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1975년까지 이어진 전쟁에 한국군은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1964년 의료지원단과 태권도 교관 등 270여명을 사이공(현 호찌민) 남쪽 붕따우에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1965년 10월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2만명의 전투부대가 투입됐다. 구 본부장은 <한겨레21> 기사 등을 통해 한국군에 의해 죽은 베트남인의 수가 공식 통계로 4만1450명이며, 베트남 당국의 조사 결과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례는 80여건, 피해자 수 9000여명에 이른다고 밝힌 바 있다. 종전 뒤 끊겼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1992년 12월 공식 수교를 통해 재개된다. 수교 이후 베트남 정부는 인민들에게 ‘과거를 닫고 미래를 열자’고 호소했고,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피해왔다. 김대중 이후 역대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할 때마다 포괄적 의미의 유감 표명을 했을 뿐이다. 양국 정부의 무관심과 홀대 속에 민간인 학살 문제는 지금까지 일부 민간 차원의 교류를 통해서만 다뤄지고 있다. 미군에 의한 최대 민간인 학살 사건인 ‘밀라이학살’이 드물게 법정에서 심판받은 것 등과 대비된다. 한국 정부와 참전군인들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지 않았다.
평화란 무엇인가
26일 기행단의 위령제 참가 뒤 베트남의 주요 언론들은 한국 참배단의 참배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단지 소식을 전한 것뿐 아니라, 보도 태도나 논조에도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구 본부장은 “올 초 주요 지도부가 바뀐 베트남 정부 내에서 무언가 다른 흐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위령제 다음날 꽝응아이성에서 만난 베트남의 ‘국민 시인’ 타인타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기행단에게 전했다. 그가 접한 베트남 최대 일간지 <뚜오이째> 기사의 요지는 “과거를 잠시 제쳐놓는다는 것이 결코 과거를 닫아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였다. 그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미래를 향해 가고 있지만 이것이 곧 ‘과거를 잊겠다’, ‘망각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거를 닫고선 미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의 평화기행단이 전한 ‘50년 만의 사과’가 베트남 사회에 이전과 다른 공명을 일으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6일간의 일정이 끝난 지난달 29일 저녁 평화기행단은 호이안시의 옛 도심을 거닐었다. 일행 중 베트남평화의료연대에서 속한 송필경(61) 선생은 지금까지 모두 스물한 차례 베트남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이날 낮 기행단이 만난 퐁니마을의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씨의 2년 전 모습을 떠올렸다. 그날 탄씨는 증언을 마친 뒤 한국인 청중들에게 “왜 우릴 쏘아 죽였나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질문을 듣자마자 당시 기행단에 참여한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의 몸이 무너졌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린 채 울며 사죄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노교수의 느닷없는 통성 앞에서 탄씨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자정이 가까운 시간 다낭공항은 인파로 북적였다. 40개 매표 창구의 거의가 인천과 부산으로 향하는 승객들을 위한 것이었다. 먼저 수속을 마친 뒤 한구석에서 일행들을 기다렸다. 한 한국인 아이가 손에 쥔 초콜릿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부모에게 떼를 쓰고 있었다. 달래던 부모도 아이를 내버려뒀다. 기행단의 일정 내내 만나기 쉽지 않던 한국인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는 듯했다. 이들은 그간 베트남의 어디에 있었던 걸까. 9000명에 이르는 베트남의 민간인을 한국군이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이들 중 몇 명이나 될까. 문득 평화란 각자가 딛고 선 토양의 기저, 근원에 대한 인식과 책임감이 이끄는 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한국군이 주둔했던 베트남 중부지방 곳곳에선 50주년 위령제가 열린다. 반세기가 지나고 있는 것이다. 런씨가 바란 ‘망각이 아닌 진실’, ‘잘못이 반복되지 않는 책임’은 언제쯤 가능할 수 있을까.
빈딘·꽝응아이·꽝남/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참여문의 한-베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회 amapvietnam @gmail.com, 후원계좌 국민 324702-04-146079 전미화(한베평화재단)
평화기행단 행선지
지난달 26일 열린 위령제에서 한국의 노화욱 평화기행단 단장은 50년 전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1004명의 영령을 추도한 뒤 무대 한가운데로 가 바닥에 엎드려 절했다. 노 단장의 사과에 베트남 청중들은 말없이 박수를 쳤다. 빈딘/조우혜 프리랜서 사진가
1004명 희생된 빈딘성 떠이빈사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를
한국 참배기행단 32명이 찾았다
노화욱 단장은 사죄의 절을 했다
참전군인들과 맞닥뜨리기도 했던
생존자 런씨는 공식연설에서
“용서는 결코 망각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책임지길 원한다”
위령제 이후 <뚜오이째>를 비롯한 베트남 주요 언론들은 ‘한국 대표, 빈안학살에 대해 사죄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잇따라 보도했다. 왼쪽부터 <싸루언>, <뚜오이째>, <라우동>의 모바일 기사 화면. 아맙 제공
지난달 25일 베트남 빈딘성 떠이빈사 고자이마을에서 ‘빈안학살 50주년’을 맞아 ‘따이한 제사’가 열렸다. 주민들 뒤로 빈안학살 위령제단 뒤편에 설치된 벽화가 보인다. 벽화엔 한국군 맹호부대 마크가 그려진 군복을 입은 군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빈딘/조우혜 프리랜서 사진가
올해 곳곳에서 50주년 위령제
첫 위령제가 열린 고자이마을은
소녀상 만든 김서경·김운성 작가의
‘베트남 피에타’ 설치 후보지
태도와 논조에 미묘한 변화
‘뚜오이째’는 “과거를 잠시
제쳐놓는 것이 결코 과거를
닫는다는 의미 아니다”라고 써
한-베평화재단 추진위원회가 주축이 된 평화기행단 단원들이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가 열린 지난달 26일 한국에서 보내온 화환을 위령제단 근처로 옮기고 있다. 조우혜 프리랜서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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