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회의에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야당은 지난달 23일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시작했다. 필리버스터는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의 연설을 끝으로 중단됐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뜻이다. 이후 김 대표는 ‘야권 통합’을 제의했다.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사진)은 4일 공개한 팟캐스트 <이대근의 단언컨대> 제107회 ‘야당에 야수적 충동이 일었나?’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와 당을 둘러싼 쟁점들을 분석했다.
■ 김종인 대표가 제기한 논쟁점
ⓛ 필리버스터는 역풍을 부르는 이념 문제인가?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통해 저지하려는 테러방지법 관련 대립 상황을 ‘이념문제’라고 규정하고 필리버스터를 강제 중단시켰다. 이념문제라는 건 실제 삶과는 무관한 공허한 주장을 둘러싼 갈등이라는 뜻이다. 테러방지법은 민생, 즉 먹고 사는 일과 직접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념논쟁, 즉 추상적인 가치 논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민의 일상을 감시하는 기본적 시민권 문제로서 중요한 쟁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념문제라고 김 대표가 주장하는 배경에는 테러방지법이 선거 의제가 되지 않도록 빨리 탈출하자는 전략적 판단이다. 이 때문에 필리버스터 계속 하면 ‘선거 역풍’이 분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역풍을 순풍으로 만드는 것이 정치다’라고 반박했다. 두 사람 말은 다 옳다. 시민 감시라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IS 테러, 북한의 4차 핵실험, 장거리 로켓발사 등 시점상 여권이 테러방지법 제정을 강행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게다가 국회의장이 본회의에 직권상정함으로써 통과 날짜만 남겨둔 상황이다. 필리버스터를 해봤자 통과 날짜만 며칠 미루는 효과에 불과하다. 게다가 야당이 재촉했던 선거구 획정안 통과도 필리버스터로 지연될 수밖에 없다. 여권이 공세를 펼 명분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리버스터는 뜻하지 않게 시민과 지지층의 열정에 불을 댕겼다. 야당에 냉소적이었던 이들을 다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다시 불러 모은다면 야당에 대한 비관주의를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참 타오르는 불을 갑자기 끄기보다 며칠 더 불을 지펴 지지층을 다시 일으켜 세운 뒤 의원들이 일치단결해 필리버스터를 종결하며 총선 승리해 개정하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김 대표의 ‘지금 당장’, 이 원내대표의 ‘조금 더’는 일장일단이 있다.
그런데 김종인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이겨본 적이 있는 성공 모델을 갖고 있다. 반면 이종걸 원대대표는 그게 없다. 그는 야당의 실패 모델을 상징한다. 게다가 필리버스터 이후 다음 의제를 던지고 당의 운명을 책임질 사람이 누군인지도 분명하다. 당연히 김 대표 뜻이 관철될 수밖에 없다. 김 대표는 다음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야권통합론 제안이다. 상당히 먹히고 있다. 한마디로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으니 눈 딱 감고 제1막을 내리기로 한 것이다. 김 대표가 계속 성공적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타오르는 장작불에 찬물을 끼얹어 끌 수 있는 과감한 결단력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이 독단적 결정은 당 안팎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기존 야당에 이렇게 잘 나가는 국면에서 단칼에 접고 철수하는 리더십이 없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가 2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② 야당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정책 전환은 타당한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 정부의 합의는 바꿀 수 없고, 햇볕정책은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김종인 대표는 이렇게 더불어민주당의 기존 입장을 당내 공론화 과정 없이 독단으로 전면 부정했다. 더민주의 상처라고 할 수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 논란의 대상이 되는 대기업 사장도 영입했다.
더민주당는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 대북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위안부 합의’ 재검토, 햇볕정책 고수로 표현해왔다. 당연히 외교안보 문제로 대치선이 형성된다. 그런데 김대표는 이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물론 한일정부간 합의를 바꾸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야당 입장에서도 햇볕정책 수정론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김 대표는 그런 점에서 현실주의적 접근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말 한 마디로 기존 입장을 수정함으로써 ‘당신이 뭔데 전통 야당의 정체성을 함부로 무너뜨리느냐’는 일부 반발을 불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 대표의 이런 과감한 주장이 전략적인 것이라면 3가지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외교안보 문제를 부각해 봤자 총선에 별 실익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판단이 들 때 할 수 있는 방법은 집권세력과의 정책적 차이를 없애거나 무시함으로서 대치 전선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민생 혹은 경제 문제에 집중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백화점식 공약을 내는 것 보다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이 있는 정당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다른 정책들을 과감히 포기하고 경제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박근혜 정권의 경제 실패를 부각시키고 대안 야당의 이미지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정책을 전환하느라 토론한 시간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③ “지지자만 보고는 총선 못 이긴다”
말인즉 옳다, 집토끼만으로 선거를 이길 수 없다. 산토끼를 잡아야 한다. 필리버스터 중단, 외교 안보 정책 수정도 산토끼를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집토끼가 집을 나갔다. 야당은 분열되어 있고, 호남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집토끼 잃은 상태에서 산토끼 좇다가 게도 구럭도 더 놓칠 수 있는 상황이다.
중도화, 보수화로 확장한다는 것은 확장의 주체가 있을 때 성립되는 논리다. 주체 없는 확장은 자칫 방황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소한 주체를 바로 세우는 작업과 중도 확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우선 시간이 없다. 더민주가 지지층을 결집시킬 역량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그게 있다고 해도 시간 여유가 없다. 물론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잠재적 야권 지지층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그러나 테러방지법 통과가 기정사실이 된 마당에 그건 한시적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승리를 전제로 한 게임이라는 사실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김종인 대표가 필리버스터 끝나자마자 야권 통합이라는 화두를 던졌을 것이다.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확장을 꽤하는 것으로 보인다. 매우 어렵고 정교하고 세련된 접근을 요구하는 고난도 과제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가 2월26일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 김종인이 바꾼 더민주당
ⓛ 어쨌든 과감한 돌파
김종인 대표는 독선적으로 당을 운영하고, 우경화로 가면서도 누구 눈치 안보고 과감하게 돌진한다. 과거 당대표가 이랬다면 당은 격렬한 노선 논쟁, 파벌 싸움에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김대표도 아무 신경 쓰지 않고, 당내 인사들도 너무 조용히 침묵하고 있다.
② 정교하지 않은 김종인의 변화 논리
김종인 대표가 불쑥 불쑥 한마디 던지듯 하는 방식으로 당 노선과 정책을 바꾸기 때문에 논리가 정교하지 않고 투박하다.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말 많고 드센 의원들이 가만히 따르고 있다.
③ 새로운 리더십
더민주당에서는 목격할 수 없는 리더십이 등장했다. 어떤 지도부가 등장해도 기어코 수렁에 빠뜨리는 당이 이번에는 새 지도부에 너무도 고분고분하고 이런저런 불만에도 불구하고 잘 따른다. 180도 변모했다.
김 대표는 문재인 체제 때 완성한 시스템 공천, 당 혁신을 무효화할 권한을 거머쥐었다. 시스템 공천은 특히 문재인 리더십 부재가 낳은 산물이다. 지도력에 대한 신뢰가 없는 조건에서 시스템이 지도자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로봇 공천이나 마찬가지다. 권한이 없는 로봇에게 공천권을 주고 책임도 로봇에게 물어야 할 판이었다. 이는 야당에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는 최소한의 정치적 윤리가 실종된 결과였다. 현재 김대표의 리더십이 좋은 결과를 낼지 판단은 이르다. 그러나 리더십이 당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 더민주당, 왜 이렇게 변했나
ⓛ 권력의 힘을 맛 보다
지금 야당에 절박한 것은 단 한번의 승리다. 그런데 현실은 승리와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선거는 코앞인데, 승리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필리버스터를 10일까지 계속하는 것이 나은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필리버스터 중단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지지층의 열기가 끓어오르는 절정의 순간에 불을 꺼버리는 결정을 기존 야당은 절대 할 수 없다. 의원들을 일일이 설득하지도 않고도 원내대표 한명의 기를 꺾어버리는 것으로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인물이 없다. 그런데 의원들은 이런 부당한 일, 절차를 무시한 월권에도 저지르고 보는 권력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 버렸다. 권력의 자신감과 저돌성, 과감성에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복종하고 있다. 권력의 맛을 제대로 보고 있다.
② 승리에 대한 욕구의 분출
야당 판에서는 결코 있어 본 적이 없는 것, 즉 야수적 충동과 권력 의지가 살아난 것일까? 승리를 목표로 삼고,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철저한 목적 지향적 행동을 야당은 해 본지 꽤 오래됐다. 이종걸 원내대표가 김종인 대표로부터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못하는 이 야당의 상황은 기존 야당에는 아무도 못했던 일, 즉 승리라는 사건을 그가 혹시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이 기대가 남아 있는 한 김 대표의 권력은 계속 커질 것이다. 그만큼 야당 전체의 운명이 김 대표의 일거수일투족, 그의 역량에 좌우됨으로써 불가예측의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 이제야 야당은 선거의 출발선에 섰다
ⓛ 굴욕은 여당에서 흔한 일
김종인 대표에게 야당 인사들이 굴욕을 당하는 사태는 승리에 신물이 난 새누리당에서는 흔한 일이다. 새누리당이 정당으로서 가진 최고 장점은 승리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중도 노선 전환도 그런 자세가 낳은 결과였다. 바로 그 때문에 승리를 거머쥐고 그 승리는 새로운 승리를 낳았다. 최근 김무성 대표 굴욕 사건도 바로 그 승리의 관점에서 따라 처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쟁 상대 계파의 수장인 당대표가 40명 공천 살생부설을 흘린 결정적 실수가 드러났으면 친박세력이 그것을 약점 잡아서 당대표를 궁지에 몰거나 사퇴압박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사과하는 것으로 적당히 타협했다. 총선을 앞두고 계파 싸움이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세는 기존 야당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2일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 강윤중 기자
② 승부가 시작됐다
이종걸 원내대표와 김무성 대표의 굴욕과 인내, 앙당 내의 침묵은 이제 양당이 승부하겠다는 자세를 갖췄다는 뜻이다. 승리한 야당이 무엇을 하려는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따질 분위기가 아니다. 지금 야당은 그런 것은 ‘이긴 다음 보자’, 이렇게 나갈 태세다. 야권 지지층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번 이겨봤으면 하는 열망에 불편함과 불만을 참고 있다. 진짜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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