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 그대로의 정치’에 대한 결핍 느끼던 시민들 뜨거운 관심과 열광
192시간 26분. 국회의원 38명 참여. 지난달 23일부터 지난 2일까지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의원들이 총 9일 동안 진행한 테러방지법안 반대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는 ‘세계에서 가장 긴 필리버스터’라는 기록을 세우고 막을 내렸다. 테러방지법안 통과는 막지 못했다. 필리버스터를 중단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못했다. 시작은 ‘야당 정치의 부활’을 알리는 듯했지만 “소수정당이라 힘이 없다”는 눈물 섞인 호소로 마무리됐다. 필리버스터 효과는 4·13 총선이 끝나봐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9일간의 필리버스터는 만연한 정치혐오를 걷어내고, ‘말’을 통해 진행되는 정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2월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테러방지법안을 직권상정하자 더불어민주당은 당론으로 필리버스터를 하기로 결정했다. 한국 헌정사에서 47년 만의 필리버스터였다.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으로 상임위원회에서 테러방지법안에 대해 쭉 논의해 왔던 초선 비례대표 김광진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이날 오후 7시5분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인터넷TV 누적 시청자 510만명
필리버스터가 시민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날 자정 무렵부터였다. 김광진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64년 필리버스터 기록(5시간19분)을 깨면서 ‘필리버스터’, ‘김광진’, ‘김광진 힘내라’ 등의 검색어가 포털 검색어 상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문병호 의원(국민의당)에 이어 24일 오전 2시30분 무렵 바통을 넘겨받은 은수미 의원(더민주)이 10시간18분 동안 발언해 최고 필리버스터 기록을 경신했다. 은수미 의원실에는 1만~2만원의 소액 후원이 2500건가량 한꺼번에 쏟아져 통장 8개를 더 만들어야 했다.
필리버스터에서 의원들의 발언을 토대로 테러방지법에 대한 뉴스와 게시글, 짤방(사진 콘텐츠)이 쏟아지면서 여론의 관심은 필리버스터를 하는 이유, 즉 ‘테러방지법’으로 옮겨붙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본뜬 ‘마이 국회 텔레비전’ 국회방송은 평소 시청률이 10배 폭발했다. 3200명이 필리버스터를 보겠다고 국회를 찾았다. 국회방송과 별도로 필리버스터를 인터넷 중계한 팩트TV의 누적 시청자 수는 지난달 29일 기준 510만명이었다. 필리버스터 실시간 요약 사이트도 만들어졌다. 하루 종일 생중계를 보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게 됐다.
필리버스터에 대한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열광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는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결핍을 방증한다”고 봤다. 서 교수는 “지금의 20~30대는 5공 청문회 때 노무현 의원이 명패를 던지던 장면을 못 봤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국회의원들이 국회라는 제도적 공간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얘기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하는 모습 자체를 처음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동안 정치인과 시민들은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있었다. 김제남 의원(정의당)은 “국민의 의견을 전달해 국회 속기록에 남기고 싶다”며 인터넷으로 접수된 의견을 읽었다. ‘20분 동안 책상 쾅쾅’ 등 누리꾼들의 재치가 담긴 아이디가 하나하나 기록에 남을 때마다 누리꾼들은 열광했다. 김 의원은 1998년 ‘데모 많이 하는 대학’ 출신에 성적이 나빴다는 이유로 운동권 경력을 의심받아 기무사에 끌려가 고압적인 조사를 받았다는 한 누리꾼의 사례를 소개했다. 개인의 기억이 역사로 남게 됐다. 전순옥 의원(더민주)이 “우리 오빠 전태일”로 발언을 시작했을 때 국회TV를 감상하던 채팅창은 술렁거렸다. 전 의원이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누리꾼이 많았던 때문이었다. 앵커 출신인 신경민 의원(더민주)은 뉴스 클로징 멘트 스타일로 박근혜 대통령의 독선을 비판해 야권 성향 시민들을 대신한다는 후련한 느낌을 줬다. 최해선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연구원은 “이번 필리버스터는 민주주의의 발견이라기보다 정치 자체의 발견이었다”며 “정치란 협잡이나 정치공작을 위해 잔머리만 쓰는 줄 알았는데, 의원들 하나하나가 생리적 욕구도 참아가며 몸뚱이 하나로 역부족인 상태를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날것 그대로의 정치’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의원들 발언 놓고 채팅창에 찬사 이어져
국회선진화법에 필리버스터를 할 경우 미국과 달리 안건 관련 발언만 하게 돼 있어서 ‘수준 높은 연설’을 보게 된 것도 열광의 한 이유로 꼽힌다. 김광진 의원(더민주)은 비상사태의 절차적 적법성을 따졌고, 은수미 의원(더민주)은 “인간은 억압받지 않고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익 의원(더민주)은 테러방지법을 ‘국민감시법’으로 규정한 뒤 “사찰당하는 나라에서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 어떤 사회·어떤 나라를 만들어갈 것이냐에 대한 정치인의 고민과 철학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현장이었다. 박원석 의원(정의당)은 동백림 사건·인혁당 사건 등 역대 국정원 조작사건을 상세하게 설명했고, 김경협 의원(더민주)은 기존의 대테러 지침을 읽었다. 서기호 의원(정의당)은 외국의 정보보호 사례를 전했다. ‘마국텔’ 채팅창에는 ‘인문학 강좌’, ‘현대사 강좌’, ‘법이 빛나는 밤에’라는 찬사가 잇따랐다.
국회의원 개개인의 개인사도 조명받았다. 안민석(더민주), 정청래(더민주), 정진후 의원(정의당)은 본인의 사찰과 고문 경험을 토로했고, 3선 의원이지만 이번에 공천에서 배제된 강기정 의원(더민주)은 “필리버스터를 대체 왜 하느냐”는 질문에 “이전에는 야당이 할 수 있는 것이 몸싸움밖에 없었다”며 “이런 제도(필리버스터)가 진작 있었다면 나도 폭력의원이라는 멍에를 지지 않았을 텐데”라고 인간적 답변을 해 호응을 샀다. “동물국회 시절 가장 동물적이었던 강기정 의원이 현대인 국회에서는 가장 평화적”이라고 지적한 SNS 문구가 호응을 사며 재전송됐다. 직장인 장은선씨(29)는 “필리버스터로 처음 알게 된 정치인들이 많다. 우리나라에 다양한 의원들이 있고, 나름 신념을 갖고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씨는 “이번 필리버스터는 어떤 전기가 될 수 있다. 한때는 공부하기 싫은 대학생들이 나라를 소란하게 만든다고 했다. 다음은 이기적인 노동자들이 경제를 망친다고 했다. 그리고 내내 일 안 하는 국회의원들이 나라를 망친다고 했다. 이제 그 누명에서 벗어날 때”라고 트위터에 적었다.
열광은 거꾸로 실망을 낳았다. 새누리당이 테러방지법 수정안을 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버티는 상황에서 필리버스터 중단 소식은 지난달 29일 박영선 비대위원의 목소리를 통해 나왔고,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국회의원들은 개별적으로 SNS에서 반발해 자중지란의 모습을 보였다. 김종인 더민주 대표가 “선거 망치면 책임질 거냐”며 이종걸 원내대표를 호통쳤다는 보도도 나왔다. 더민주는 의원총회를 하느라 예정된 기자회견도 연기해야 했다. 이종걸 원내대표의 사죄로 필리버스터를 마무리하고, 김종인 대표가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을 격려하고, 이목희 정책위원장이 “테러방지법 개정”을 공약으로 내놓으면서 당내 흐름은 정리되고 있는 모양새를 띠고 있다. 더민주는 필리버스터가 지속될 경우 선거구 확정안 연기로 인한 ‘총선 무산’의 후폭풍을 모두 떠안아야 하는 부담이 있는 데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실정 심판을 주요 총선 의제로 가져가는 전략에 차질을 빚게 된다는 판단에 따라 필리버스터를 중단했다. ‘세월호’ 등 SNS에서 호응 높았던 이슈에 몰입해도 현실의 선거에서는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패했다는 경험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직장인 장은선씨도 “팟캐스트를 듣거나 SNS를 하는 친구들은 필리버스터 얘기를 많이 하는데, 종편이나 지상파를 즐겨 보는 어르신들은 별로 관심이 없더라”고 전했다.
지난 4일 한국갤럽의 전국 성인남녀 1100명을 대상으로 한 정당 지지율 조사에 따르면 더민주의 지지율은 23%로, 지난주 대비 4%포인트 상승, 올해 최고치를 기록했다. 새누리당은 지난주보다 지지율이 4%포인트 하락한 38%를 기록했다. 국민의당은 9%, 정의당 4%, 없음·의견유보는 26%였다. 상승세지만 여전히 야권 전체보다 여권의 지지율이 높다.
의원들 개개인의 개인사도 조명 받아
필리버스터 정국은 지상파 방송에서 외면당했고, 종편에서는 조롱당했다. <TV조선>은 2월 24일 “(필리버스터에 참여하는 의원들이) 요실금 팬티도 준비했다”고 언급하는 보도로 더민주의 항의를 받았다. <중앙일보>는 지난 3일자 1면에 ‘필리버스터 역대 신기록, 경기침체도 역대 신기록’이라는 제목을 뽑아 경제문제의 책임을 야당의 필리버스터에 떠넘겼다. 서복경 교수는 “필리버스터의 확산이 가로막히는 데는 분명 미디어적 한계가 있다. 그러나 미디어의 한계는 정당의 조직력으로 돌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미디어의 중계 없이 정당과 시민이 직접 만나는 기회를 계속 차단해가는 ‘정당법’과 ‘정치개혁’ 과정이다. 2004년 ‘오세훈 선거법’으로 불리는 정치개혁법이 통과되면서 각 정당의 지구당이 폐지됐고, 합동유세도 금지됐다. 정당의 지역 사무실인 지구당과 합동유세가 ‘돈 선거’의 원흉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선관위도 현재 시민들의 정치참여는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서 교수는 “예전에는 시민들이 불만이 있으면 지구당에 항의방문하고, 이런 것들이 정치인과 유권자가 직접 만나지 못해도 정당에 압력 요소가 되고 시민들과 접촉하는 계기도 됐다”며 “지금은 4년에 한 번 선거가 오지만 정치인이 누군지 충분히 알기 쉽지 않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시민과 정치인은 만날 기회가 없이 단절된다”고 말했다. 필리버스터의 열광을 불러온 ‘날것 그대로의 정치’에 대한 결핍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진보정당에 특히 취약하다. 임한솔 정의당 서울 서대문구위원장은 “선거운동 기간도 2주로 제한돼 있고, 예비후보 등록을 해도 후보 본인이 명함을 돌리는 것 외에 유권자를 만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생활체육 지도자 자격증이 있는 임 위원장은 지역에서 꾸준히 운동모임을 열면서 시민들과 접점을 늘려가려고 한다. 그러나 각개약진에도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필리버스터에서 보인 것처럼 연설이나 정책설명 등 정치 본연의 방식으로 소통할 기회가 부족하다. 지난해 4월 국회에서 열린 정치개혁특위에서도 ‘지구당’이 부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지구당 대신 정체불명의 사조직을 동원하게 되고, 인지도 높은 현역에게 선거가 턱없이 유리해져 지역주의 구도 고착화에도 한몫한다는 사실이 지적됐다.
필리버스터 정국이 끝난 여야는 본격적으로 총선을 위한 활동에 돌입했다. 하지만 총선이 끝난 후, 시민들이 정당을 떠나 정치권 자체에 보인 모처럼의 관심과 애정을 ‘항구적인 관계’로 바꿔나갈 과제가 남았다.
뉴미디어 속 필리버스터 기록관리 재생산
짧아도 2시간. 길면 12시간. 필리버스터를 위해 연단에 서는 의원들의 발언 시간이다. 하루 종일 국회방송을 들으면서 의원들의 주요 발언을 정리하고 쟁점을 파악하는 것은 고학력 엘리트의 전유물이거나 시간이 많은 사람들에게나 허락된 특권처럼 비춰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회에서 방대한 말의 향연이 열릴 때, 시민들은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한 참여 아카이빙(기록관리)으로 잔치를 즐길 수 있었다. 뉴스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루5분 스푼’은 ‘필리버스터 한눈에 보는 사이트’를 표방한 필리버스터 투데이(http://www.filibuster.today)를 열었다. 홈페이지 상단에는 국회방송을 링크해 생중계되는 연설을 들을 수 있도록 했으며, 하단에는 김광진 의원부터 이종걸 의원까지 38명의 의원들 발언시간과 내용이 요점만 뽑혀 조목조목 정리됐다. 발언 요지는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구글에도 시민참여 기록문서(https://docs.google.com/spreadsheets/d/1iupVJIgvAdy4d9wtMn0Mn1VSpWcI97hGSbSKkQSQG50/htmlview?sle=true#)가 열렸다. 엑셀 형식으로 된 이 사이트에서는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의 프로필, 관련기사, 중개채널, 관련 여론조사 현황 등이 정리돼 있다. 언론기사뿐 아니라 커뮤니티 사이트나 정당 게시판에 올라온 테러방지법 관련 콘텐츠도 링크돼 있다. 국회의장에게 편지를 남기거나 의원들에게 후원할 수 있는 사이트도 안내돼 있고, 문서에 직접 의원들에게 건네는 응원도 남길 수 있다. 기록, 정보제공, 참여까지 한 문서에서 제공하는 셈이다.
국회의원들에게 필리버스터에서 ‘말할 거리’를 제공하거나, 의견을 직접 전달하는 사이트도 열렸다. 김제남 의원, 최민희 의원 등이 이 사이트에 올라온 의견을 전달해 호응을 받았다. 필리버스터 반대 서명 사이트도 순식간에 생겨났다. 사용자들이 직접 제작하는 온라인 백과사전 사이트 위키백과와 나무위키에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항목이 생겨 갱신과 업데이트가 이뤄졌다.
‘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라는 애칭을 얻은 아프리카TV 국회방송 채팅창에서는 국회의원들의 이미지를 게임 속 역할이나 이미지로 비유했다. 김광진 의원은 열혈 총학생회장, 박원석 의원은 전공에 해박한 교수, 신경민 의원은 교장선생님, 이런 식이다. 필리버스터가 시민에게 ‘놀이’로 쉽게 다가가게 한 셈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정치 고관심층과 저관심층을 연결했다. 2월 25일 강기정 의원이 “19대 국회에도 이런 제도가 있었다면 저도 폭력의원이란 누명을 쓰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해 맥락을 몰라 어리둥절했던 사람들은 “동물국회에서 가장 동물적이었던 강기정 의원”이라는 트윗 멘션을 보면서 이해했다. 4대강 예산·미디어법 통과를 몸으로 막으려다 폭력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강 의원의 과거사가 평소 정치에 관심 많던 트위터 이용자의 멘션을 통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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