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술탄’이라 불리며 권력을 휘둘러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군부 내 소수 집단의 소행”이라며 거리로 나와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미 군인들이 국영방송 등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했으며, 경찰 등 17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앙카라의 의사당에서 수 차례 폭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세속주의를 바탕으로 한 헌법을 무시하고 이슬람주의를 강화하면서 국민들을 통제하려 해 온 에르도안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난민 문제 등에서 터키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온 유럽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군부, “권력 장악” 선언
터키 군인들은 15일 밤(현지시간) 국영 TRT TV 방송을 통해 수도 앙카라와 최대 도시 이스탄불의 주요 국가시설들을 장악했으며, 권력을 확보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성명을 냈다. 군인들은 성명에서 “평화위원회”가 이제 국가를 운영하고 있으며 군법에 따라 야간 통행금지령을 내린다고 발표했다.
군인들은 TV에 출연하는 대신 아나운서를 통해 읽게 한 성명에서 “현 정부는 민주적이고 세속주의적인 법의 지배를 무너뜨렸다”면서 새 헌법을 공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몇몇 민간인들이 TRT 방송 건물에 진입하려 했다가 붙잡혔으며, 방송사 내부에서 총격이 벌어져 1명이 다쳤다고 현지 일간 휴리에트는 전했다.
CNN튀르크는 앙카라의 합동참모사령부에서 헬기 총격이 일어났으며 군인들을 태운 버스 두 대가 TRT 방송에 진입했다고 보도했다. 현재 방송의 정규 프로그램은 모두 중단됐고 일기예보만 나오는 상태다.
군의 성명과 함께,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이 만나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대교들은 통행이 금지됐고 군인들이 배치됐다. 앙카라에서 총성과 함께 최소 1차례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는 보도도 있다. 이스탄불 중심가의 탁심 광장도 군인들이 장악했다. 탁심 광장은 2013년 에르도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군중 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당시 에르도안 정부는 시위를 유혈 진압해 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이스탄불 경찰 사령부에서도 총격이 들렸으며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밖에는 탱크가 주둔하고 있고, 모든 항공편이 취소됐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국영 아나돌루통신은 전투기들과 헬기가 앙카라 경찰본부에 2차례 사격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스탄불 경찰본부 주변의 도로는 통행이 금지됐다. 휴리에트는 쿠데타 과정에서 경찰 17명이 숨졌다고 전했다.
■에르도안 “일부의 소행, 대가 치를 것”
군부 내 쿠데타 그룹을 주도하는 인물이 누구이며, 군부에서 어느 정도나 쿠데타에 가담했는지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터키 대통령궁 관계자는 로이터통신에 이 성명이 육군 사령부의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은 일부 군 고위 간부들은 구금된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언론들은 군 최고사령관인 훌루시 아카르 장군이 군 사령부에 인질로 구금돼 있다고 보도했다. 앙카라의 사령부 건물은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들이 장악한 것으로 전해졌다.
육군 제1사령관 유미트 듄다르는 이스탄불 주지사와 쿠데타 직후에 연락을 취했으며 “육군 제1사령부의 소규모 그룹”이 봉기를 일으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럽연합(EU)의 한 소식통은 로이터통신에 “몇몇 장교들의 소행이 아니라 군부 내 실세들이 결합된 잘 조율된 쿠데타로 보인다”고 말했다.
쿠데타 발생 당시 에르도안은 서부 이즈미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으며, 앙카라 귀환을 시도했으나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들이 항공기 운항을 중단시켜 발이 묶인 것으로 전해졌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CNN튀르크 방송과 휴대전화로 인터뷰를 하면서 “소수 군인들이 일으킨 봉기”라며 곧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군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상응하는 엄중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면서 이번 사건을 이슬람 수피즘 성직자 페툴라 귤렌 추종자들이 일으킨 소동이라고 일축했다. 귤렌은 미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인물이며 에르도안을 강력 비판해왔다.
에르도안은 국민들을 향해 쿠데타에 맞선 봉기를 일으키라고 촉구했다. 그는 “나는 터키 국민들이 공공 광장과 공항에 모여 집회를 하기를 촉구한다. 민중의 힘보다 더 높은 권력은 없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비날리 을드림 총리도 NTV와의 전화 통화에서 “군 내의 한 그룹이 사령부 지휘체계에서 벗어나 불법 행동을 했다”며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이런 행동은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키르 보즈다우 법무장관은 “우리의 시신을 넘어가기 전에는” 쿠데타 시도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며 모든 정당들과 방송이 민주주의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터키 정보기관은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고 주장했다.
휴리에트는 앙카라의 크즐레이 대로에 군중들이 모여들었다고 보도했으나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이들인지, 쿠데타를 지지하는 이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집권 정의개발당(AKP) 당사에도 군인들이 몰려와 당사에 들어가려는 당 간부들을 제지했다.
■에르도안 막무가내 행보가 쿠데타 불렀나
올해 66세인 에르도안은 1994~1998년 이스탄불 시장을 지내고 2001년 정의개발당을 창당했다. 2003년부터 11년간 총리로 재임했으며, 헌법을 바꿔 대통령에게 권한을 몰아준 뒤 2014년 대통령에 취임해 13년간 권력을 휘둘러왔다. 스스로를 ‘보수적인 민주주의’라 칭하지만 이슬람주의 성향의 정치인이다. 1998년 이슬람주의에 기인한 ‘종교적 불관용’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공직에서 쫓겨난 바 있다.
터키는 공식 석상에서 여성 공직자나 공직자 부인들이 히잡을 쓰는 것도 금기시됐을 정도로 정교 분리 원칙이 강한 나라였으나 에르도안이 집권한 후 이런 세속주의 원칙이 상당부분 깨졌다. 에르도안은 특히 대통령이 된 뒤에는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시민 권리를 제한해 반발을 샀다. 지난해부터 터키 주요 언론들을 재정 상태와 상관 없이 정부가 인수한 후 파산시켜 폐간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제하고 인터넷을 검열하는 것으로도 악명 높다. 2013년 5월 에르도안의 권위주의와 독재 시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에르도안 정부는 이스탄불 탁심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강제진압해 22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시리아의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를 격퇴하기 위한 국제 공동작전에 참여하면서도 IS와 싸우는 쿠르드계 반군을 공격해왔다. 이 때문에 지난해 이후 터키에서는 IS의 테러와 쿠르드계 분리주의 집단 양측의 테러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달에도 이스탄불 국제공항에서 IS의 소행으로 보이는 테러가 일어났다.
에르도안은 최근 아흐메트 다부토울루 총리가 대통령의 권한 남용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경질시키고 측근인 을드름을 앉혔다.
■‘세속주의 수호’ 군부의 반란인가
터키에서는 공화국을 수립한 국부(國父) 케말 아타튀르크의 뜻과 헌법에 규정된 ‘세속주의’가 침해받는다고 판단되거나 정국 혼란이 이어지는 경우 ‘공화국의 수호자’로 자부해 온 군부가 나서서 정권을 장악, 새 정부를 구성하게 한 후 민간정권에 이양하는 식의 쿠데타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일어난 적 있다. 부패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무너뜨리고 근대적 개혁을 하겠다며 1913년 ‘청년투르크’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터키 공화국 창건의 바탕이 됐다. 1960년과 1971년, 1980년에도 군이 나서서 정권을 장악했다.
가장 최근의 쿠데타는 1997년에 일어났다. 당시 복지당을 이끌던 에즈메틴 에르바칸 총리가 세속주의 원칙을 깨고 이슬람주의를 추구하자 군 지도부가 국가안보위원회를 구성하고 에르바칸의 연립정권을 무너뜨린 뒤 권력을 접수했다. 군부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물리적 충돌이나 유혈사태는 없었다. 이 사건은 당시 쿠데타를 주도한 살림 데르비쇼울루 장군의 표현대로 ‘포스트모던 쿠데타’라 불렸다. 쿠데타 뒤 복지당은 정교분리 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해산됐다. 1999년 총선이 치러져 군부는 민간에 정권을 이양했으며 뷸렌트 에제비트 총리가 취임하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160900001&code=970205&nv=stand#csidxb277565664eed04b98eff147ac9b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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